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디 임팩트 17권 19화
발전을 위해선 여러 가지를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 끝에 진정한 자기만의 검이 탄생하는 것이다.
호검술의 오의를 이미 다 터득하고 스스로 후반식을 창안하고 있는 그는 이러한 과정이 결코 부끄럽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호검술 하나만 고집했겠지만 호검술을 초월해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도현은 오히려 이러한 과정이 즐겁기까지 했다.
‘사부가 없으니 태선군의 검이라도 배울 수밖에. 그는 나에게 빚이 있지 않은가?’
그리 넓지 않은 객실을 휙휙 날아다니며 팔을 휘젓던 도현은 침대를 향해 빈손을 뻗었다.
수백 개의 손 그림자가 침대를 덮쳤고, 잠시 후 침대는 완전히 박살이 나고 말았다.
“이런!”
흥에 겨워 태선군의 천검술을 흉내 냈던 도현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누군가 객실 문을 두드렸다.
“아니, 침대가 왜 저렇게 됐소?”
선글라스를 벗으며 들어온 주성하는 망가진 침대를 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소.”
도현은 헛기침을 하며 의자를 권했다.
자리에 앉은 주성하는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는 도현의 몸을 뒤에서 재빨리 훑었다.
‘멀쩡하군. 사부가 압도적으로 밀렸다는 건가?’
자세한 싸움 얘기는 못 들었기 때문에 주성하는 도현의 몸 상태로 그날의 싸움을 추측하고 있었다.
“백 형, 왜 이런 좁은 호텔에서 지내는 거요? 내가 알려 준 호텔에 가면 화려한 스위트룸에서 편히 지낼 수 있다니까.”
며칠 전 주성하는 도현이 상해로 간다고 하기에 그가 아는 호텔에 머물라고 했지만 도현은 고집스럽게 평범한 호텔에서 지내고 있었다.
“백 형, 우리 같은 무인들은 일반인과 다른 사람입니다. 강한 만큼 누리고 살아야 하지 않겠소?”
“각자 편한 대로 사는 법이니 내게 이래라저래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도현이 자리에 앉으며 손에 든 음료수를 주성하 앞에 내려놨다.
주성하는 웬만해선 싸구려 음식이나 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다. 낡은 호텔의 이 음료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도현이 건네주는 음료수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가 두려워하는 태선군을 이긴 남자였으니까.
‘괴물 같은 놈, 정말 사부를 이겨 버리다니.’
복숭아 주스가 든 병을 들어 몇 모금 마신 주성하는 맞은편에 앉은 도현에게 말했다.
“고진영이 부하들을 시켜 등선궁을 불태웠소. 사부의 지시를 받고 말이오. 아마 당신에게 당한 게 화가 나 사부가 그리 시킨 것 같소.”
“고진영은 태선군이 어디 있는지 압니까?”
도현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제 그와 만났는데,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소.”
“음.”
“사부는 한동안 안 나타날 것 같으니까, 백 형도 그만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소. 여기 있어 봤자 시간만 낭비하는 꼴이니.”
주성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물을 빠져나간 고기를 다시 잡으려면 그물을 수선하고 다시 때를 기다려야 한다.
“약초가 무슨 용도인지 조사해 봤습니까?”
도현은 태선군이 왜 귀한 약초들을 구하는지 궁금했다.
“이리저리 알아보고는 있지만 아직 답이 나오지 않았소. 이럴 땐 파문당한 대사형에게 물어봐야 하는데.”
“청선 말입니까?”
“그렇소. 무공은 약하나 파문당한 대사형은 약을 제조하는 연단술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소. 옛날 검선문에는 약당이라는 게 있었다는데, 대사형은 무공을 익히지 않고 그쪽으로 갔어야 할 사람이오.”
남은 음료수를 비운 주성하는 말을 이었다.
“아마 그라면 사부가 왜 그런 약초를 구해 오라 했는지 대번에 알았을 것이오. 하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니 대사형 얘기는 하나 마나지.”
도현은 무인보다는 술 좋아하는 도인에 가까웠던 청선을 떠올렸다.
‘청선은 정말 어떻게 됐을까?’
