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 디 임팩트 17권 22화
“알았어. 조금 서운하긴 한데, 이유가 있겠지.”
리타는 시선을 내려 자수정 속의 락제프에게 말했다.
“스승님, 이 미완성 마법진은 무슨 마법진이에요?”
도현은 락제프의 대답에 귀를 쫑긋 세웠다. 바로 그가 궁금해하던 질문을 리타가 대신 해 준 것이다.
잠시 말이 없던 락제프가 천천히 답했다.
-소멸 마법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하면 알려 주마.
“예?”
망설이던 그녀는 궁금한 표정으로 모닥불 옆에 앉아 있는 도현을 힐끔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약속할게요.”
-확실하진 않지만 내 생각을 말하겠다. 도현의 미완성 마법진이 완성되려면 다섯 개의 마법진, 혹은 여섯 개의 마법진이 더 있어야 한다. 그것들이 상호 연결되면 율리비어스가 망각의 숲에서 만든 마법 구조물 이상의 엄청난 마나가 마법진에 모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일시적으로 강한 마나를 모으는 마법진이다. 대단한 마법 설계지.
“와아, 굉장한 거네요! 이런 걸 누가 만든 거지? 정말 궁금하네.”
리타와 락제프가 거의 동시에 도현을 쳐다봤다. 도현은 난처한 얼굴로 팔소매를 내리며 자신도 모른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러게, 나도 궁금하네. 누가 만들었을까?”
“도현, 정말 몰라?”
“어, 정말 나도 몰라, 누가 이런 마법진을 설계했는지.”
그들의 뜨거운 시선을 간신히 회피한 도현은 조금 전 락제프가 한 말을 떠올리며 질문을 했다.
“완성된 마법진의 마나를 작은 돌 안에 가둘 수도 있습니까?”
-돌에? 음, 가능할 것이다. 마법진을 발동시키는 마법사의 수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혹시, 락제프 님은 미완성의 마법진을 완성할 수 있으십니까?”
-내 능력으론 불가능하다. 이 마법진은 굉장히 독특하고 어려운 마법 구조여서 내가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한 게 전부다.
“그렇군요.”
자존심이 강해 보이는 뛰어난 고대의 마법사 락제프도 모른다고 할 정도면 미완성의 마법진을 완성하는 건 풀기 어려운 숙제가 될 수도 있다.
‘스톤을 여기서 만들어 보는 건 너무 욕심을 내는 일일까?’
초고대 시대에는 기계와 마법이 공존했다는 조 박사의 가설은 락제프의 확인으로 거의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스톤을 제작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정 이걸 만들고 싶다면 율리비어스 같은 자를 찾아가 그의 천재적인 머리를 빌려야 할 거다.
“율리비어스 말입니까?”
-그렇다. 내가 활동했던 고대에도 그자와 같은 마법사는 없었다. 수십 개의 마법진을 연결시켜 마나의 힘을 증폭시키는 마법 구조물을 설계한 그 창의적인 천재성은 나로서도 따라갈 수가 없다. 그 머리는 타고난 거야. 그자라면 여기 미완성의 마법진을 완성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에이, 그 사람이 해 주겠어요?”
리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씨드 때문에 도현을 원수 보듯 할 것이다.
-도현, 네가 그 미완성의 마법진을 내게 보여 준 건 결국 그 마법진을 완성시키고 싶은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었나?
“그렇습니다.”
도현은 순순히 인정했다.
-선택은 네가 해야겠지.
락제프는 그 말을 끝으로 자수정 안으로 사라졌다.
“도현, 그 마법진을 완성해서 뭐하려고? 사용할 데가 있어?”
“응, 돌에 그 힘을 저장시켜서 사용할 데가 있거든.”
“그래? 그럼 큰일이잖아. 율리비어스는 우리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은데…….”
“생각해 보자. 당장 급한 것도 아니고.”
도현은 조 박사의 가설을 확인한 것만 해도 기뻤다. 스톤을 만드는 건 조급하게 생각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율리비어스라 해도 못 만들 수 있는 것이니까.
“리타, 아직 술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 같은데, 미완성 마법진 생각은 그만하고 푹 자. 내일 카샨을 찾아가야지.”
“알았어, 잘 자.”
리타는 도현에게 받은 자수정을 호주머니에 넣고 모닥불 옆에 누웠다.
“도현.”
“응?”
팔베개를 하고 누운 도현이 리타 쪽을 바라봤다.
