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 디 임팩트 17권 21화
“카샨, 그 자식을 먼저 손봐야지.”
“맞아,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 대장과 로나를 고문하고 손까지 저렇게 만들었잖아.”
리타가 짐브리오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녀의 흑마법을 빼앗기 위해 카샨은 그들을 고문하고 괴롭혔다. 이제 그 모든 것들을 되돌려줘야 한다.
조용히 듣고 있던 도현이 나섰다.
“카샨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를 만나려고 마음먹고 있었으니까요.”
얼음탑주도 도현의 상대가 안 됐다. 하물며 그의 제자인 카샨은 더더욱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아직 그는 북쪽 미개척 지역을 통과하고 있을 겁니다. 제가 가서 조용히 처리하죠.”
망각의 숲에서 가문의 병력과 일꾼용 몬스터들을 이끌고 오느라 카샨의 움직임은 그리 빠르지 않았다. 어베인 일행이 톨리핀의 집까지 잠을 줄이며 달려온 것과는 대조적인 행보였다.
“나도 같이 가. 내 마법으로 카샨을 납작하게 만들어 주고 싶어.”
“피곤하지 않아? 난 오늘 출발할 건데?”
도현은 술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리타에게 쉴 것을 권했다. 하지만 그녀는 세차게 고갯짓을 했다.
“아니, 괜찮아. 내가 대장과 로나 대신 복수를 할 거야. 그러니 나도 가야지.”
그녀의 마음은 확고했다. 결국 도현은 그녀와 함께 카샨을 잡으러 가기로 했다.
브링틱으로 복귀하는 카샨의 마음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스승인 얼음탑주는 죽고 그는 빈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용병 녀석이 씨드를 차지하다니.’
생각지 못한 전개에 그는 어처구니가 없어 드비오가 소식을 전해 온 지 며칠이 지나도록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최소한 율리비어스나 세티앙, 루시앙 형제가 씨드를 차지했다면 덜 배가 아프고 근심도 적었을 것이다.
‘최악이야.’
씨드를 차지한 용병은 얼음탑과 사이가 안 좋았다. 탑주가 그를 죽이려 했고, 그는 그에 대한 앙갚음을 하듯 씨드를 가로챈 뒤 보란 듯이 탑주를 죽여 버렸다.
미지근한 술을 얼음 마법으로 차갑게 만든 그는 굳은 눈빛으로 술을 연속해 마셨다.
“느려, 너무 느려.”
카샨의 천막에 찾아온 드비오는 무엇이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느리다는 말을 반복하며 카샨의 맞은편에 앉았다.
“밤을 새워서라도 브링틱으로 빨리 돌아가야 할 때, 이렇게 꿈지럭거리면 되나? 병사들이 힘들어하더라도 서둘러야지.”
“그만하십시오, 드비오. 병사들과 몬스터들은 내 재산이 아니라 아버지의 것이오. 빌렸으니 온전히 돌려줘야지.”
“내가 몇 번을 말해야 하나?”
드비오는 답답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 용병을 만나면 자네나 나나 죽은 목숨이라니까. 탑주도 죽인 녀석이 우리라고 살려 둘 것 같나?”
“…….”
“일단 몸을 피해 얼음탑으로 서둘러 돌아가는 게 중요해. 그러니 지금이라도 야영을 거두고 브링틱으로 움직이라 명하게.”
“병사들 태반이 괴질에 걸려 힘들어하고 있는데 어떻게 재촉하란 말이오?”
며칠 전 꽃가루가 그들을 덮쳤다. 그 이후 병력의 반 정도가 구토와 설사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 목숨이 더 중요하지 않나?”
“그만하십시오, 드비오.”
“이보게.”
“그만하라고 했잖소!”
술잔을 박살 내며 일어선 카샨은 차가운 눈빛으로 드비오를 노려봤다.
“그 용병 녀석 얘긴 내 앞에서 그만하란 말이오. 내가 그놈이 무서워 도망까지 쳐야겠소?”
말없이 캬산의 시선을 받아 내던 드비오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난 살아오면서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네. 대부분 싸우며 겪은 위기였지. 세상은 넓어서 이름도 안 알려진 강자들이 의외로 많더군. 그런 자들과 부딪쳤을 때 내가 얼음탑 마법사라는 자부심으로 그들과 끝까지 싸웠을 것 같은가?”
드비오는 입가를 비틀며 차갑게 웃었다.
“천만에, 난 그냥 도망쳤어. 알량한 자존심 따위로는 내 목을 지킬 수 없으니까.”
그는 카샨에게 몸을 기울이며 말을 계속했다.
“자네는 탑주가 될 생각이 없는 건가? 왜 멍청하게 이러고 있나? 어차피 씨드는 그놈이 차지했고, 남은 건 새로운 미래뿐이야. 그걸 생각해야지.”
