[415] 디 임팩트 17권 15화
영국에서 돌아온 도현은 홍영과 오랜만에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갔다. 손에 검 대신 팝콘과 음료수를 든 모습이 어딘지 어색해 보이는 도현의 팔을 홍영이 끌어당기며 재촉했다.
“어서 가요. 영화 시작하겠어요.”
“그러니까 그냥 영화 보자고 했잖아요. 팝콘 없어도…….”
즉흥적으로 결정된 이날 영화 관람이라서 시간에 쫓기듯 움직여야만 했다.
주말이라 사람은 많았고 도현은 한참을 기다려서야 홍영이 좋아하는 팝콘을 살 수 있었다.
“그러니까 팝콘을 괜히 샀다는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잘 샀어요. 영화는 팝콘이죠.”
홍영의 서운해하는 눈빛에 도현은 말을 얼버무리며 상영관으로 도망치듯 걸어갔다.
피식 웃음을 흘린 홍영은 그의 뒤를 따라갔다.
2시간쯤 뒤, 사람들이 붐비는 극장에서 나온 도현은 홍영에게 물었다.
“영화 어땠어요?”
“좀 그랬어요.”
“재미없었어요?”
“재미는 있는데, 결국엔 새드 엔딩이잖아요. 유쾌하게 끝나기를 바랐는데…….”
슬픈 표정을 짓는 홍영에게 도현이 난처해하며 말했다.
“다른 영화를 볼 걸 그랬나.”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홍영은 슬픈 표정을 지우며 도현의 팔짱을 끼었다.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던 도현은 턱을 괴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미소를 보였다.
“왜 안 먹어요?”
“배불러요, 팝콘을 많이 먹어서.”
“팝콘이 얼마나 된다고. 집에 가서 후회하지 말고 어서 먹어요. 여기 비싼 곳이잖아요. 돈 쓴 만큼 제대로 먹고 가야죠.”
1인당 20만 원이 넘는 고가의 저녁 식사였다.
“도현 씨, 영화 결말이 자꾸 생각나요. 남자 주인공이 자신을 희생해 여주인공을 살리는.”
영화는 액션 판타지 영화였지만 마지막 장면은 여성 관람객들의 눈물을 쏙 빼놓기 충분할 정도로 안타까운 결말이었다.
“영화잖아요. 그만 잊고 식사해요.”
“도현 씨는 어떤 선택을 할 거예요?”
“뭐가요?”
도현은 음식을 입에 우물거리며 홍영을 쳐다봤다.
“영화 속 주인공이 도현 씨라면요.”
“글쎄요.”
물을 한 모금한 도현은 영화의 결말에 대해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는 홍영을 잠시 바라보다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나라면 여주인공을 버려두고 혼자 살겠어요.”
“뭐라고요? 진짜요?”
생각과 다른 대답에 홍영이 등을 바로 세우며 도현을 응시했다.
“어차피 영화잖아요. 그런 결말도 재밌을 것 같은데. 감독 판이 나오려나?”
분위기가 너무 무거운 것 같아서 농담을 했다.
하지만 홍영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렇게 해야 해요. 나 때문에 도현 씨가 잘못되면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을 거예요. 차라리 내가 죽고 도현 씨가 사는 게 나아요.”
“홍영 씨, 왜 그래요. 웃자고 한 소린데.”
정색을 하며 말하는 홍영의 태도에 도현은 당황했다.
“홍영 씨를 위해서라면 나도 뭐든 할 수 있어요. 알잖아요, 그게 내 진심이라는 걸.”
“화내는 거 아니에요. 내 마음이 정말 그렇다는 걸 말해 주고 싶어서예요.”
그녀는 탁자 위로 손을 뻗어 도현의 거친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래서 오늘 본 영화 결말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요.”
도현은 홍영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위하는지 그녀의 눈빛과 말투 그리고 손의 온기를 통해 모두 전해져 왔다.
자신의 마음 역시 홍영에게 온전히 전달되기를 바라며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영화 결말을 두 남녀가 같이 위기를 벗어나도록 아예 스토리를 바꾸는 게 좋겠어요.”
