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 디 임팩트 18권 2화
리타의 어깨를 두드리며 돌아서던 도현의 시선이 문득 하늘로 향했다.
푸른 하늘에 높이 뜬 구름이 길게 늘어서서 이동하고 있었는데, 그 구름 사이로 언뜻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뭔가가 보였다.
흰 구름과 대비되는 검은색 물체.
순간적으로 본 상황이라 정확한 식별이 불가능했다.
“하늘에 뭐 있어?”
도현의 시선을 좇아 하늘을 올려다본 리타가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자신이 무엇을 봤는지 단정 지어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도현은 가볍게 말을 받으며 선착장 밖으로 리타와 함께 걸어갔다.
‘조금 전 그건 뭐였을까…… 거대해 보였는데.’
까마득히 높은 하늘의 구름 사이로 본 의문의 물체는 도현의 머릿속에서 한동안 사라지지 않고 맴돌았다.
브링틱과 크샤코 가문을 상징하는 두 개의 깃발을 매단 중형급 상선 한 척이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추진력 삼아 빠른 속도로 이동 중이었다.
좌우로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카샨과 드비오는 말없이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탑주를 비롯해 많은 얼음탑 마법사들을 잃고 얼음탑으로 돌아가는 둘의 심정은 슬프지도, 그렇다고 기쁘지도 않았다.
“탑의 원로들이 많은 질문을 쏟아 낼 거네, 탑주가 되려면 단단히 준비해야 할 거야.”
“속일 게 없는데 꺼릴 게 있겠습니까?”
담담한 카샨의 대답에 드비오는 헛기침을 했다.
“샤비엔다의 일은…….”
“걱정 마십시오. 그녀는 익사해서 죽은 거니까요.”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드비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훌륭한 얼음탑주가 될 걸세.”
“훌륭한 얼음탑주?”
카샨은 피식 웃으며 갑판의 난간에 몸을 기댔다. 작은 어선 몇 척이 고기를 잡는 게 보였다.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용병 녀석이 두려워 이렇게 도망치듯 돌아가는데요.”
“또 그 이야기인가? 영원한 강자는 없네. 영원한 패배도 없고.”
드비오는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중심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라면 언젠가 그 용병 녀석을 뛰어넘는 대마법사가 될 거야.”
브링틱의 고대 도시가 발견된 계기는 수만 명이 묻힌 고대 병사들의 무덤이 발견되면서부터다.
고대에 얼음산이 폭발해 순식간에 얼어 죽은 고대 병사들의 유해는 원로들의 지시로 거대한 동굴 속으로 옮겨졌다.
물론 고대 병사들이 착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갖가지 고대 병장기와 그들의 물건은 모두 회수됐고, 세 가문의 원로들은 그것을 공평히 나눠 가져갔다.
고대 병사들의 수는 대략 5만 명이 넘었는데, 그들의 신체를 구성하던 두개골과 각종 뼈는 동굴 속에 차곡차곡 쌓여 음산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동굴 입구엔 ‘거룩한 고대 병사의 무덤’이라는 글귀까지 쓰여 있었는데, 브링틱을 통치하는 세 가문의 원로들은 그들에 대해 나름 예우를 한 셈이었다.
동굴을 지키는 병사들과 전투 몬스터 수가 적지 않아서 그곳엔 함부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숲에 숨어 동굴을 바라보던 깡마른 노인은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윌벤슨과 비버가 다가오고 있었다.
“베르노프, 여관에서 기다리라고 했더니 기어이 여기까지 왔군.”
“죽은 자들이 나를 부르고 있네. 어서 자신들을 꺼내 달라고 말이야.”
죽은 자들의 뼈를 이용해 생전의 모습으로 소환해 내는 소환술사 베르노프는 음침하게 대꾸했다.
그의 한쪽 팔은 어깨부터 잘려 있었다. 윌벤슨을 도와 다크캐슬에서 스므차와 싸우다 팔을 잃은 것이다.
그나마 그는 목숨이라도 건졌지만, 함께 다니던 두 명의 형제는 그날 스므차의 검에 시체조차 온전히 남기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었다.
“원로들은 만나 봤나?”
“히반과 베노아만. 올라르는 나를 만나 주지 않아서 그 밑에 사람에게 얘기를 전하고 왔네.”
윌벤슨은 대답하며 베르노프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무 사이로 멀리 동굴이 보였다.