한동안 카샨을 응시하던 그는 몸을 돌려 천막을 나가려 했다.
“드비오.”
카샨의 부름에 드비오가 돌아봤다.
“그 용병이 나를 노렸다면 벌써 찾아왔지 않았겠소? 망각의 숲에서 떠나온 지가 며칠째인데.”
“그건 장담할 수 없지, 씨드의 힘을 다스리려 시간을 보냈을 수도 있으니까. 카샨, 냉정히 판단을 내리게. 우리 둘 모두 탑주의 일과 상관없이 그자와 악연을 맺고 있네.”
드비오가 말한 악연은 리타와 로나, 어베인을 감옥에 가둬 둔 일을 말하는 것이다. 카샨은 그들을 고문하고 리타의 흑마법을 빼앗으려 했다.
“사람은 원한을 쉽게 잊지 않는 법이야. 더구나 강해졌을 때는 더욱더. 그자는 분명 나와 자네를 노리고 찾아올 거야.”
“아, 졸려.”
길게 하품을 한 리타는 피곤한 얼굴로 모닥불 옆에 드러누웠다. 벌레들이 싫어하는 향나무가 모닥불에서 타고 있기 때문에 벌레들은 근처로 기어 오다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게 왜 따라왔어, 그냥 쉬지.”
도현이 모닥불에 작은 나뭇조각을 넣으며 말했다.
“카샨이 내 마법을 알아내려고 로나 손을 저렇게 만들었잖아. 나도 어떤 식으로든 카샨을 혼내 주고 싶어.”
모닥불 옆에 누운 리타는 숲 위에 뜬 별들을 올려다봤다. 별들이 반짝거리는 게 정말 아름다웠다.
“도현, 일곱 신의 세계는 저 별처럼 아름답겠지?”
“아마도.”
도현도 팔베개를 하고 별을 올려다봤다.
“어둠의 전사와 마왕이 사는 곳은 어두운 별이라는데, 어떻게 별이 어두울 수 있지? 별은 밝은 모습인데.”
“흑마법으로 소환되는 그들이 어두운 별에 사는 존재들이야?”
“응, 붉은 흑마법서에 그렇게 쓰여 있었어.”
“그들도 별에 사는구나…….”
마법이 만드는 신비로운 현상을 논리적으로 따지고 드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별 타령은 그만하고 마법 공부를 해.
“뭐라고 하셨어요, 스승님?”
호주머니를 뒤적인 그녀는 누운 상태에서 자수정을 꺼냈다. 커다란 락제프의 눈이 자수정에서 깜빡거리고 있었다.
-로나도 치료됐으니 이제 날 소멸시켜 줘야 하는 게 아니냐?
“알았어요. 공부 열심히 할게요.”
-대답에 성의가 없구나.
“스승님, 그렇게 저랑 헤어지고 싶으세요? 우린 정도 들었잖아요.”
-정? 그게 무슨 단어냐? 난 정이란 말을 모르겠다.
냉랭한 그의 말투에 리타는 입술을 내밀며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너무하세요.”
-뭘 너무해!
락제프가 호통을 쳤다.
“왜 소리를 지르세요? 저도 나이 많거든요!”
-그래, 나이 많아서 참 좋겠다, 이 녀석아. 아무튼 흑마법만 파고들지 말고 내가 말해 준 소멸 마법을 얼른 완성시킬 생각을 해.
“싫어요, 안 해요, 못하겠다고요!”
삐진 얼굴로 반항하는 리타의 모습에 자수정에 맺힌 락제프의 눈동자가 분노로 흔들렸다.
-오냐오냐했더니, 네가 감히.
“몰라요, 안 들려요, 안 들려.”
리타가 귀를 막는 시늉을 하자 락제프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가지없는 제자라고 나무랐다.
“전 정말 착한 제자거든요. 못된 제자였으면 스승님과 오래 있고 싶어 하지 않았겠죠.”
-내게 진짜 착한 제자는 날 하루빨리 소멸시켜 주는 녀석이다.
“치이, 끝까지 그러시네. 알았어요, 최대한 노력해서 소멸시켜 드릴게요.”
리타는 자수정을 땅바닥에 내려놓고는 몸을 돌려 자는 시늉을 했다.
-저 녀석이 정말. 네가 수천 년간 이 답답한 자수정 속에서 지내는 고통을 아느냐!
리타는 아무 말이 없었고, 말하다 지친 락제프도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도현은 땅바닥에 놓인 자수정을 집어 들었다.
“리타는 잠을 자나 봅니다.”
-안 자. 자는 척하는 거야. 못된 녀석. 하아, 내 신세가 참 처량하군.
