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 디 임팩트 17권 18화
푸른 검기에 휩싸인 은색 검 두 자루가 등 뒤에서 날아오자 태선군은 장풍을 연속해서 날렸다.
하지만 검들은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그의 장풍을 피하며 그를 계속 노렸다.
‘대단한 놈이구나. 이기어검을 이토록 능숙하게 사용하다니!’
평상시라면 차분히 상대할 수도 있었겠지만 내상과 가슴의 검상이 신경 쓰였다.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라 복면인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허허, 어쩌다 내가 이런 수모를.’
태선군은 연무장 한가운데 서서 손을 움직여 검을 조종하는 도현을 날카롭게 노려보다가 뒤로 재주를 구르며 등선궁 내부로 향했다.
검을 회수한 도현은 그의 뒤를 쫓으며 짧은 순간에 폭풍 같은 장풍 세례를 퍼부었다.
태선군이 들어가려던 등선궁 건물의 지붕이 와르르 무너졌다.
하지만 태선군은 필사적이었다.
콰앙!
몸에 두른 호신강기로 앞을 가리는 장애물을 제거한 그는 등선궁 내부에 있는 도교 삼신의 제단을 지나쳐 절벽 속 동굴로 들어갔다.
‘저자가 왜 저 안으로 들어가지? 저 동굴은 막혔는데.’
등선궁의 구조를 잘 알고 있는 도현으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바람처럼 그를 뒤쫓던 도현은 낮게 신음을 흘렸다.
절벽 속 동굴 한쪽 벽이 옆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놀랍게도 비밀 통로가 존재한 것이다.
“태선군! 등선궁을 버리고 도망가는 가!”
비밀 통로의 계단으로 내려간 도현은 10여 미터 정도 앞에 뛰어가고 있는 태선군을 향해 외쳤다.
“내게 이런 수모를 주다니! 다음엔 반드시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
콰앙!
동굴 천장이 무너지고 있었다.
“태선군!”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태선군을 놓친 도현은 이를 갈며 뒷걸음질을 쳤다.
동굴 천장이 그가 있는 방향을 따라 계속 무너져 내렸다.
쿠쿠쿵쿵. 쿵쿵쿵쿵.
“빌어먹을!”
도현은 어쩔 수 없이 비밀 통로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쿠우우웅.
큰 울림과 함께 비밀 통로는 완전히 붕괴돼 버렸다.
‘이 근방에 출구가 있을 거야.’
도현은 등선궁 주변을 샅샅이 조사하고 있었다. 비밀 통로가 산 아래까지는 연결되지 않았을 것이니, 등선궁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끝이 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아직 포기하긴 일러. 출구를 빨리 찾아낸다면 그를 잡을 수 있어.’
지면을 스치듯 지나며 풀숲이나 기울어진 바위, 심지어 계곡 물속까지 잠수해 출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바라던 비밀 통로의 출구는 발견할 수 없었다.
마음이 답답해진 도현은 범위를 좀 더 넓혀 가던 중 버려진 지 수백 년은 된 것 같은 작은 도관 하나를 발견했다. 폐가와도 같은 그 도관 주변에서 도현은 핏자국을 발견했다.
쾅!
반쯤 열린 문을 부수고 들어간 도현은 그 안에서 지하로 연결된 통로를 발견했다.
비밀 통로의 출구는 예상보다 먼 버려진 이 도관이었다.
도현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도관 주변의 핏자국을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핏자국은 산 아래로 이어지다가 곧 사라졌다. 태선군의 흔적이 끊긴 것이다.
‘아, 시간이 너무 흘렀어!’
도현은 아쉬워하며 발길이 가는 대로 옥룡산 일대를 수색했다. 혹, 부상을 입은 그가 거동이 불편해 산을 아예 내려가지 않고 어딘가에서 은신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날이 새도록 산을 조사한 도현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췄다.
해가 뜨며 산의 찬 기운들이 조금씩 약해졌고, 도처에서 산새들이 울어 댔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도현의 피곤해진 눈가를 지나쳤다.
복면을 벗은 도현은 바위에 걸터앉아 산 아래를 응시했다. 태선군은 아무래도 산을 내려간 것 같았다.
‘등선궁엔 다시는 안 나타날 거야. 내게 패했으니 몸을 사리려 하겠지?’