그의 생사가 궁금해도 어떻게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비가 쏟아지던 그날 밤, 그는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백 형이 얘기한 대로 약초를 받으러 올 사부를 노려 봅시다. 그때엔 사부도 어떤 식으로든 우리 앞에 나타날 테니 말이오.”
“아무래도 그래야겠군요.”
“그런데 걱정이오. 화룡선초를 나와 구사저가 구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소. 고진영은 못 구하면 사부의 손에 다 죽은 목숨이라며 길길이 날뛰고 있고. 뭐 어떻게든 되겠지.”
주성하는 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초를 구하는 데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까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 주시오. 백 형, 그럼 또 봅시다.”
밖으로 나가려던 주성하는 몸을 반쯤 틀어서 침대를 가리켰다.
“아니, 근데 여기서 오늘 밤도 지낼 거요? 침대가 저리 됐는데? 내가 좋은 호텔로 예약해 줄 테니 그리 가시는 게 어떻소?”
“내일 한국으로 갈 겁니다. 하루 정도 더 지내기 불편하지는 않을 것 같군요.”
“호의를 자꾸 무시하면 내가 섭섭합니다. 백 형을 위해서 나름 열심히 뛰고 있는데, 왜 자꾸 거리를 두려 하시오?”
선글라스를 낀 주성하는 코를 한번 찡그리며 객실을 나가려 했다.
“잠깐.”
도현은 객실 문 앞에 서 있는 주성하에게 다가갔다.
“같이 저녁이나 먹읍시다. 저녁은 내가 사고, 잠은 그쪽에서 제공한 호텔에서 묵는 걸로 합시다.”
도현의 말에 주성하가 미소를 지었다.
“좋은 생각이오.”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한 도현은 그를 픽업하기 위해 기다린 용주와 입국장에서 만났다.
“나오지 말라니까 왜 나왔어.”
“자식아, 태선군을 이겼는데 꽃가마라도 대령해야지. 자, 받아.”
용주는 등 뒤에 감춰 둔 꽃다발을 내밀었다. 도현은 어색한 얼굴로 꽃다발을 받았다.
“뭐 하는 거야, 창피하게.”
“뭐가 창피해, 인마! 비록 태선군을 놓치긴 했지만 실력으로 그 자식을 누른 뜻깊은 일을 기념하는 건데. 하늘 위에서 보고 계시는 백 관장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냐?”
말을 하는 용주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시발, 태선군 새끼가 네 검을 맞고 도망갔다는 말을 듣고 내가 그날 밤에 잠을 못 잤어. 시발, 기뻐서.”
도현은 감정이 북받친 용주의 어깨를 따뜻하게 두드려 줬다.
“그만해, 사람들 다 듣는다. 차로 가자.”
“내 목소리가 좀 컸나?”
“많이.”
“들으라고 해, 우리가 뭔 말 하는지 어떻게 알겠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낸 용주는 도현을 데리고 공항 주차장으로 향했다.
“왔어요, 도현 씨?”
차 옆에서 기다리던 홍영이 도현을 반겨 줬다. 용주만이 아니라 홍영까지 공항에서 그를 기다린 것이다.
“도장에서 기다려도 되는데…….”
“어서 타요.”
홍영은 웃으며 도현을 차 안에 밀어 넣었다.
그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서울로 향했다.
“도현 씨, 고생했어요. 이계를 오가며 노력한 일들이 헛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날 전화받고 정말 기뻤어요.”
“미안해요, 홍영 씨.”
“뭐가요?”
뒷좌석에 홍영과 나란히 앉아 있던 도현은 차창 밖을 보며 말했다.
“태선군을 잡을 수 있는 상황에서 놓친 것 같아서요. 홍영 씨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의 복수, 완벽히 끝낼 수 있었는데…….”
“반은 성공했잖아요. 그거면 됐죠.”
홍영은 도현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맑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반은 조금 뒤로 미뤄 뒀다고 생각해요, 우리.”
홍영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던 도현은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홍영이 없었다면 오로지 태선군을 향한 복수를 위해 날뛰는 삶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고마워요.”
“나도, 고마워요.”
운전을 하며 백미러로 둘의 모습을 힐끔거리던 용주는 음악을 틀며 휘파람을 불었다.
