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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426화 (426/575)

[426] 디 임팩트 18권 1화

초대

바람 한 점 없는 황량한 회색빛 대지 위에 돌풍이 불어닥쳤다. 모래처럼 쌓인 거대한 먼지층이 하늘 높이 치솟았고, 땅은 은은하게 흔들렸다.

사방에 위세를 떨치던 돌풍은 잠시 후 가라앉았다.

“이번엔 제대로 찾아왔군.”

돌풍을 동반하며 나타난 중년인은 도도한 눈빛과 거만한 표정으로 푸석푸석한 대지를 둘러봤다.

오래전에 설치해 둔 공간 이동 마법진은 여전히 유효했다.

이곳에 오려다 조금 전엔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그곳에서 한바탕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해적들의 섬을 박살 내고 온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해적왕의 수급을 땅에 툭 던졌다. 입을 벌린 모습으로 목이 잘린 해적왕의 눈은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그놈은 반성을 했나 모르겠군.”

중년인은 수천 년 전 그의 연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성주를 몬스터로 만들었다.

죽음은 가벼운 것. 신들의 세계로 성주의 영혼이 가지 못하도록 영원한 저주를 걸어 버린 것이다.

“확인해 볼까?”

검은 머리카락을 등까지 길게 기른 중년인은 기억을 더듬어 성이 있는 언덕을 찾아 나섰다.

그가 가는 길은 과거 도현이 두 자루 검으로 인간 몬스터들을 상대하며 지나쳐 간 길이었다.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 회색빛 대지를 걷던 중년인은 좌우로 쓰러진 외성을 지나면서 표정이 조금씩 굳어졌다.

멀리 보이는 언덕 위의 내성이 폐허로 변해 있었다.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더니 어느 순간 언덕 위에 나타났다. 공간 단축 마법으로 먼 거리를 단숨에 줄여 도착한 것이다.

“흠…….”

고대에 그가 이 성에 걸어 놨던 저주 마법이 파괴되어 있었다. 그 영향으로 인해 여전히 고통받고 있어야 할 이 성의 성주는 사라지고 없었다. 영혼이 해방된 것이다.

한동안 폐허가 된 성내를 둘러본 그는 돌무더기를 모래처럼 만들어 버린 뒤, 그 밑에 깔려 있던 낡은 방어구를 끄집어냈다.

이 성의 성주가 착용했던 갑옷으로, 도현의 파상 공세에 당해 여기저기 찢긴 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중년의 사내 모습을 한 바크 드라모스는 성주의 갑옷을 양손에 들고 마법을 발휘했다.

성주의 갑옷에서 반짝이는 빛이 흘러나와 바크 드라모스의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네놈이구나.”

마법진을 깬 도현의 얼굴이 그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성주의 갑옷을 맨손으로 찢어발긴 바크 드라모스는 차가운 눈빛으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새처럼 날아오른 그의 몸이 점점 커져 결국엔 거대한 검은 용으로 변했다.

바크 드라모스는 두 날개를 힘차게 펄럭이며 브링틱 방향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저들을 여기서 보게 되다니, 무슨 일로 온 걸까?’

도현은 올라르의 저택에서 나온 두 사람의 뒷모습을 호기심 짙은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로브로 몸을 가린 흰 수염의 노인과 작은 체구에 못생긴 얼굴의 사내.

그들은 다크캐슬에서 전쟁을 일으켰던 윌벤슨과 비버였다.

“아는 사람이야?”

골목에서 도현의 행동을 지켜보던 리타는 궁금했는지 큰길로 나와 도현에게 물었다.

“저기 갈색 옷을 입은 사람이 윌벤슨이야. 옆에 작은 사내는 그의 부하고.”

도현은 마차를 피해 길옆으로 비켜서며 대답했다.

“윌벤슨이라면…… 다크캐슬에서 스므차와 싸웠다는 그 마법사?”

“맞아. 여기서 그 사람을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칼라치를 찾으러 온 게 아닐까?”

리타는 다크캐슬에서 벌어진 일을 도현에게 들어서 윌벤슨과 칼라치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글쎄,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고,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브링틱에 왔을 수도.”

말을 하는 도현의 얼굴은 후드로 인해 코 밑까지 음영이 져 있었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차가 그들의 시야를 가렸다. 잠시 뒤 마차가 옆으로 이동해 앞이 다시 보였지만, 그때는 이미 윌벤슨과 비버의 모습이 사라진 뒤였다.

‘그는 스므차를 여전히 증오하고 있겠지?’

