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 디 임팩트 17권 16화
“네, 대사형.”
“개인적인 감정은 묻어 두고 방상과 함께 주성하를 지원해라.”
잠시 대답이 없던 육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죠.”
“주 사제, 얼굴 씻고 와. 피가 많이 묻었군.”
주성하가 접견실 밖에 있는 욕실로 가자 고진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육 사제와 방 사제는 담기량의 은거지를 찾으면서 저 녀석을 잘 감시해야 한다. 료쿄는 물론이고.”
“대사형, 힘을 합해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방상이 멀뚱거리며 묻자 육기천이 그의 뒤통수를 쳤다.
“조용히 해, 넌.”
형제처럼 붙어 다니는 방상의 입을 다물게 한 육기천은 고진영의 얼굴을 보며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맡겨 두십시오.”
잠시 후 주성하가 접견실로 돌아오자 고진영은 겉옷을 걸쳐 입었다.
“오랜만에 우리끼리 술 한잔할까?”
웃는 얼굴로 말하던 그는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예,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그는 뻣뻣해진 목을 풀어 줬다. 사부와 얘기를 할 때면 언제나 긴장이 됐다.
고진영은 주위에 서 있는 사형제들에게 말했다.
“사부님이 폐관 수련에서 나오셨다.”
“예? 벌써 말입니까?”
“등선궁으로 모이라는 지시야. 주 사제, 료쿄에게는 네가 연락을 해라.”
“알겠습니다, 대사형.”
주성하는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장철호는 고시원을 나와 도장 근처로 이사를 했다. 원룸 월세였지만 그는 행복한 표정이었다.
“널찍하니 좋군.”
중고 가전제품과 가구로 방을 채운 그는 방바닥에 아이처럼 뒹굴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도현과 용주, 홍영은 가볍게 웃었다.
“형도 참 대단해요. 도현이가 집을 구해 준다고 해도 여기로 이사 오고.”
“자식아, 이계에서 뼈 빠지게 고생해서 벌어 온 금화를 내가 어떻게 사용하냐?”
“난 사용하는데.”
용주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중국집 전단지를 보며 음식을 주문하려 했다.
“이사 음식은 원래 주인이 사는 거니까 형이 쏘세요.”
“어, 나 돈 없는데? 보증금이 올라서 탈탈 털어 냈다고. 며칠 뒤에 먹자. 내가 며칠 일하면 돈이 모이니까.”
막노동을 해서 음식을 사 준다는 말에 용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 정말 마음 아프게 왜 이래요? 눈물 나잖아요.”
“뭐가 어때서, 인마! 원래 그렇게 해서 내가 돈을 벌고 있는데.”
“아이 씨, 알았어요, 내가 살게요. 벼룩의 간을 빼 먹지 내가.”
용주는 자신이 돈을 내기로 하고 중국집에 전화 주문을 했다.
“도장과 가까우니 좋네요.”
도현은 집 안을 둘러보며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
고시원에서 폐인처럼 살다 몸을 회복하고 원룸으로 이사한 그의 기분이 어떨지 조금은 짐작이 됐다.
성취감이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 사람의 더 큰 미래를 위한 자양분이 된다. 장철호는 자양분을 꾸준히 자신의 주위에 뿌리고 있었다.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그의 완고함이 불만일 때도 있지만, 그것이 그가 성장하려는 방향이라면 믿고 인정해 줘야 한다.
“오빠, 선물 가져왔어요.”
“응? 선물?”
홍영은 집 밖에 두었던 선물을 가지고 왔다.
선물은 커다란 사진 액자였다.
“오, 이거 그때 찍은 사진이구나?”
최준영의 목검 수여식 날 관원들과 다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 장철호는 허전한 벽 한쪽에 사진을 걸었다.
“마음에 들어요?”
“그럼, 누구 선물인데.”
기뻐하는 장철호를 보며 홍영은 활짝 웃었다.
얼마 후 중국집에서 배달 음식이 왔다.
“많이도 시켰다.”
자장면과 탕수육, 팔보채를 보며 장철호가 혀를 찼다.
“형, 사람이 몇 명인데. 드세요.”
먹성이 좋은 용주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배를 채워 갔다.
“야, 어디 가?”
자장면을 한 입 크게 넣은 용주는 양 볼이 불룩해진 얼굴로 도현을 쳐다봤다.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 신경 쓰지 말고 먹어.”
집 밖으로 나온 도현은 주변을 돌아보며 전화를 받았다.
“네.”