솔직히 도현은 지극히 높은 검술의 고수인 태선군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도주를 선택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몇 개월 전에 그와 치열한 사투를 벌인 태선군은 적이었지만 싸움에 있어서는 물러나지 않는 철혈의 검객이었다.
천 년을 이어 온 검선문의 문주로서 당당한 위엄을 보였던 그가 자부심을 헌신처럼 버리고 도주하다니.
자기 목숨을 중시하는 건 인간인 이상 당연한 본능이나 태선군은 남다를 줄 알았다. 아니, 적어도 그런 자에게 아버지가 목숨을 잃었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패배가 확실해진 상황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명예를 위해 검을 놓지 않을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옳다 말하는 건 아니지만 아버지의 의지에 맞는 태선군의 기백을 원했다. 우습게도.
가슴에 부상을 입었다 하여 그리 쉽게 포기하고 도망치다니…….
도현은 자신의 평생 적수라 할 수 있는 태선군이 보여 준 행동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검으로 그를 상대하겠다는 마음은 버려야 하나?’
도현은 자신이 강해지도록 자극을 주던 태선군의 허무한 몰락을 보는 것 같아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옥룡산을 내려와 주성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백 형, 살아 있었구려. 난 또 연락이 없어서 걱정을 했지. 사부와의 싸움은 어떻게 됐소?
“그는 등선궁의 비밀 통로를 통해 도주했소.”
-백 형이 이겼단 말이오?
주성하의 놀라는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크게 들려왔다.
“태선군에게선 연락이 없었소? 산을 내려갔다면 제자들에게 연락을 했을 것 같은데.”
-난 연락받은 게 없소. 구사저도 마찬가지고. 어쩌면 고진영에게만 연락을 했을지도 모르오. 그가 현재 대사형의 위치에 있으니 말이오.
“며칠은 더 중국에 머물 테니 태선군과 관련된 정보가 있으면 바로 알려 주시오.”
-알겠소. 한데, 대단하군, 사부가 도망을 치다니. 아마 사부는 분해서 마음의 병을 얻었을지도 모르겠소, 하하하.
사부가 당한 것이 통쾌하다는 듯 주성하는 소리 내어 웃었다. 도현은 잠시 말이 없다가 어제 일을 물었다.
“태선군이 무엇 때문에 당신들을 모이라 한 겁니까?”
-아, 그거 말이오. 몇 가지 약초 때문에 부른 거요.
“약초?”
-그렇소. 나도 실물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약초들인데, 고진영을 도와 무슨 수를 쓰든 구해 오라고 하더이다. 이유는 설명해 주지도 않고 말이오.
주성하가 약초 이름을 말해 주었지만 도현은 처음 들어 보는 것들이었다.
“약초 때문이라도 태선군이 당신들에게 연락을 해 오겠군.”
-그렇긴 하겠지만 하나같이 구하기 어려운 것들이라 시간이 많이 걸릴 거요. 최소 몇 달은 걸릴 것 같은데. 아쉬워, 사부가 어제 최후를 맞았다면 약초를 구하려고 고생을 할 이유가 없는데.
“당신은 뭘 찾기로 했습니까?”
-나와 구사저는 화룡선초를 찾기로 했소. 고진영과 육기천, 방상이 구지선엽초와 천지일란초를 찾기로 했고. 근데 그건 왜 묻는 거요?
“화룡선초를 찾더라도 바로 고진영에게 주지 마시오. 세 가지 약초들이 다 모이면 태선군이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오.
-아하, 그렇군. 사부를 잡을 덫을 놓자는 뜻이로군. 알겠소, 무슨 말인지. 찾게 되면 백 형에게 먼저 연락을 하겠소.
스스로 가슴의 상처를 봉합하고 붕대를 감은 태선군은 무거운 얼굴로 낡은 호텔 방 안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틀 전, 복면인에게 당한 일이 아직도 그에겐 충격으로 남아 있었다.
‘패천공의 힘을 뛰어넘는 내공이라니.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자 같았는데…… 대체 어디서 그런 내공을 얻었을까?’
검선문의 내공심법을 평생 연마해 온 그조차도 내공은 한계가 있었다. 한데 그 복면인의 내공은 측량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5성에 이른 패천공의 힘을 감당할 자를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태선군은 술잔을 들어 입에 댔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를 긴장시키는 강자가 나타난 것이다.
