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 디 임팩트 18권 8화
엄청난 힘을 가진 그에겐 망상이 아닌 실현 가능한 꿈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최근에 고향에 돌아왔을 때 휴반트는 벨피타 영주의 딸을 보고 한순간에 반해 버리고 말았다.
그녀를 손에 넣고 싶었던 그는 영주를 찾아가 자신의 힘을 일부 보여 줬고, 영주는 오래 생각하지 않고 딸을 내주겠다고 했다.
성벽을 주먹 하나로 허물어 버리는 사내에게 매료되지 않을 영주는 거의 없을 것이다. 딸을 주고 그런 사내를 얻는 것은 영주에게 큰 이득이었다.
“조심해서 다녀와요.”
옷을 다 입은 에린이 다가와 휴반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걱정 마, 어떤 자도 날 이길 수 없으니까. 베일 가문 대공의 머리를 잘라 결혼식 선물로 당신의 아버지께 바칠 거야.”
“아버지도 기뻐하실 거예요.”
벨피타 영주는 ‘사자 동맹군’의 일원이었다.
사자 동맹군은 베일 가문에서 내분을 일으킨 대공의 사촌들을 지원하기 위해 모인 영주 세력들의 명칭이었다.
대공과 적대적인 많은 영주들이 사자 동맹군 안에 그들의 군사를 대거 파견한 상태였다. 휴반트는 뒤늦게 그 동맹군에 투입될 상황이었다.
“다녀올게.”
영주의 딸과 짧은 포옹을 한 그는 3층 테라스에서 몸을 날렸다.
정원에 대기 중인 말에 올라탄 그는 말고삐를 옆으로 돌리며 말의 허리를 찼다.
준수한 흑마가 크게 울부짖으며 정원을 벗어나 성문이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질주했다.
성문 밖엔 깃발을 든 수백 명의 기마병들이 도열한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
휴반트가 앞으로 치고 나가자 도열해 있던 기마병들이 일제히 그의 뒤를 따라 이동을 시작했다.
휴반트의 기세 때문인지 몰라도 수백의 기마병들이 마치 수만 명은 되어 보였다.
톨리핀의 집에 동료들이 모두 모이자 도현은 바크 드라모스와 있었던 일을 설명해 갔다.
용의 검을 막아 내고 빠른 발을 이용해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는 대목에서는 다들 감탄하는 눈빛을 보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가 마법을 사용했다면 저는 버틸 수 없었을 테니까요.”
“검은 용도 설마 했겠지. 네 검술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을 거야. 아무튼 대단해. 근데 그 용 너무하는 거 아냐?”
짐브리오는 용의 집요함에 치를 떨었다. 고대 성주의 영혼을 해방시켰다고 도현을 죽이려 찾아오다니, 그것도 수천 년 전의 일인데.
“여자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성에 저주를 걸어 성주와 수만 명의 사람들을 다 괴물로 만들어 버렸을까.”
용의 사연을 알게 된 리타는 용이 안됐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러자 리드만 사제가 헛기침을 하며 나섰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짓은 용납할 수가 없지. 수많은 사람에게 수천 년간 고통을 주다니.”
리드만 사제는 당시 사람들이 신녀를 화형시킨 일은 잘못 된 거라고 봤지만 검은 용의 행동도 너무 지나쳤다고 봤다.
“그런데 그는 왜 자네를 집에 초대했나? 자넬 죽이려 찾아왔다면 굳이 그럴 이유가 없잖은가?”
어베인이 촛불 너머 도현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나도 그게 좀 이상했어. 자신의 집을 자랑할 이유도 없을 테고.”
영주 딘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된 건가, 도현?”
“그게 말입니다…….”
도현은 탁자 주위에 몰려 있는 동료들의 얼굴을 한 명씩 쳐다봤다. 어베인과 짐브리오, 로나, 딘, 리드만 사제, 리타, 그리고 약초 노인 톨리핀까지.
생사를 함께한 믿을 만한 사이로, 마음속에 영원한 친구들로 남을 사람들이었다. 이계를 떠나 지구로 돌아간다 해도.
‘이제는 진실을 말해 줘야 될 때인가.’
바크 드라모스와의 일을 정확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이쪽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줘야 한다.
물론, 얼버무리고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능사는 아니었다. 언제고 이들에게만큼은 자신이 누구고 왜 여기에 오게 됐는지 알려 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것이 이계에서 맺은 친구들에 대한 예의고 사랑이었다.
그 시간이 목전에 다다랐음을 도현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이 그 순간이야.’
도현은 바로 옆에 앉은 리타의 눈을 보며 조용히, 그러나 늘어지지 않으면서도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적당한 목소리로 자신이 어디에서 오게 됐는지 얘기를 시작했다.
뜻밖의 이야기에 방 안의 사람들은 용의 이야기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은 얼굴로 도현을 응시했고, 어느 누구도 그의 말을 중도에 끊지 않았다.
도현의 이야기는 길었다. 마치 자신의 자서전을 읽는 것처럼 그는 지구라는 세상과 그 속에서 자란 자신의 성장기, 호검술 도장과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태선군과의 은원, 조 박사의 차원 이동 장치와 문양, 스톤 사이의 관계, 도장에서 그를 기다리는 도장 식구 등을 설명하고 소개했다.
긴 이야기가 끝난 후 도현은 차분한 눈빛으로 사과를 했다.