“동감이에요.”
환한 미소를 지은 홍영은 그제야 식어 버린 음식에 손을 가져갔다.
며칠 후 이계로 다시 가는 도현이 이 순간을 기억하며 무사히 돌아오기를 그녀는 기원했다.
‘자주도 부르는군, 빌어먹을 자식.’
주성하는 벌레 씹은 표정으로 마카오에 소재한 고진영의 호텔 카지노 앞에 섰다.
죽은 섭상은 홍콩에서 부동산 투자 개발 회사를 운영했지만 고진영은 마카오에서 카지노를 운영했다.
‘오늘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부른 걸까?’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호텔 23층에 도착한 그는 복도를 통제하는 카지노 소속 경비들을 지나쳐 고진영이 숙소로 사용하는 스위트룸으로 들어갔다.
접견실엔 이 방의 주인인 고진영뿐만 아니라 육기천, 방상까지 앉아 있었다.
죽은 사형제들과 파문되어 행방이 묘연한 청선을 제외한 다섯 명의 사형제 중 네 명이 이 자리에 모인 것이다. 료쿄까지 왔으면 전체 사형제들이 다 모이게 되는 상황이다.
‘심상치 않은데?’
가라앉아 있는 방의 분위기에 주성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부르셨습니까, 사형.”
주성하의 인사에 고진영이 불쾌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육기천이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제정신이 아니구나. 고 사형이 대제자가 된 게 언젠데, 아직도 사형이냐?”
“아, 예. 죄송합니다.”
주성하는 키 작고 성질 더러운 육기천을 속으로 욕하며 고진영에게 다시 인사를 했다.
“부르셨습니까, 대사형.”
“늦었구나.”
“죄송합니다. 서둘러 온다는 게 좀 늦었습니다.”
주성하는 허리를 굽혔다.
“죽은 섭 사형이 불렀다면 바로 뛰어왔겠지? 내가 윗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거냐?”
고진영은 차를 마시며 차가운 눈길로 주성하를 쏘아봤다.
“아닙니다, 대사형.”
“조심해.”
“예!”
주성하는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의 실력으론 사형들 중 어느 한 명도 제대로 상대할 수 없었다.
‘왜 아무 말도 없지?’
자리에 앉은 지 한참이 지나도록 고진영은 차만 마시고 있었다. 부른 사람이 말이 없으니 주성하는 신경이 점점 곤두섰다.
‘혹시 섭 사형의 숨겨 둔 재산이 들통난 건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주성하는 고진영과 다른 사형들의 긴 침묵이 부담됐는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뭘 찾고 다니는 거냐.”
고진영이 큰 덩치답게 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료쿄와 뭘 찾고 다니는 거냐고 물었다.”
깜짝 놀란 주성하는 표정 관리를 했다.
“찾고 다니는 거라뇨. 그런 거 없습니다.”
“없어?”
고진영이 육기천을 돌아봤다.
“여기 육 사제가 며칠간 널 감시했다. 섭 사형의 재산이 생각보다 적은 것 같아서 말이다. 그런데 재밌게도 넌 료쿄와 함께 인적 드문 산을 뒤지고 있더구나.”
“대사형, 그건 말입니다.”
“닥쳐.”
조용히 상황을 보고 있던 육기천이 찻잔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주성하의 이마에서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주성하의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노려보면 어쩔 거야.”
육기천의 손이 번개처럼 날아와 주성하의 뺨을 좌우로 후려쳤다.
“감히 대사형 앞에서 거짓말을 하다니. 너와 료쿄가 산을 조사하는 걸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그만하십시오!”
뺨을 맞던 주성하가 울분에 찬 목소리로 육기천의 손을 막았다. 그의 입안은 피투성이였다.
“사형에게 대드는 거냐, 지금?”
“그게 아니라 제가 말할 틈은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이 자식이!”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는 육기천은 키 크고 잘생긴 주성하가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름다운 료쿄에게 자신은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는데, 이 녀석은 오래전부터 낄낄대며 농담도 하고 붙임성 있게 같이 다녔다.
