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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429화 (429/575)

[429] 디 임팩트 18권 4화

달과 꽃처럼 아름다웠던 고모를 잠시 추억하며 서 있던 돈조르니는 주름진 손으로 품 안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고모가 남긴 유품으로 그는 그걸 늘 소지하고 다녔다.

‘고모의 말씀을 믿고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헛수고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돈조르니는 조카인 대공을 지지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반란군들이 대공을 밀어내는 것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본성을 빼앗기고 붉은 성을 중심으로 적들과 싸우고 있지만, 반란군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고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갔다.

그는 고심 끝에 고모의 말을 기억해 내고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자네 고모가 말씀하신 그 사람이 아직 살아 있을까? 아니, 애초부터 존재나 하는 걸까?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라니…….”

에이저는 세상을 냉소적으로 봤다. 젊었을 때부터 그랬다. 약간 삐딱한 그의 어조에 돈조르니는 껄껄 웃었다.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어떡하겠나?”

“말년에 자네 때문에 이 무슨 고생인가? 조용히 사냥이나 하면서 생을 마감하려고 했는데, 그 빌어먹을 브링틱 사건 때문에 따라 나와서, 이제는 전쟁이라니. 망할.”

에이저가 툴툴거리며 숲으로 들어가자 돈조르니는 뒤따라가며 그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이보게 에이저, 그래도 나와 함께한 젊은 시절은 재밌었지?”

“끝내줬지.”

“이번 전쟁도 끝내주게 끝을 맺자고.”

“팔 치우게.”

“이제 이 집은 우리 거야. 많은 보물들이 있는 이 집이 말이야, 흐흐흐.”

지하 보물 창고에서 두 사내는 서로 부둥켜안으며 기뻐했다. 지하 창고에 가득한 온갖 종류의 보석과 장신구 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금화들이 모두 그들의 것이 됐다. 괴물 같은 주인 밑에서 오랫동안 고생한 끝에 큰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설마 주인님이 다시 돌아오는 건 아니겠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그럴 이유가 없잖아. 떠난다고 했으니까 안 돌아올 거야.”

“그렇겠지? 그럼 낡은 이 집을 싹 허물고 왕궁 같은 집을 짓자고.”

“무슨 소리야? 이 지겨운 집에서 계속 살려고? 밖으로 나가야지. 숲도 지겨워 죽겠다고.”

“아, 그런가? 크크크.”

보물 더미 위에 앉은 두 사내는 황금 잔에 술을 따라 마시며 앞으로 뭘 할 건지 이야기꽃을 피우다 몸이 굳어졌다.

바크 드라모스가 창고 문 앞에서 무심한 눈길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주, 주인님.”

술이 든 황금 잔을 떨어트리며 두 사내가 벌떡 일어났다. 다시 볼일이 없을 것처럼 말하고 집을 떠난 주인이 되돌아오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가 없으니 좋았나 보구나.”

“아, 아닙니다.”

“술과 음식을 준비해 오너라. 술잔은 두 개를 준비하고.”

“두 개를 말입니까?”

“그래, 손님이 왔다.”

바크 드라모스가 창고를 나가려 할 때 원숭이처럼 팔이 긴 사내가 주저하며 어렵게 물었다.

“저어, 주인님, 이곳을 떠나 안 돌아오실 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아, 아닙니다, 주인님. 저희들이 잘못 들었나 봅니다, 헤헤.”

굽실거리는 두 사내들을 차갑게 훑은 바크 드라모스는 지상으로 올라와 복도를 걸었다.

긴 복도 벽면엔 예술성이 뛰어난 가치 있는 그림들이 쭉 걸려 있었고, 생생한 모습으로 조각된 여러 인물들의 조각상도 늘어서 있었다.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간 그는 방 안을 둘러보는 도현에게 말했다.

“앉아, 방 구경하라고 널 이곳에 데리고 온 게 아니니까.”

“창문 밖을 보니 숲이 보이는군요. 이곳은 어디입니까?”

“나만큼이나 궁금한 게 많은 녀석이군. 넌 지금 아주 위험한 상태라는 걸 인식해야 돼.”