‘저 안의 것들이 필요해.’
베르노프의 금지된 소환술에 제일 좋은 재료들은 저처럼 오래된 유해다. 뼈가 오래될수록 소환됐을 때 그 힘이 막강해진다.
평범한 병사들이라 해도 수천 년이나 된 고대 병사들의 능력은 대단히 파괴적이다. 수만 명이나 되는 고대 병사들의 뼈는 그래서 베르노프 같은 소환술사에게는 다시없는 귀중한 존재다.
“저 안에서 몇이나 건질 수 있겠나?”
윌벤슨의 물음에 베르노프는 옷 속에 감춰 둔 작은 해골 지팡이를 꺼내 검은 혀로 핥았다.
뒤에서 지켜보던 작은 키의 비버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토하는 시늉을 했다.
“그건 안에 들어가 봐야 알겠지. 아무 뼈나 다 소환되는 건 아니니까.”
동굴 안에 들어가서 수하로 부릴 수 있는 고대 병사들을 선별해 내야 한다.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일이라서 도둑처럼 숨어 들어가 단번에 끝낼 수가 없었다. 따라서 원로들의 허락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윌벤슨이 원로들을 만나고 다닌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물론, 마법 연구라는 적당한 핑계를 댔고, 그 대가로 상당한 돈을 지불하기로 했다.
“윌벤슨, 난 많이도 안 바라네. 고대 병사 서른 명이라도 수하로 거둘 수 있으면 좋겠군. 그 정도만 돼도 아주 근사할 거야. 아주 말이야.”
대략 5만 명으로 알려진 고대 병사 중 서른 명이라면 굉장히 적은 숫자였는데, 베르노프는 그것만 돼도 만족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음침하게 웃은 베르노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토하는 시늉을 했던 비버의 머리를 해골 지팡이로 때렸다.
“한 번만 더 내 신성한 해골 지팡이를 보고 그따위 장난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예, 예. 조심하겠습니다.”
비버는 약간 바보스러운 어투로 대꾸했다.
“성으로 돌아가세.”
동굴을 바라보고 있던 윌벤슨은 한 팔이 없는 베르노프와 바보스럽지만 검술과 마법이 뛰어난 비버를 데리고 브링틱 성으로 향했다.
‘원로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르겠군. 올라르를 만났어야 했는데…….’
다른 두 원로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가 걱정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브링틱 성의 북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던 윌벤슨은 보통 사람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거한이 방패를 메고 걸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아!”
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뒷모습만으로도 거한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서둘러 뛰어가 거한의 앞에 섰다.
왼쪽 눈에 안대를 한 적발에 거대한 사내. 그의 예상대로였다.
“역시 자네였군. 반갑네, 칼라치.”
이디언과 헬구스를 데리고 막 성안으로 들어서던 칼라치는 윌벤슨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오, 윌벤슨.”
카샨을 놓친 아쉬움 속에 항구를 떠난 도현과 리타는 달빛이 흐르는 산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산길은 산중 깊숙한 곳에 위치한 톨리핀의 통나무집까지 연결되어 있다. 중도에 나오는 작은 폭포에 길이 끊겼다고 단념하지만 않으면 숨어 있듯 자리 잡은 그의 집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여러 번 이 길을 이용한 그들은 다른 때와 달리 서두르는 기색 없이 산책이라도 하듯 산을 타고 있었다.
“얼마 만에 느껴 보는 여유로움인지 모르겠어.”
폭포 앞에 도착한 리타는 양팔을 크게 펼치며 폭포가 만드는 시원한 물보라와 바람을 온몸으로 만끽했다.
작은 폭포에서 떨어지는 폭포수는 그 크기답지 않게 우렛소리를 냈고, 안개 같은 물보라는 그녀와 도현의 얼굴을 촉촉하게 만들었다.
비록 카샨을 잡지 못했지만 촉박하게 지내온 지난 시간이 이 순간의 평화로움으로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여기서 쉬었다 갈까?”
폭포수에 세수를 한 도현이 리타를 돌아보며 물었다. 폭포를 지나 얼마간 올라가면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는 톨리핀의 집이 나온다. 굳이 여기서 쉴 이유는 없지만 리타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응, 조금만 쉬었다 가. 술도 마시고.”
“술까지?”
“분위기 좋잖아.”