몇 분 뒤 용주가 말했다.
“도현아,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주성하와 그 사형제들이 약초를 구하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 같다면서.”
홍영과 용주도 약초와 관련된 이야기를 전화로 들은 상태였다. 몸을 숨긴 태선군은 약초 때문에라도 제자들 앞에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계에 먼저 다녀올까 싶어. 시간은 충분한 것 같으니까.”
이계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8개월에서 9개월 정도 된다. 그 시간을 다 써도 지구에선 2개월이 조금 넘는다.
주성하는 약초를 찾는 데 수개월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예상했고, 설령 더 빨리 찾는다 해도 그는 도현과 연락이 닿기 전까지는 화룡선초를 못 찾은 것으로 하기로 했다.
이계를 다녀오는 데 지장이 없는 상황이다.
“그래, 가려면 얼른 다녀와야지. 사실 삼촌이 너 언제 이계 가냐고 자꾸 전화해서 피곤해 죽겠다.”
“조 박사님이?”
“어, 알잖아, 왜인지.”
초고대 문명이 기계와 마법의 문명이라는 걸 확인하는 데 도현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도현 씨, 정말 조 박사님 말씀처럼 그 스톤을 마법사가 만들었을까요?”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내가 이계로 가 봐야겠어요.”
“피이, 핑계 대지 말아요. 이계에 가고 싶어서 전부터 내 눈치를 봤으면서.”
홍영의 말에 도현은 속으로 뜨끔했다. 이번에 중국에 다녀오질 않았다면 지금 이계에 있었을 것이다.
“난 지구가 좋아요.”
며칠 뒤 도현은 이계를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가죽 갑옷에 장화 같은 신발 그리고 세타이움 장검까지.
도현은 황금빛 타투를 이용해 차원 이동 게이트를 열기 전 주위를 둘러봤다.
용주와 홍영 그리고 조 박사가 서 있었다.
오웬 브라운이 남긴 책을 연구하던 조 박사는 도현이 이계에 간다는 말을 듣고 가평에서 아침 일찍 찾아왔다.
“이계의 마법사가 스톤을 제작할 수 있는지 꼭 확인해 보게. 알았지?”
초고대 문명이 기계와 마법이 공존하는 문명이라는 가설을 세운 조 박사는 이계의 마법사를 통해 그 가설을 확인받고 싶었다.
“삼촌, 그만 좀 하세요. 도대체 아까부터 몇 번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도현이 귀 아프겠어요.”
“도현이는 가만있는데 네가 왜 나서? 버릇없이.”
“무슨 말만 하면 버릇없대.”
“뭐야?”
조 박사에게 뒤통수를 맞은 용주는 앞으로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엄살을 부리는 용주를 보며 도현이 말했다.
“박사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스톤의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 에너지를 모으는 마법진인지 확인해 볼 테니까요.”
스톤의 문양은 따로 그려 갈 필요가 없었다. 그의 팔에 생긴 타투가 스톤의 문양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고맙네.”
조 박사는 어제 잠을 자지 않아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도현아, 조심해서 다녀와라. 금화 또 많이 챙겨 오고. 영주 딘에게 내 안부도 전하고.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말이야, 흐흐흐.”
용주의 농담에 도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홍영이 따뜻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녀올게요, 홍영 씨.”
홍영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도현이 얼음탑주까지 없앨 정도로 강해졌기 때문에 전보다 걱정은 덜 됐다.
“잘 다녀와요.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는 거 잊지 말고요.”
“그럴게요.”
어느덧 이계로 가며 나누는 작별 인사가 익숙해졌다. 전보다는 조금 자연스러워졌고 희망이 넘쳤다.
인력 사무소로 출근하기 전 도장에 아침 일찍 들른 장철호도 무심한 어투로 ‘적당히 하고 돌아와라.’라는 말을 남길 정도였다.
도현은 타투를 이용해 차원 이동 게이트를 열었다.
지이이잉.
타원형의 붉은 빛의 무리는 오직 그의 눈에만 보인다.
“다녀오겠습니다.”
조 박사와 용주, 홍영과 시선을 교환한 그는 게이트를 통해 이계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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