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 디 임팩트 17권 20화
#미완성 마법진
로나의 완치를 축하하며 마신 축하주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갈색 술통의 술은 수십 명의 사내들이 달라붙어 실컷 마셔도 될 정도로 많은 양이었는데, 그걸 도현을 포함한 여덟 명이 다 마셨으니 마신 사람들이 어떻게 됐을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해가 높이 뜬 낮이 되도록 그들은 술에 취해 계속 잠을 자고 있었다. 입고 있던 가죽 갑옷을 풀어 헤치고 배를 긁적이던 짐브리오는 목이 말랐는지 두 눈을 떴다.
“뭐야 이거?”
냄새 나는 작은 발 하나가 그의 얼굴을 짓누르고 있었다. 유독 발을 잘 안 씻는 리타의 발이었다.
“에이, 더럽게.”
리타의 발을 옆으로 밀어낸 그는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통나무집 안을 둘러봤다.
밤새워 마신 술자리의 흔적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고, 그 주위로 사람들이 시체처럼 누워 꼼짝도 않고 잠을 자고 있었다.
“많이 마시긴 많이 마셨군. 이럴 때 급습을 받았다면 다 죽었겠네.”
혼잣말을 하던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가만있어 봐, 한 사람이 비는 것 같은데? 하나, 둘, 셋…… 나까지 일곱 명.”
아직 술이 덜 깬 그는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누가 없는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도현이가 없군. 오줌 누러 갔나?”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다 인상을 구겼다. 리타가 갑자기 그의 다리에 토악질을 한 것이다.
“우엑! 우우우욱엑!”
시큼한 냄새가 방 안에 진동을 했다. 짐브리오는 술이 번쩍 깼다.
“이거 안 놔? 저리 떨어져!”
“지, 짐브리오, 속…… 아파, 우엑!”
어른이지만 소녀의 모습을 한 리타는 짐브리오의 다리에 계속해서 토했다.
짐브리오는 기겁을 하며 매미처럼 그의 다리에 달라붙은 그녀를 떼어 놓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녀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 소동에 방 안의 사람들이 하나둘 깨기 시작했다.
“안 떨어지면 때린다!”
“때리면 마법 쓸 거야, 우엑!”
“돌아 버리겠네! 으이그, 정말!”
짐브리오는 통나무집 근처에 있는 계곡물에 그녀를 빠트리기 위해 문을 열고 나갔다.
“네가 물에 빠지고도 안 떨어지나 보자.”
씩씩거리며 나오던 짐브리오는 커다란 솥 옆에 서 있는 도현을 발견했다. 도현은 국자로 솥 안을 휘휘 젓고 있었다.
“어, 뭐 하는 거냐?”
“수프를 만들고 있습니다. 술 먹은 다음 날 먹으면 맛이 괜찮거든요.”
이계에 넘어온 도현은 술을 많이 마신 동료들을 위해 해장국을 만드는 중이었다. 재료는 달라도 비슷한 맛을 내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도현이 요리하는 모습을 거의 본 적 없는 짐브리오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솥 안을 들여다봤다.
고기와 야채가 어우러진 붉은 빛깔이 나는 수프가 팔팔 끓고 있었다.
매콤한 냄새가 은근히 침을 고이게 만들었다. 짐브리오의 다리에서 떨어진 리타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해장국을 봤다.
“한번 맛봐도 돼?”
향신료의 대가인 그녀는 도현이 끓인 수프가 맛이 있을지 궁금했다. 맛이 없으면 그녀가 손을 좀 봐 주려 했다.
“그럼.”
도현은 그릇에 해장국을 조금 담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짐브리오가 선수를 쳐 그릇을 중간에 가로챘다.
“뭐야!”
리타가 노려보자 짐브리오는 한쪽 다리를 내밀었다.
“뭐냐니, 이 꼴을 만들어 놓고 넌 태연히 수프를 맛보려고? 양심이 있어야지. 가서 입이나 헹구고 와. 그 입으로 맛 평가를 어떻게 하려고.”
“치이. 도현, 기다려 얼른 올게.”
리타는 입이 나온 얼굴로 계곡으로 뛰어갔다. 입도 헹구고 세수도 할 생각이었다.
“도현이 끓인 수프를 내가 제일 먼저 맛보게 되겠군.”
큰 특권을 차지한 사람처럼 승리의 미소를 지은 짐브리오는 스푼으로 뜨거운 해장국을 떠서 입에 넣었다.
맛을 음미하던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오, 이거 맛있는데?”
그는 서둘러 몇 번 더 떠먹어 봤다.
입에 짝 달라붙는 매콤한 수프가 술로 메슥거리던 그의 속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괜찮습니까?”
지켜보던 도현이 물었다.