스므차의 파멸을 원하는 윌벤슨의 집요함은 실로 대단했었다. 무려 10년간이나 다크캐슬에서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했고, 칼라치와 구역장들을 동원해 실제로 전쟁을 일으키는 데 성공도 했다. 비록 스므차의 압도적인 무위에 밀려 막판에 패하긴 했지만.

도현은 윌벤슨에게 두었던 관심을 서서히 거두며 뒤돌아섰다. 병사들이 지키는 올라르의 저택이 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의 목적은 카샨을 잡아 동료들의 빚을 받아 내는 것이다. 윌벤슨의 출현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카샨의 일이 먼저였다.

“다녀올게.”

도현은 카샨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홀로 올라르의 저택에 스며들었다.

크르르르.

저택에 배치된 5미터급 전투 몬스터 한 마리가 붉은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며 뒤를 획 돌아봤다.

정원에 심은 나무의 잎사귀들이 바람도 없는데 미세하게 흔들렸다.

뭔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눈을 몇 번 껌뻑거린 전투 몬스터는 쿵쿵 소리를 내며 나무 주변을 살폈다.

그사이 도현은 전투 몬스터가 지키고 있던 자리를 통과해 저택 내부 깊숙이 들어갔다.

놀랍도록 빠른 발과 깃털처럼 가벼운 몸을 이용해 전투 몬스터와 경비병 들의 눈을 따돌린 도현은 한 줄기 바람이 되어 3층 창문으로 진입했다.

웅장한 규모의 저택이라 3층 창문까지의 높이가 상당했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단번에 공중에 뛰어올라 반쯤 열린 창문을 넘어간 도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방과 복도를 오가며 집 안에 카샨이 머물고 있는지 조사했다.

집 안에 일하는 사람들과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다니며 조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사실 발각돼서 싸우더라도 두려울 상황은 아니었지만 되도록 무의미한 살생은 피하려 했다.

‘안 보인다.’

저택 곳곳을 살펴봤지만 카샨은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 원로 올라르를 발견했다. 그는 1층 서재에서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홀로 책을 읽고 있었다.

‘망각의 숲에서의 일을 보고하기 위해서라도 아버지를 찾아오는 게 당연해. 시간상으로 보면 이곳에 왔을 가능성이 높아.’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도현은 그가 이곳에 찾아왔을 거라고 추측했다.

‘벌써 떠난 걸까, 아니면 아직 찾아오지 않은 걸까?’

복도 천장에 달라붙어 여러 가지 생각을 하던 도현은 아래를 내려다봤다.

얼굴이 퉁퉁 부은 젊은 사내가 절뚝거리며 커다란 물통을 옮기고 있었다.

“빌어먹을. 다 뒈져 버려라.”

낮은 목소리로 욕을 하던 사내는 지하에 있는 대리석 욕조에 뜨거운 물을 들이부었다.

그는 이곳에서 올라르의 목욕물을 담당하는 사람이었다.

특별한 약초가 들어간 이 목욕물은 향이 독해서 일꾼용 몬스터들은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일과 달리 이 일은 일꾼용 몬스터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온전히 사람의 힘으로만 해야 했다.

“난 재수 없는 인간이야. 다른 녀석들은 몬스터를 이용해 편하게 일하는데, 나만 이 모양이지.”

새벽엔 대리석 욕조에 미끄러져 얼굴을 다쳤다. 그래도 누구 하나 신경 써 주는 사람이 없었다.

“젠장.”

그는 매일 반복되는 목욕물 나르기에 질려 있었다. 길게 한숨을 내쉰 그는 화려한 대리석 욕조 테두리에 슬그머니 엉덩이를 걸쳐 봤다.

관리가 보면 당장 그를 죽이려 할 것이다. 이 욕조는 원로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다.

“그럴 게 아니라 욕조 안에 들어가서 쉬는 건 어때요?”

별안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기겁을 한 사내는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다봤다.

수증기가 가득한 지하 석실 안에 낯선 사람이 서 있었다.

“누, 누구야?”

다리가 약간 불편한 그는 절뚝이며 경계를 했다.

“이곳에 볼일이 있어서 온 사람.”

도현은 대리석 욕조에 성큼성큼 걸어가 손을 집어넣었다.

“뜨겁군.”

“다, 당연하지, 식으면 안 되니까. 근데 진짜 당신 누구야?”

원로의 욕조에 걸터앉은 걸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그는 죽은 목숨이었다. 긴장이 심했는지 목욕물을 나르는 사내는 목소리가 떨렸다.

도현은 겁에 질린 채 잔뜩 경계를 하는 젊은 사내에게 다가갔다.