‘대체 누구일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자신에게 원한이 있어 보였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자신을 끈질기게 찾아와 괴롭힐 수가 없었다.
‘나와 그놈 사이에 무슨 악연이 있었던 건가…….’
태선군은 그가 살아온 인생을 술을 마시며 천천히 되짚어 봤다.
여러 일들이 많았다. 무맥의 후예를 죽인 적도 있었고 버스에서 버릇없이 까부는 젊은 것들을 내가수법으로 은밀히 죽인 적도 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벌어진 갈등과 살인을 하나씩 찾아가던 그는 한국에서 벌인 사소한 사건까지 기억했다. 내가수법으로 정신 병원의 울타리에 갇혀 있던 백남식을 죽인 사건이었다.
‘그래…… 그놈 아들 녀석이 나를 찾아왔었지, 아비 복수를 한다며.’
주제도 모르고 겁 없이 찾아온 녀석이었지만 기개가 제법 높고 아주 당찼었다. 죽이려다가 청선 때문에 살려 뒀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차가운 눈빛으로 도현을 떠올린 태선군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 녀석은 아니야.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발가락의 때만도 못한 하찮은 녀석이 어떻게 고수가 되어 돌아왔겠는가. 복면인이 수개월 만에 패천공을 상대할 만큼 강해져서 돌아온 것보다 더욱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알 수 없군, 도무지 알 수 없어. 그자는 누구인가?”
얼굴에 주름을 깊이 만들며 술잔을 비운 그는 고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희들이 떠났던 밤, 일전에 나타난 복면인이 나를 암습했다. 너희 사형제들이 의심스럽구나.”
-사, 사부님, 저희는 모르는 일입니다.
“하면 그놈이 어떻게 알고 내가 등선궁을 찾아온 날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냐?”
-억울합니다, 사부님!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사부님이 그런 일을 당하셨다는 것도 지금 전화를 받고서야 알게 됐습니다.
“너희들은 한번 나를 배신한 전력이 있지 않느냐?”
태선군의 차가운 말투에 고진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믿어 주십시오, 사부님. 정말 저희는 아닙니다. 원하시면 제 팔이라도 잘라서 갖다 바칠 수 있습니다.
팔이라도 잘라 바치겠다는 고진영의 극단적인 말에 태선군의 눈빛이 조금 풀렸다.
복면인이 나타난 건 우연일 수도 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제자들의 배신을 두 번이나 경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버리면 몰라도 너희들은 그럴 수 없다.’
태선군은 빈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좋다, 네 말을 믿기로 하지.”
-감사합니다, 사부님.
“사람을 보내 등선궁을 불태워라.”
-예? 등선궁을 말입니까?
“그곳은 날 노리는 자에게 너무 노출된 곳이다. 건물도 많이 부서졌고. 내가 더 이상 갈 일이 없으니, 그곳이 존재할 이유가 없겠지.”
수백 년간 검선문 사람들이 머문 등선궁을 태선군은 아무렇지도 않게 파괴하려고 했다.
-알겠습니다. 즉시 불태우겠습니다.
“내가 찾으라는 약초들을 최대한 빨리 구해 놓아라. 그것으로 네 충성심을 평가할 테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시 연락하겠다.”
전화를 끊은 태선군은 옷을 걸쳐 입고 호텔을 나섰다.
‘선천지기가 더 필요해.’
패천공의 경지가 더 높아진다면 복면인에게 당한 수모를 되갚아 줄 수 있다.
그의 눈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도현은 상해의 한 호텔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가기엔 아쉬움도 남았고, 주성하가 태선군이 어디 있는지 정보를 구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검술은 정말 대단했어.’
도현은 태선군이 펼쳤던 이연백의 천검술에 며칠째 빠져 있었다.
찰나의 깨달음이 없었다면 하늘에서 합벽진을 만들며 떨어지던 수많은 검들에 갇혀 큰 낭패를 당할 뻔했다. 태선군이 그동안 보여 줬던 그 어떤 검술보다 수준이 높았다.
‘섣불리 대항하지 않고 오히려 그 검술에 동화된 게 도움이 됐어. 그 끝에 작은 깨달음을 얻기까지 했으니 말이야.’
도현은 손에 검이 들린 것처럼 허공에 이리저리 팔을 휘둘렀다.
‘검을 발전시키는 데 굳이 호검술만 고집할 이유는 없지. 적의 검술이 뛰어나면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필요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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