도현은 리타와 락제프 사이에 끼어들어 누구의 편도 들 수가 없었다. 리타의 마음도 락제프의 고통도 둘 다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씨드는 결국 네 것이 되었군. 기분이 어떠냐?
“글쎄요, 샘에서 얻은 것을 두고 진짜 씨드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좋습니다. 강해지는데 싫을 이유는 없죠.”
도현은 솔직히 답했다.
-고대의 그 수많은 영웅들도 거인들과 결계에 막혀 눈물을 흘렸는데, 운명의 주인은 따로 있었어.
“제가 운명의 주인입니까?”
-내 눈엔 그리 보인다. 율리비어스란 녀석이 마법 구조물을 통해 론의 마법을 흔들어 놨지만 이득은 네가 보았다. 그것이 바로 운명인 것이다.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군요.”
도현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락제프 님, 한 가지 여쭤 볼 게 있습니다.”
팔소매를 걷어 올린 그는 락제프에게 타투를 보여 줬다. 그동안 도현은 동료들에게 타투를 보여 준 적이 없었다. 당연히 락제프도 처음 보는 상황이었다.
“이 문신을 봐 주십시오. 이 문신이 마법진일까요?”
락제프는 고대의 뛰어난 마법사로 마법적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스톤의 비밀을 풀기 위해 물어볼 사람으로는 적격인 사람이다.
도현의 팔뚝에 그려진 문신을 유심히 살펴본 락제프가 말했다.
-넌 왜 그런 걸 몸에 그리고 다니는 것이냐?
“그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지구에서 온 사람이라고 말을 하는 건 아직 조심스러웠다.
락제프는 도현에게 말 못 할 사정이 있다고 짐작했는지 더는 깊게 묻지 않았다.
-그건 마법진이 아니다.
“아! 그렇습니까?”
도현은 뭔가 아쉬운 눈빛으로 답했다.
‘몬스터의 기운이 타투로 흡수돼서 혹시나 했는데.’
타투가 가진 신비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도현은 조 박사의 가설에 상당 부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계로 넘어왔다. 하지만 락제프가 단칼에 그것은 마법진이 아니라고 단언하자 약간 당황스러우면서도 아쉬웠다.
“그렇군요.”
도현은 팔소매를 내렸다.
-하지만 독특하구나, 마치 율리비어스가 만든 창의적인 마법 구조물처럼 말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현은 의아한 눈빛으로 자수정에 맺힌 락제프의 눈을 응시했다.
-그건 미완성의 마법진이다.
“네? 미완성의 마법진요?”
-그렇다. 미완성의 마법진이라서 내가 마법진이 아니라고 말한 거다. 사람에게 팔다리가 있듯 마법진도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부위가 있다. 네가 가진 건 그중 한 부위야.
팔소매를 올린 도현은 타투를 락제프에게 다시 보여 주며 재차 확인했다.
“그러니까 완성된 마법진은 아니지만 이게 마법진의 한 부분이라는 말씀이죠?”
-맞다. 놀라울 정도로 세밀하고 창의적인 마법 구조를 가지고 있어.
락제프의 음성에는 절제됐지만 숨길 수 없는 감탄이 실려 있었다.
‘조 박사님 가설이 맞았어. 초고대 시대에도 마법이 존재했던 거야. 그런데 이 타투가 마법진의 한 부위일 뿐이라고? 그럼 스톤엔 왜 이것만 새겨져 있는 거지, 전체가 아니라?’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그에게 락제프가 말했다.
-마법진은 사람 몸에 그려져 있다고 해서 저절로 작동하지 않는다. 마법사가 마나를 통해 발동시키는 것이지. 그런데도 넌 마법진을 팔에 그리고 다니고 있구나. 그것도 미완성의 마법진을 말이다. 책이 없어 몸에 그리고 다니는 것이냐?
“그렇게 됐습니다.”
-또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비밀 많은 녀석 같으니라고.
“도현, 나도 보여 줘.”
자는 줄 알았던 리타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다가와 도현의 팔을 살폈다.
“스승님, 이게 마법진의 일부분이라고요? 전 잘 모르겠는데요? 그냥 복잡한 문신처럼 보여요.”
-너의 마법 깊이가 아직은 부족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사람으로 비교하면 도현의 팔에 있는 마법진은 몸통에 해당한다. 팔다리에 해당하는 것들이 빠져 있어.
“그래요?”
리타는 눈을 부릅뜨고 도현의 문신을 들여다봤지만 락제프의 말처럼 마법의 깊이가 부족해서 그런지 평범한 문신으로 보였다.
“도현,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런 걸 몸에 문신으로 하고 다녀?”
리타는 락제프와 같은 질문을 했다.
“내게도 말 안 해 줄 거야?”
“정말 미안해. 알려 주고 싶은데…… 내게 사정이 있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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