“긴장할 것 없습니다, 몇 가지 물어보고 조용히 떠날 테니까.”

“뭘?”

“카샨이 이곳에 있습니까?”

사내는 도현의 눈치를 보며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분위기를 보니 눈앞에 사내는 허락받지 않고 몰래 들어온 사람 같았다.

그는 힘든 일 때문에 불만이 많았지만 그래도 크샤코 가문의 사람이었다. 적에게 이로운 행동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려운 질문은 아닌 것 같은데…….”

도현이 품에서 작은 보석을 하나 꺼냈다.

고함을 질러 밖에 있는 경비병들을 부를까 고민하던 사내는 횃불에 반짝이는 보석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걸 주겠다는 거요?”

“당신의 행동에 따라서.”

“난 원로님의 목욕물을 담당하는 사람이오. 날 어떻게 보고.”

“조금 전엔 불평이 많았던 것 같은데. 내 생각이 짧았나 보군. 알겠소, 다른 사람을 찾아가 보는 수밖에. 아, 걱정 마시오. 원로의 욕조에 엉덩이를 댄 사실은 말하지 않을 테니까, 혹시 내가 잡히면 몰라도.”

“잠깐!”

목욕물을 나르던 사내는 도현의 팔을 급히 붙잡았다.

“그분은 지금 여기에 안 계시오. 아침에 떠나셨소.”

“어디로 갔는지 압니까?”

“정확한 건 나도 모르오. 다만 그분을 태워 준 마차의 마부가 항구에 다녀왔다고 내게 말했으니 배를 타려는 게 아닌가 싶소.”

“항구라…….”

높이 뜬 해가 이제는 서서히 기울려는 시점이었다.

아침에 항구로 갔다면 벌써 배를 타고 항구를 떠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뒤를 쫓기에는 늦은 감이 있다. 하지만 확인은 해 봐야 한다. 배를 타려는 목적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간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불안한 눈빛으로 서 있는 사내에게 약속한 보석을 준 도현은 올라르의 저택을 나와 리타와 함께 항구로 향했다.

브링틱 성과 항구는 거리도 가까울뿐더러 잘 정비된 도로가 길게 연결되어 있어서 말이나 마차를 이용하면 짧은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도현과 리타는 탁 트인 항구 일대를 둘러봤다.

거대한 강에 조성된 항구엔 상선과 어선, 여객선, 전함 등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정박해 있었다.

“와, 배 많다.”

리타는 크고 작은 많은 배들을 구경하며 감탄했다. 그녀의 인생은 산에서 지낸 시간이 대부분이어서 수백 명의 사람과 무거운 짐을 가득 실은 큰 배들을 가까이서 구경할 기회가 없었다.

도현과 브링틱에 온 지는 꽤 됐지만 항구에 발을 디딘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배 구경도 잠시, 그녀는 사람들로 붐비는 선착장 주변을 돌아다니며 카샨을 찾는 데 집중했다.

“너, 혹시 이렇게 생긴 사람 못 봤니?”

리타는 선착장에서 짐꾼으로 일하는 소년에게 카샨의 외모가 그려진 종이를 보여 주며 물었다.

“못 봤는데. 헤헤, 너 예쁘다.”

소년의 말에 리타는 소리 내어 웃었다.

“어린애가 예쁜 건 아는구나.”

“너도 어리면서 어른처럼 말하네?”

“안 어리거든. 너네 엄마 나이야, 내가.”

“거짓말. 저리 비켜, 일해야 돼.”

소년은 커다란 곡물 자루를 어깨에 메고 있는 일꾼용 몬스터를 이끌고 마차로 향했다. 그는 어리지만 어엿한 일꾼용 몬스터의 주인이었다.

“저게!”

어깨를 툭 밀치고 지나친 소년의 행동에 리타가 발끈하려 했다. 그때 리타와 떨어져 카샨의 정보를 모으던 도현이 그녀의 뒤에 나타났다.

“리타, 그만 돌아가자.”

“카샨은?”

“아쉽지만 이미 배를 타고 떠났어.”

“치이, 어쩐지 꼭 그럴 것 같았어.”

도현은 바람에 출렁이는 강물에 시선을 두었다.

선착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확인한 결과 카샨은 크샤코 가문의 상선을 타고 떠난 지 오래였다.

배를 타고 항구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뒤를 쫓아가 볼까도 생각해 보겠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흘러 버렸다.

“그 얼음 인간의 팔을 비틀어서 뽑아야 하는데.”

리타는 분하다는 듯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기회는 또 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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