남자처럼 껄껄 웃는 흉내를 낸 그녀는 마법 주머니 안에서 술 두 병을 꺼내 그중 한 병을 도현에게 건넸다.
“그럼 한 병씩만 마시고 가는 거야.”
술병의 마개를 열며 도현이 다짐을 받듯 말했다.
“알았어. 걱정 마.”
폭포수를 바라보며 술을 마시던 리타는 작은 돌 조각을 폭포에 던졌다.
“미안해, 도현.”
“뭐가?”
술을 한 모금한 도현이 고개를 돌려 옆에 앉아 있는 리타를 봤다. 그녀는 밝았던 조금 전과 달리 약간 시무룩해져 있었다.
“괜히 내가 따라와서 그를 놓친 것 같아. 나 때문에 발걸음이 느려졌잖아.”
“무슨 소리야 그게, 쉬지 않고 나랑 같이 움직였으면서. 그 녀석 때문에 리타가 속상해하면 할수록 우리가 손해 보는 거라고.”
도현의 말에 리타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다음엔 내 마왕으로 카샨의 팔다리를 몸통에서 분리시키고 말거야. 꼭!”
“그래, 그러면 되지.”
“아, 근데 카샨은 왜 그렇게 서둘러서 브링틱을 떠났을까? 설마 우리가 쫓고 있다는 걸 진짜 느낀 걸까?”
“글쎄…….”
도현은 드비오와 같이 상선을 타고 떠난 카샨을 떠올렸다. 그는 얼음탑주의 지시 없이 홀로 브링틱을 떠날 입장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드비오와 같이 브링틱을 떠나고 말았다.
“오면서 생각해 봤는데, 어쩌면 카샨은 탑주의 죽음을 알고 있을 수도 있어.”
“그가 어떻게? 그는 그날 거인의 섬에 없었잖아.”
얼마 안 남은 술병의 술을 흔들어 그 양을 확인한 리타가 고개를 갸웃했다.
카샨은 거인의 섬이 호수에 가라앉기 전날 크샤코 가문의 사람들과 함께 망각의 숲에서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음흉한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녀의 생각과 달리 그는 실제로 망각의 숲을 떠나 브링틱을 향해 길을 떠났던 것이다.
“율리비어스와 쌍둥이 검객이 있잖아. 그들은 거인의 섬을 떠나면서도 멀리서 나와 탑주의 싸움을 지켜봤거든. 그들이 정보를 제공했을 수도 있어.”
“듣고 보니 그러네. 어쩐지 브링틱을 주저 없이 떠난 느낌이더라니.”
술을 모두 비운 그녀는 알딸딸해지는 기분 속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을 좋아하지만 주량이 세지 않은 그녀는 양볼에 홍조를 띤 얼굴로 외쳤다.
“가자, 도현!”
몸을 돌리며 외치는 그녀를 향해 하늘에서 번쩍이는 빛이 날아왔다.
그 빛은 거대한 불길로, 순식간에 그녀와 도현은 물론 인근 폭포까지 모조리 집어삼키려 했다.
“어?”
술이 올라온 리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몸이 굳었는지 위에서 떨어지는 불길을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밤하늘이 온통 시뻘건 화염의 바다로 변해서 그녀에게 자꾸만 가까워지고 있었다.
“리타!”
도현의 고함 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리타는 그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이 환영을 남기며 옆으로 길게 쭉 늘어났다.
쿠쿠쿠 콰아앙!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작은 폭포는 흔적도 없이 박살이 났고 고였던 물들은 엄청난 열기를 견디지 못해 한순간에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불길을 정통으로 맞은 자리는 깊이 1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구덩이까지 생겨나서 그 안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랐다.
절정의 신법을 펼쳐 리타와 함께 폭포 위로 떨어지는 불길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도현은 굳은 얼굴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검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중년인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속의 기운들이 모두 그의 앞에서 경배하듯 숨죽였고 도현에게 어서 무릎을 꿇고 엎드리라고 강요하는 것 같았다.
무형의 압박감이 중년인은 물론 세상 모든 곳에서 뿜어져 나와 도현에게 집중됐다.
리타의 손을 잡고 서 있는 도현의 손등에 굵고 푸른 힘줄이 돋아났다.
‘대단한 기세다. 숨이 턱 막힐 정도야. 누구지?’
초고수의 경지에 올라 있는 도현은 한눈에 중년인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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