“네 말대로 술 먹은 다음 날엔 이걸 끓여 먹어야겠는데. 아니, 뭘 넣고 끓인 거야? 기가 막히다.”
“그렇게 훌륭한가?”
언제 나왔는지 짐브리오 뒤에는 숙취로 괴로워하는 어베인과 딘, 리드만, 로나, 톨리핀이 서 있었다.
“일단 먹어 보시오, 영주. 말로 표현하기 힘드니까.”
“잠시만요.”
도현은 솥의 뚜껑을 닫았다.
“조금 더 끓여야 합니다. 다 되면 제가 그때 말씀드리죠.”
“지금 먹으면 안 되나?”
영주 딘이 입맛을 다셨지만 도현은 냉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됩니다. 모두 씻고 오십시오. 그사이에 수프가 완성될 테니까요.”
“야박한 요리사군. 리드만, 가세나.”
딘과 리드만이 계곡 쪽으로 걸어가자 뒤에 남은 어베인이 넌지시 말했다.
“난 덜 익은 고기도 잘 먹는 사람이네. 수프 정도야…….”
“씻고 오십시오.”
“……그러지.”
지켜보던 로나가 웃으며 말했다.
“요리사의 위세가 대단하네요?”
“제일 맛있을 때 대접을 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러니 어쩔 수 없죠.”
도현은 국자를 들고 턱을 꼿꼿이 세웠다.
술에 취해 잠을 자던 그들은 도현이 해장국의 재료를 구하기 위해 브링틱 성까지 다녀온 줄은 모를 것이다. 큰마음 먹고 시간을 들여 준비한 해장국이었으니 도현이 이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음식 하느라 힘들지 않았어요? 다들 술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수프까지 끓여 놓고.”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기분 좋게 했으니까.”
도현의 미소에 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씻고 와야겠어요. 몸에서 술 냄새가…….”
로나가 사라지자 마지막 남은 사람은 이 집의 주인 톨리핀이었다.
그는 무게를 잡으며 헛기침을 했다.
“나도 안 되겠지?”
“네, 씻고 오십시오.”
“그럴 줄 알았네.”
톨리핀은 비틀거리며 계곡가로 향했다. 술이 센 그도 어젯밤은 과음을 했다.
통나무집 앞 공터에 홀로 남은 도현은 솥뚜껑을 열어 국자로 맛을 봤다.
“조미료만 더 넣으면 딱인데, 그게 없네.”
맛도 좋고 해장국 맛이 나긴 했지만 뭔가 2프로 부족했다. 고민하는 그의 앞에 제일 먼저 씻고 달려온 리타가 나타났다.
“왜? 내가 도와줘?”
“뭔가 조금 더 강렬하게 매우면서도 확 끌어당기는 깊은 맛이 있었으면 좋겠어. 좀 어렵지?”
도현은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그런 맛이라면.”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마법 주머니 안에서 매운맛 버섯 가루와 단맛이 나는 풀잎 가루를 꺼냈다.
“이 두 향신료를 적당히 넣어서 맛을 맞춰 봐. 도현이 원하는 맛을 내가 알 수는 없으니까.”
도현은 리타만이 사용하는 고유의 향신료 가루를 조금씩 뿌리며 맛을 맞춰 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버지가 해 주시던 해장국 맛이 딱 나왔다.
“이 맛이야!”
기쁜 표정을 지은 도현은 리타에게 맛을 보게 했다.
“와아, 세상에 이런 맛도 존재하는구나! 매우면서도 속이 이상하게 뻥 뚫리는 맛이네?”
“고마워, 리타.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원하던 수프 맛을 정확하게 낼 수가 없었을 거야.”
“아니, 근데 이 수프는 어디서 먹어 본 거야?”
리타의 물음에 도현은 말을 얼버무렸다.
“글쎄, 잘 기억이 안 나네. 아무튼 그 맛을 재현하려고 노력한 거야.”
“수상해. 분명 내게 속이는 게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팔짱을 낀 리타는 새침하게 도현을 흘겨보다 목소리를 낮췄다.
“이 수프 레시피 알려 줄 거지?”
“식사 준비하는 거 도와주면.”
“뭐 그 정도야.”
잠시 후 말끔해진 얼굴로 나타난 사람들은 공터에 모여 도현이 만든 해장국을 먹기 시작했다.
“대단해. 술을 마셔서 이런 맛이 나는 건가, 아니면 원래 이런 맛인가? 최고의 수프야.”
영주 딘은 해장국을 세 그릇이나 비우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모두들 같은 심정이었다.
“혹시 다른 요리도 잘하는 거 아니야?”
수프 안의 고기를 쩝쩝 씹으며 짐브리오가 도현을 쳐다봤다.