-백 형, 사부가 폐관을 마치고 나오셨소.
주성하의 말에 휴대폰을 잡은 도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알 수 없는 그의 폐관 수련 기간 때문에 상당히 신경 쓰였는데 예상보다 빨리 나타났다.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마 등선궁에 있을 거요, 우리들을 그곳으로 집합시킨 걸 보면. 한데, 사부와 이대로 싸울 거요?
“기회가 왔으니까.”
-백 형,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닌가 싶소. 불과 몇 개월 전에 사부에게 패했는데 말이오. 다시 기회를 보는 것이 어떻겠소?
“설령 내가 패하더라도 폐관 수련을 하고 나온 그가 얼마만큼 강해졌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이니 물러날 수 없소.”
단단한 도현의 목소리에 주성하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알겠소, 뜻이 그렇다면. 아무튼 조심하시오.
“나를 걱정하는 겁니까?”
-내겐 사부도 적이고 사형제들도 적이라오. 당신이라도 있어야 내가 숨통이 좀 트일 것 같아서 하는 소리요.
“사형제들과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나와 구사저가 담기량의 은거지를 찾고 있다는 걸 그들이 눈치챘소. 어쩔 수 없이 당신에 대한 얘기는 숨기고 나머지는 있는 그대로 얘기했는데, 어찌 될지 모르겠소. 겉으로는 힘을 합해 담기량의 은거지를 찾아 사부에게 대항하자고 하는데 말이오. 믿을 만한 자들이 아니라서.
도현은 잠시 생각을 하다 말했다.
“당신이 나를 돕듯 나도 당신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담기량의 은거지는 내 것이기도 하고.”
-하하하, 든든한 말이오. 사부와의 싸움에서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겠소.
전화를 끊은 도현은 뒤를 돌아봤다. 홍영이 나와 있었다.
“누구예요?”
“주성하였어요. 태선군이 폐관 수련을 마치고 등선궁에 있대요. 중국에 가 봐야겠어요.”
#꽃다발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주변을 둘러봤다.
땅은 깊게 파였고 나무들은 잘리고 부서져 사방에서 썩어 갔다.
산속 숲은 몇 개월 전 그와 복면인의 싸움에 휘말려 폐허가 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축지법을 쓰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숲을 빠르게 이동하던 노인은 낭떠러지 같은 계곡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패천공으로 복면인을 상대하고 돌아와 보니 청선은 보이지 않았다.
당시 많은 비로 인해 협곡처럼 들어간 이 계곡엔 바다와 같은 물이 도도히 흘러내려 갔다. 그 흐름 속에 사람 한 명이 휘말려 들어갔다면 몸이 갈기갈기 찢겨 형체를 남기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정녕 그렇게 죽은 것이냐, 아니면 살아 있는 것이냐?”
청선의 생사를 두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것이 태선군은 못내 아쉬웠다.
“대체 전대 문주는 오원신공을 내게 주지 않고 왜 일을 이렇게 어렵게 만들었나? 그로 인해 검선문이 이 꼴이 된 것이야.”
전대 문주를 탓한 그는 준비한 술을 꺼내 계곡에 뿌렸다.
“청선아, 부디 죽었기를 바란다. 네가 좋아하는 도경도 보내 주마.”
등선궁에 굴러다니던 낡은 도경을 챙겨 온 그는 패천공을 이용해 엄청난 열기를 만들어 냈다. 손이 용광로처럼 달아올랐고 도경은 금세 불타 재로 변했다.
계곡에 검은 재들이 눈처럼 휘날렸다. 그 모습을 보며 태선군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벽곡촌 사람들을 죽여 흡수한 선천지기로 인해 그는 마침내 패천공 4성의 벽을 허물고 5성의 경지에 이르렀다.
5성에 도달하자 축 처졌던 근육들이 탱탱해졌고 기력이 넘쳤다. 아무리 강해도 세월 속에 신체는 늙는 법이나 패천공은 세월을 역행하는 신묘한 힘이 있었다.
패천공의 경지가 높아질수록 그의 신체는 점점 젊어질 것이다.
미소를 짓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으음, 또다시 찾아왔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엄청난 두통에 괴로워했다. 머리가 수백 조각으로 갈라지는 고통이었다.
두 무릎을 꿇고 힘들어하던 그는 고통이 가시자 무거운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벽곡촌 사람들의 선천지기는 양날의 칼이었다. 패천공을 발전시키는 힘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의 머리에 극심한 고통을 줬다.