“어떤 비밀이든 내겐 말해도 돼. 난 입이 무겁잖아.”
“……잘 자.”
“응.”
크샤코 가문의 병사와 몬스터 들이 길게 꼬리를 물고 좁은 강을 건너고 있었다. 도현과 리타는 언덕 위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카샨이 안 보이는데?”
병자들이 많은지 들것에 실려 가는 사람들이 제법 됐다. 얼굴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도 많아서 저 중에 카샨을 단번에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곧 날이 어두워지니 야영을 할 거야. 그때 들어가서 살펴보자.”
“응.”
숲 일대에 2천여 명 가까운 병사와 인부, 많은 수의 전투 몬스터와 일꾼용 몬스터 들이 자리를 잡았다.
워낙 많은 수가 숲에 자리를 잡자 숲 전체가 작은 마을과 같았다.
외곽 경비를 서는 전투 몬스터의 눈을 피해 도현과 리타는 바람처럼 숙영지 안으로 스며들었다.
숲은 나무들이 많았지만 그 간격이 제법 넓어서 막사들이 들어서는 데 크게 지장은 없었다.
빈 공간마다 자리 잡은 막사들을 지나치던 도현은 구토와 설사로 탈진한 수많은 사람들을 목격했다. 멀리서 볼 때보다 상황이 심각했다.
“이 사람들 왜 이렇게 된 거지? 망각의 숲에서 떠날 땐 멀쩡했잖아.”
“글쎄. 집단으로 이러는 걸 보면 전염병이라도 걸린 것 같은데.”
병사들의 복장을 한 벌씩 훔쳐 입은 도현과 리타는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며 숙영지 안을 돌아다녔다.
아픈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전투 몬스터가 지키는 외곽 경비만 튼튼했고 내부는 거의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꽃가루병에 걸렸군.
“뭐라고요?”
리타가 자수정을 꺼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꽃가루병에 걸렸다고 했다.
“그게 뭔데요?”
말을 하던 리타는 도현이 옆을 가리키자 얼굴을 숙이며 걸었다. 옆에서 다가온 서너 명의 병사들이 그들을 지나쳤다.
-꽃가루병은 독성이 있는 꽃가루를 흡입한 사람들이 걸리는 병을 말한다. 꽃가루병에 걸리면 구토와 설사를 하고 얼굴이 누렇게 변하면서 저 녀석들처럼 비실거리지. 심하면 죽기도 하고.
“무서운 꽃가루네요.”
-내가 살던 고대에도 이 꽃가루는 심심치 않게 돌아다녔지. 설마 그 꽃가루가 여전히 돌아다닐 줄은 몰랐군.
“혹시 치료 방법도 아십니까?”
도현이 막사들을 지나치며 물었다.
-푸른 날개 박쥐를 잡아 그 피를 마시면 된다.
“박쥐의 피를요?”
푸른 날개 박쥐는 도현도 종종 목격한 동물이다. 하이드로우를 잡아 내공을 키우던 때 동굴은 물론 숲의 나뭇가지에도 거꾸로 매달려 있는 걸 자주 봤다. 심지어 조금 전에도 근처 숲에서 봤다.
희귀한 동물은 아니라는 뜻이다.
“생각보다 치료 방법은 어렵지 않군요.”
-모르는 자들에겐 고통스러운 병이지.
그들은 시체를 매장하기 위한 구덩이를 파고 있는 일꾼용 몬스터 주변을 지나쳤다.
횃불을 든 병사들 근처엔 수십 구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멀리 시체를 매장할 만도 한데, 그들은 막사 근처에서 바로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묻으려 하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친 리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스승님도 이 병에 걸려 본 적이 있어요?”
-어렸을 때 걸린 적이 있다.
“그럼 박쥐 피를 맛봤겠네요? 피 맛이 어때요?
-쓸데없는 거 묻지 말고 카샨이나 얼른 찾아.
“치이, 먼저 얘기 꺼냈으면서.”
입이 나온 리타는 자수정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들은 어두운 숙영지를 돌아다니며 카샨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다녀도 카샨은 보이지 않았다.
숙영지의 제일 크고 화려한 천막엔 카샨이 아닌 엉뚱한 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앉아 있었다.
“큰일이군…… 이러다 브링틱에 도착하기 전에 반 이상이 죽겠어.”
남자답게 선이 굵은 얼굴의 사내는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이다. 그는 원로 올라르의 지시를 받아 카샨을 보필해 망각의 숲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술잔을 기울이며 한숨을 쉬던 그는 빈 술잔에 술을 따르기 위해 술병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헛손질만 했다. 탁자 위에 당연히 있어야 할 술병이 사라진 것이다.