시샘과 질투는 곧 이유 없는 미움과 증오로까지 발전했다.
섭상이 살아 있을 땐 그의 눈이 무서워 함부로 대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섭상은 죽었고 대사형인 고진영은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다.
‘이참에 죽여 버릴까?’
육기천의 눈에 살기가 짙어졌다.
“육 사제, 물러나.”
“대사형, 이놈은 영악한 놈입니다.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니 이 기회에…… 크헉!”
옆구리에 고진영의 장풍을 맞은 육기천은 벽에 걸린 유리 거울을 깨며 바닥에 처박혔다.
“물러나라면 물러날 것이지 웬 잔말이 많아!”
고진영은 신음을 흘리는 육기천을 노려보다가 엉거주춤 서 있는 주성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거짓말하면 죽여 버릴 거야. 료쿄와 뭘 찾고 있었어?”
주성하는 이 상황이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짜증이 났다. 여러 거짓말을 순간적으로 떠올렸지만 이미 주목을 받게 된 이상 그 거짓말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어느 정도 진실을 말해 이 위기를 넘겨야만 한다.
“담기량의 은거지를 찾고 있었습니다.”
“담기량이라면…… 원나라 말기에 활약했던 그 절세 고수를 말하는 거냐?”
“그렇습니다.”
방 안의 사람들은 그의 대답에 모두 놀라 눈이 커졌다.
“섭 사형의 지시로 사부님 몰래 그의 은거지를 찾고 있었습니다. 비록 섭 사형은 죽었지만 전 제가 하던 일을 중단할 수 없어서 그대로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위치는 알고 있느냐?”
“정확한 장소는 모릅니다. 알았다면 제가 벌써 찾아냈겠지요.”
주성하는 기예잡술서에서 찾은 지도를 바탕으로 몇 군데를 특정해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심정으로 찾고 있다고 부연 설명을 했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지? 내가 대사형인데.”
고진영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성하를 쳐다봤다.
“대사형이기 때문에 감히 말씀 못 드린 겁니다. 대사형이 사부님께 이 사실을 말씀하실 것 같아서요. 그렇게 되면 제 목숨은 끝난 게 아닙니까?”
“음.”
고진영은 각진 턱을 만지며 주성하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말하는 태도가 아주 당당했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대사형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주성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속지 마십시오, 대사형. 이놈은 담기량의 무공이 탐나 우리를 속인 것에 불과합니다. 벌을 줘야 합니다.”
육기천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육 사제, 자리에 앉아.”
“대사형.”
고진영의 짙은 눈썹이 슬그머니 위로 올라갔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뚱뚱한 방상이 급히 육기천을 끌어당겨 소파에 앉혔다.
“사형, 왜 그러십니까. 주성하를 벌주면 료쿄까지 벌줘야 하는 걸 모르십니까?”
방상의 귓속말에 육기천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방상의 말대로 어느 한쪽만 벌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료쿄에 대한 연정을 아직 품고 있는 그는 주성하를 잠시 노려보다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조용해진 가운데 고진영이 말했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사부를 진심으로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살려니 따르는 거야. 나도 그렇고, 너희들도 그렇고.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힘을 모아야 한다. 주 사제, 일어나.”
무릎 꿇고 앉아 있던 주성하는 육기천을 힐끔 쳐다본 후 일어섰다.
“앞으로 우리는 전력을 다해 담기량의 은거지를 함께 찾는다.”
고진영이 선언하듯 말했다.
“청선을 끔찍이 편애했던 사부가 한순간에 청선을 잡아 죽이려고 하는 걸 보면 섭 사형의 말대로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다. 언제 우리도 그 꼴이 될지 모른다. 현재 우리 수준으로는 사부를 감당할 수 없지만, 담기량의 은거지를 찾아내 우리 사형제들이 기연을 얻게 된다면 얘기가 또 달라질 것이다.”
“맞습니다, 대사형!”
방상이 기뻐하며 박수를 쳤다.
“육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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