황금 장식이 된 고풍스러운 의자에 몸을 기댄 바크 드라모스는 창가에 서 있는 도현에게 손짓을 했다.

그 순간 번쩍이는 빛이 도현의 팔에 스며들었다.

“문양을 돌려줬으니 네놈이 누구고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이 세계로 넘어왔는지 설명을 해 봐.”

도현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타투가 제자리를 찾자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용의 능력이 정말 대단하긴 하군, 차원 이동을 하게 해 주는 타투까지 마음대로 조종하다니.’

“경고하건대 내 앞에서 차원 이동을 해 도망칠 생각이라면 포기하는 게 좋을 것이다.”

“도망치지 않습니다.”

속이 뜨끔한 도현은 바크 드라모스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나는 시간 끄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 성격이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도현을 바크 드라모스는 얼음처럼 투명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검은 용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던 도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백도현입니다. 지구라고 불리는 세계에서 왔습니다.”

“그곳은 어떤 세상이지?”

“이곳과 비슷합니다. 인간이 살고 신을 믿고 술을 즐기기도 합니다. 산과 바다 같은 자연환경도 크게 다르지 않고요.”

“그럼 넌 왜 이곳에 왔느냐? 이곳과 너의 세상이 다르지 않다면 굳이 여기에 올 이유가 없을 텐데. 무슨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

“이곳에 몬스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도현은 솔직하게 털어놨다. 투명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검은 용은 단번에 그의 정체를 꿰뚫어 본 존재다. 타투의 비밀도 알아챘고. 여기서 어설프게 대응하다가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몬스터 때문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몬스터를 잡으면 그들이 지니고 있던 마나를 이 문양을 통해 체내에 흡수할 수 있었습니다. 강해질 수 있는 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저는 이계에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요.”

“네가 살던 세상엔 몬스터가 없었나 보군.”

“그렇습니다.”

도현을 표정 없는 얼굴로 바라보던 바크 드라모스는 뒤를 돌아봤다.

집 안에 있는 유일한 그의 시종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주인님,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놓고 나가거라.”

“예.”

팔이 긴 사내와 두꺼비처럼 생긴 사내는 술과 음식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힐끔 도현을 훔쳐봤다. 주인을 섬긴 지 오래됐지만 집 안에 인간을 들인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나가지 않고 뭐 하는 거냐?”

시간을 끌며 도현을 훔쳐보던 그들은 바크 드라모스의 목소리에 놀라 후다닥 문을 닫고 나갔다.

“차원 이동에 대해 설명해 보거라.”

아름다운 은색 술잔에 술을 따르며 바크 드라모스가 물었다.

“우연한 기회에 이런 능력을 갖게 됐습니다.”

도현은 차원 이동 장치와 스톤 사이에 벌어진 알 수 없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과학을 설명해야 하는데 바크 드라모스가 그것을 이해할지도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도현은 자신에게 술도 권하지 않고 혼자서 술을 마시는 바크 드라모스에게 짧지 않은 시간을 소비해 차원 이동 장치 실험 도중 자신에게 벌어진 사건을 설명하는 데 성공했다.

“흥미롭군. 그런 물건을 만들어 차원 이동을 하려 했다니, 인간인 주제에 제법 똑똑해. 네가 말하는 초고대 문명이라는 것도 재밌고.”

도현의 얘기가 만족스러웠는지 그는 한쪽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술잔에 술을 채워 건넸다.

“마셔라.”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술잔을 손을 내밀어 받은 도현은 그렇지 않아도 목이 말랐기에 단번에 술을 들이켰다.

“잘 마셨느냐?”

“좋은 술 같습니다.”

“당연히 좋을 수밖에, 내가 만든 술인데.”

남은 술을 비운 바크 드라모스는 도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호기심을 다 채웠으니, 이제 네가 한 일에 대한 벌을 내려야겠다. 특별히 생각해 저주를 걸지 않고 깨끗한 죽음을 내리마.”

도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눈빛이 무거워졌다.

“꼭 이렇게 해야겠습니까?”