지금은 두통에서 끝났지만 이것을 다스리지 못하면 정신이 다쳐 광인이 될 수도 있다. 함부로 다른 사람의 선천지기를 흡수한 대가였다.
“태청단을 만들어서 복용해야 해.”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라도 정신을 보호해 주는 약이 필요했다. 약재들이 하나같이 귀하고 구하기 어렵지만 제자들을 풀면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등선궁으로 돌아온 그는 제자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
해가 서서히 기울 무렵, 신법을 펼치며 고진영, 육기천, 방상, 료쿄, 주성하가 등선궁에 도착했다.
“사부님을 뵈옵니다!”
청석이 깔린 연무장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던 태선군은 몸을 돌려 제자들을 봤다.
“잘들 있었느냐?”
“예!”
“그렇게 잘들 있으면서 어째서 이곳은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것이냐?”
태선군은 낙엽이 가득한 연무장과 거미줄이 쳐진 등선궁을 훑어봤다.
“고진영.”
“예, 사부님.”
“대제자로서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산속 가을은 추웠다. 그러나 고진영의 몸은 땀으로 범벅이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제 불찰입니다. 사부님이 등선궁을 싫어하셔서 방치해 두시는 것 같아 그 뜻을 따르고자 했는데……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래선 내가 하룻밤도 머물 수가 없다.”
그 말을 남기고 태선군이 등선궁을 떠나자 고진영과 사형제들은 서둘러 등선궁 이곳저곳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거미줄이 제거됐고, 이내 등선궁은 사람이 머무는 도관처럼 깨끗해졌다.
“웬 변덕인지 모르겠습니다. 청선이 있을 땐 등선궁을 거들떠보지도 않더니만, 이제 와서 관리를 하라니.”
주성하는 등선궁 앞에 흐르는 계곡물에 걸레를 빨며 료쿄에게 속삭였다.
“당분간 이곳에 머물려고 하는 것 같아.”
“이유가 뭘까요? 속세를 좋아하는 사부가. 날도 추워져서 이곳은 지내기 불편할 텐데.”
“글쎄, 우리를 부른 이유를 들어 보면 알겠지.”
계곡물에 걸레를 빠는 주성하를 잠시 바라보던 그녀는 시선을 들어 어둠 속을 살폈다. 백도현이 어쩌면 이곳에 와 있을지 모른다.
“구사저, 백도현의 의지가 굉장하던데, 이번 싸움 볼만하겠습니다.”
“그에게 싸움을 미루라고 말은 했어?”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알아서 잘 대처하겠지요.”
주성하는 커다란 통에 물기를 짠 걸레를 툭 집어넣으며 계곡 위 등선궁 방향을 쳐다봤다.
등선궁 입구에 고진영과 육기천, 방상이 모여 있었다.
“저 보기 싫은 인간들. 가시죠, 구사저.”
걸레가 든 통을 들고 계곡 위로 올라온 주성하는 자신의 모습이 정말 한심해 보였다. 자신보다 나이도 어린 백도현은 사부와 싸우려 하는데 그는 사형들의 구박을 받으며 청소를 해야 했다.
이게 다 검선문의 막내라는 서열 때문이었다. 무공 실력이 부족하기도 했고.
‘사부가 사라지면 검선문도 사라지겠지?’
등선궁으로 들어간 그는 료쿄와 헤어져 왼편 건물로 향했다. 그곳에 주방이 있었다.
조만간 돌아올 사부를 위해 미리 찻물을 준비해야 한다.
불이 피워진 화로 위에 물을 올리던 그는 주방의 작은 창문을 통해 비호처럼 넘어오는 사내를 발견하고는 흠칫했다.
검을 뽑으려 했으나 어느 틈에 그의 손목은 복면인에 의해 제압당해 있었다. 복면인이 그의 목숨을 노렸다면 꼼짝없이 당할 상황이었다.
가슴이 서늘해진 주성하에게 도현이 말했다.
“놀라지 마시오, 나요.”
“당신이었군.”
주성하는 안도의 숨을 내쉬다가 급히 주방 밖을 살폈다. 다른 사형제들은 보이지 않았다.
“백 형, 대담하시오, 내 집처럼 이곳을 돌아다니고 있다니. 하긴, 사부가 아닌 이상 백 형의 상대는 없겠소만…….”
“태선군이 안 보이는데, 그는 어디 있소?”
“사부는 우리에게 청소를 시키고 나가셨소. 아마 잠시 후면 돌아올 거요.”
제자들을 만나고 벌써 이곳을 떠난 건 아닌가 싶었는데 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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