그는 탁자 밑을 살폈다. 술병이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뒤를 돌아본 그는 얼굴이 굳어졌다.
병사 복장을 한 키가 큰 사내와 작은 체구의 예쁘장하게 생긴 소년 병사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조용히 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요.”
손에 든 창을 지휘관의 목울대에 조용히 가져다 대며 도현이 말했다.
지휘관은 뛰어난 검사였다. 옆으로 재빨리 몸을 회전시켜 도현의 창을 피하며 옆에 놔둔 검을 뽑아 휘두르려 했다.
“매를 버는군.”
도현의 창이 뱀처럼 움직이더니 검을 반쯤 뽑은 지휘관의 뒤통수를 번개처럼 가격했다.
퍽 소리와 함께 지휘관이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으으으.”
뒷머리가 찢어진 지휘관은 신음을 흘리며 일어섰다. 그는 침입자들이 자신을 죽이려 했다면 손쉽게 죽일 수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곳에서 제일 화려한 천막을 차지한 걸 보면 위치가 상당한가 보군. 지휘관인가?”
“누구냐, 네놈은?”
“그건 알 것 없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그럼 조용히 물러갈 테니까.”
도현은 손에 들고 있던 창을 지휘관의 목울대에 다시금 댔다.
“만약에 조금 전처럼 허튼짓을 하면 그땐 창대가 아니라 이 창날이 당신 머리에 박히게 될 거라는 걸 명심하고.”
“흥! 내가 죽음을 두려워할 것 같나? 내가 고함을 지르면 수많은 병사들과 전투 몬스터들이 널 찢어 죽일 것이다.”
사로잡혔으면서도 오히려 지휘관은 살기등등했다. 곧 죽어도 고개를 숙일 인물은 아니었다.
“내가 이렇게 몰래 찾아온 건, 당신 부하들을 죽이기 싫어서야.”
도현의 차가운 살기에 지휘관은 흠칫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병든 당신 부하들 목숨도 다 빼앗을 만큼 독해질 수 있어.”
“맞아, 이 사람 자극하면 큰일 나. 알아서 상황 판단해.”
리타는 지휘관의 술을 마시며 옆에서 거들었다. 술병은 그녀 손에 있었던 것이다.
잠시 도현을 노려보던 지휘관이 입을 뗐다.
“원하는 게 뭐냐.”
“카샨.”
“뭐?”
“카샨은 어디 있나? 숙영지를 찾아봐도 안 보이던데.”
지휘관은 목울대에 와 닿아 있는 도현의 창날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분은 왜 찾는 거냐?”
“묻는 말에나 대답해. 그는 어디 있나?”
“내가 그걸 말할 것 같나?”
꼿꼿한 그의 대답에 도현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이때 리타가 나섰다.
“잠깐, 내게 맡겨 둬.”
리타의 눈이 검어지더니 잠시 후 거대한 리타의 얼굴이 나타나 지휘관을 향해 입을 쩍 벌렸다. 천막을 가득 메운 리타의 거대한 얼굴은 몬스터보다 더 끔찍해 보였다.
“말 안 하면 널 잡아먹고 밖에 나가서 네 부하들도 다 잡아먹을 거야. 거짓말 같지? 정말이야.”
지휘관은 옆에서 점점 다가오는 거대한 리타의 얼굴에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침입자들이 하는 짓이 아주 기괴했다.
잠시 도현과 리타를 노려보던 지휘관이 차갑게 내뱉었다.
“카샨이 이틀 전에 브링틱으로 먼저 떠났다고 내가 말할 줄 아느냐!”
“이틀 전에 떠나?”
“드비오라 불리는 얼음탑 마법사하고 같이 떠났다는 것도 말할 줄 아느냐! 차라리 죽여라.”
“드비오도 같이?”
도현은 창을 밑으로 내렸다.
“카샨이 왜 먼저 떠났지?”
“모른다. 난 아픈 병사들 때문에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몇 가지 질문을 더한 도현은 리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리타는 거대한 얼굴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우리가 밖으로 나가더라도 조용히 있으시오. 그러면 당신은 카샨에 대해 우리에게 아무 말도 안 한 게 되니까.”
나지막한 목소리와 차가운 눈빛으로 경고를 한 도현은 천막 밖으로 나가며 지휘관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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