“아주 오래전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다. 하찮은 인간을 사랑하게 된 내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감정에 충실히 따르려 했다. 행복한 시간이었고 처음으로 차원을 넘어온 게 잘한 선택이었다고 믿었지.”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방 한쪽에 걸려 있는 검을 뽑아 들고 뒤돌아섰다.

도현도 일어서서 검을 뽑은 상태였다.

“내가 일이 있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그녀는 화형에 처해졌다. 성의 광장에서 말이야. 성주가 직접 불을 붙이고 주민들은 환호를 했지.”

“왜 그녀가 죽었습니까?”

“신녀였거든, 신전에서 봉사하는. 순결해야 할 처녀가 남자와 함께 살고 있으니 속이 뒤집어진 것이지. 신도 날 무시하지 못하는데 감히 하찮은 인간들이 내 여자를 이글거리는 불더미 위에서 태워 죽였단 말이다!”

콰앙!

분노한 바크 드라모스의 기세에 방 안의 집기들이 부서지고 문짝이 날아갔다.

“그래서 내가 그 성에 저주를 내린 것이다. 그녀는 내 아이도 가졌었거든.”

말을 하는 바크 드라모스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까마득히 오래전 일이지만 그에게는 마치 어제 벌어진 일처럼 생생한 것 같았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도현은 바크 드라모스가 왜 그런 짓을 벌였는지 이유를 알게 되자 한층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랑하는 여자와 아이까지 잃은 용의 분노를 이해할 만도 했다. 비록 성 전체에 저주를 건 건 과한 면이 있는 것 같았지만.

“다른 자들은 몰라도 그 성주 녀석만큼은 더 고통을 받았어야 했다. 그걸 네가 풀어 줬지.”

“당신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렇다 해서 제게 죄를 물으려 한다는 건 억지라고 봅니다. 고대의 일을 제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아직도 이 머릿속에는 숯덩이가 된 그 여자가 들어 있다. 더러운 신들이 보호해 주지 않은 내 여자가.”

바크 드라모스의 손에 들린 검이 붉은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마법은 쓰지 않겠다. 도망갈 수 있으면 재주껏 도망쳐라. 내 손에서 벗어나면 그땐 널 쫓지 않겠다.”

“어쩔 수 없군요.”

도현은 검에 막대한 내공을 주입해 싸울 태세를 갖췄다.

상대가 마법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용의 검은 어떨까?’

긴장되는 상황 속에서도 도현은 용이라는 절대적인 존재가 어떤 검술을 사용할지 기대가 됐다.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인간의 검과 용의 검은 아주 다르거든.”

차가운 미소를 지은 바크 드라모스가 용의 검술을 펼치려는 순간 복도에서 눈치를 보며 서 있던 팔이 긴 사내가 불쑥 끼어들었다.

“주인님, 주인님을 찾아온 자가 있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네놈을!”

도현에게 검을 날리려던 바크 드라모스는 분위기를 깨며 끼어든 시종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죄, 죄송합니다, 주인님. 그냥 싸우십시오. 집이 부서지면 안 되는데…… 고치려면 힘도 들고…….”

쭈뼛거리며 복도를 걸어가는 그를 바크 드라모스가 불러 세웠다.

“날 찾아온 자가 있다고?”

“그렇습니다. 집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내 이름들 중 어떤 이름을 언급했지?”

바크 드라모스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여러 이름을 사용해 왔다.

“제라이즈입니다.”

“음…….”

바크 드라모스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여러 이름 중 ‘제라이즈’라는 이름은 오직 한 여자만을 위해 사용했다.

바크 드라모스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검을 거두고 도현에게 말했다.

“곧 돌아오마.”

바크 드라모스가 나가자 도현은 황당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내가 이대로 도망이라도 가면 어쩌려고 저렇게 그냥 가 버리지?’

도현은 3층 창가로 걸어가 밖을 살펴봤다.

비를 맞고 서 있는 두 노인이 보였다. 한 사람은 검을 차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활을 메고 있었다. 바크 드라모스의 시종이 말한 사람이 저들 같았다.

‘저들은 이곳에 검은 용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온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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