“그럴 리가요.”
도현은 손사래를 치며 오늘 한 요리가 마지막 요리라고 강조했다.
‘이계에서 해장국을 끓일 줄이야.’
모두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도현은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도현이 준비한 해장국으로 숙취를 어느 정도 해소한 일행은 어제 마신 술로 난장판이 된 집 안을 정리했다.
“이걸 마시면 두통이 좀 가실 거요.”
집 안을 정리하고 둥글게 모여 앉은 그들에게 톨리핀이 약초를 탄 뜨거운 물을 한 잔씩 돌렸다.
“효과 좋네, 벌써 머리 어지럼증이 사라지는데! 고맙습니다, 톨리핀.”
뜨거운 물을 후후 입으로 불어 조금씩 마시던 짐브리오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난 다듬을 약초가 있어서……. 편하게들 얘기 나누시오.”
톨리핀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딘이 입을 뗐다.
“도현, 어베인에게 들었네. 새로운 영지를 찾는 나를 돕겠다고 했다면서.”
“네, 맞습니다.”
도현은 약초를 탄 물을 조금 마시며 대답했다.
“솔직히 자네가 도와줬으면 하는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네. 하지만 자네가 그 일에 함께하지 않는다 해도 난 전혀 서운하지 않아.”
“알고 있습니다, 충분히 그럴 분이시라는 걸요.”
“내가 파악한 자네는 의리가 있는 사람이야. 그것도 그냥 의리가 아니라 핏속에 꽉 찬 의리. 다시 말하면 그 의리 때문에 자신의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지.”
딘은 양 갈래로 기른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부담 갖지 말고 말해 주게. 의리 때문에 원치 않는 일을 할 필요는 없네. 정말 나를 돕고 싶은 건가?”
잠시 말이 없던 도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기억하십니까? 폭주를 해서 숲에 쓰러져 있는 저를 구해 주신 일 말입니다.”
“잊을 수가 없지.”
“그때 제가 죽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겠죠.”
“서로 목숨을 구해 주는 일이야 살다 보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지. 그것 때문에 평생 끌려다닐 필요는 없어.”
“끌려다니는 게 아닙니다. 제가 지금 그럴 힘이 있고, 여력이 되니까 돕는다는 것이죠. 상황이 안 됐으면 저도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었을 겁니다.”
담담한 도현의 말에 딘은 무거운 분위기를 떨쳐 내듯 헛기침을 몇 번 크게 했다.
“고맙네. 그럼 함께해 보세.”
“영주님, 나도 도와줄게요.”
도현과 계속 같이 다니고 싶어 하는 리타가 용감한 얼굴로 말했다.
“자네도 함께해 주면 나야 고맙지. 무서운 흑마법으로 커딜이나 이안의 병사들을 놀라게 해 주자고.”
“재밌겠네요, 헤헤.”
리타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니, 그런데 두 녀석 중 어느 놈을 끌어내리지? 둘 다 똑같이 재수 없는 작자들인데.”
짐브리오는 마치 마음만 먹으면 두 영지 중 한 곳을 차지할 수 있는 것처럼 말했다. 도현이 돕기로 해서 든든한 모양이었다.
“그건 그쪽에 가서 결정짓는 게 좋을 것 같군. 커딜과 이안의 영지 사정에 따라 우리가 취할 행동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어베인은 말을 하며 딘을 응시했다. 딘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다.
예상과 달리 그들의 지배력이 영지 전체에 끈끈하게 미치고 주민들이 새로운 영주를 반기지 않는다면, 그쪽은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딘은 환영받지 않는 새 영주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럴 거였으면 영지전에 패해 빼앗긴 남부 대륙에 위치한 원래 그의 영지를 되찾을 생각을 먼저 했을 것이다.
그가 그곳을 단념한 이유는 더 이상 그곳의 영지민들이 그를 기억하거나 그를 원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변화를 기다리는 곳. 그런 곳이 필요해.’
이것이 새 영지를 찾는 딘의 기준점이었다.
“커딜과 이안의 영지에는 언제 갈 거예요?”
리타는 브링틱을 떠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여행하는 것이 기대됐는지 약간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거의 평생을 알레빙스 산맥에서 지냈던 그녀는 더 많은 세상을 접하고 싶었다.
“며칠 더 휴식을 취한 후 떠나야겠지, 그동안 강행군을 했으니까. 로나도 조금 더 몸을 추스르고.”
씨드 때문에 몇 개월을 긴장하며 생활했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의 휴식은 필요했다.
“근데 대장, 휴식을 취한 후에도 바로 떠나서는 안 됩니다.”
짐브리오는 묵직한 저음으로 말하며 로나의 손을 응시했다. 손가락 하나가 없어 조금은 흉한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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