“늦게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음…… 아니네. 굳이 사과할 일은 아니지. 자네가 우리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하지만 정말 이렇게 놀라 보긴 평생 처음이네. 자네가 바크 드라모스처럼 이계에서 넘어온 존재라니.”
어베인은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어렵게 말을 꺼냈다. 다른 사람들 역시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도현이 이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한동안 정적이 흐른 후, 사람들은 조금씩 활기를 되찾아갔다.
“어쩐지 넌 좀 이상했어. 그래도 난 네가 좋다, 흐흐흐.”
충격에서 벗어난 짐브리오는 술잔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렸다.
“이계에서 왔든 어쨌든 그게 뭐 중요하오? 지구에서 넘어 온 우리 도현을 위해 다들 건배합시다!”
“맞아요! 얼마나 흥미로워요? 이제 우린 진짜 도현을 알게 됐잖아요!”
리타는 도현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라요. 이 세상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어 바보 같았죠. 그럴 만했어요.”
미소를 지은 로나는 도현의 붉어진 얼굴을 보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아버지 복수 대상이 그쪽 세상에 있었군. 꼭 처단하길 바라네.”
어베인은 도현과 시선을 교환하며 잔을 들었다.
“지구엔 더 이상 영주가 없다니, 대체 그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영주 딘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현이 태어난 세계가 바로 우리 미래일지도 모릅니다, 영주님. 일곱 신 앞에선 모두가 평등한 존재지요. 도현, 우리가 만난 건 일곱 신의 안배라네. 난 그렇게 믿네.”
리드만 사제와 영주까지 한마디씩하며 술잔을 들자 남은 사람은 이제 약초 노인 톨리핀뿐이었다.
“난 별로 할 말은 없고. 딱 하나가 궁금할 뿐이네. 자네가 지구라는 세상으로 가면 이쪽 세상이 멈춘다고 했는데, 그동안 난 세상이 멈춘다는 느낌은 받아 본 적이 없어. 정말 세상이 멈춘 게 맞는가?”
민감한 질문이었다. 도현은 술잔을 들고 앉아 있는 동료들을 둘러보며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전했다.
“미약한 저 같은 존재가 어떻게 이런 큰 세상을 영원히 멈추게 하겠습니까? 아마도 이것은 차원 이동을 하며 벌어진 일시적인 현상일 거라고 봅니다.”
-신비로운 현상이지.
자수정 속 락제프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신비로운 현상이죠. 여러분의 세상은 저와는 관계없이 결국 어느 순간 정상적으로 다시 움직이게 될 겁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맞는 말이네. 일곱 신은 세상을 조화롭게 만들지.”
리드만 사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약초 노인에게 말했다.
“톨리핀, 세상이 멈출 걱정은 말고 그냥 살면 됩니다.”
“험, 알겠습니다, 리드만 사제.”
도현은 모든 사람들이 술잔을 들며 자신을 쳐다보자 마지막으로 그도 잔에 술을 채웠다.
숨겨 둔 비밀을 말하자 그 자신도 속이 시원했다. 동료들과 한층 더 친밀해진 느낌도 들었다.
“사랑합니다, 여러분.”
“사랑? 낯간지러운데? 푸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짐브리오를 따라 여기저기서 웃음꽃이 피어났다.
건배를 한 사람들은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미처 물어보지 못한 지구란 곳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고, 도현은 그들의 호기심을 채워 주기 위해 입이 아프도록 계속 말을 해야만 했다.
“자 자, 그만 물어보고 일단 바크 드라모스 얘기 먼저 마저 들읍시다.”
보다 못한 영주 딘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가볍게 치며 사람들의 질문을 막았다.
방 안이 조용해지자 도현은 겨우 숨을 돌릴 여유가 생겼다.
“바크 드라모스는 한눈에 제가 차원 이동을 해 온 것을 알아봤습니다. 그것에 흥미를 느꼈는지 절 바로 죽이려 하지 않고 집으로 데리고 간 것이죠. 그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요.”
“그렇게 된 거였군. 다른 일은 없었나?”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느슨하게 말을 하던 도현의 표정이 약간 팽팽해지자 덩달아 사람들도 긴장을 했다.
“무슨 일?”
짐브리오가 굵은 목소리로 물었다.
“용과 거래를 했습니다.”
“거래?”
도현은 아침 식사를 하며 바크 드라모스와 주고받았던 베일 가문의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이런 음흉한 용을 봤나!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억지로 네게 일을 떠넘긴 게 아냐? 누가 그 상황에서 싫다고 하겠어, 거부하면 죽일 텐데. 못돼 처먹은 더러운 용 같으니라고.”
짐브리오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자 커다란 탁자가 들썩였다.
“거래라면 주고받는 것. 용에게서 무엇을 받기로 하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는가?”
어베인의 물음에 도현은 딘과 리드만을 보며 답했다.
“폭주를 해결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정말인가!”
리드만 사제가 벌떡 일어났다.
“네. 저와 영주님, 둘 다 말입니다.”
“음.”
딘은 기뻐하는 대신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며칠 전 도현과 리타가 카샨을 잡으러 간 사이 정보 상인이 운영하는 집을 다녀온 어베인과 짐브리오는 북부 대륙의 정세를 파악해 왔다. 그 주된 이야기는 베일 가문의 내분에 따른 전쟁의 내용이었다.
“베일 가문의 대공을 돕는 게 쉽지 않아…… 단순히 베일 가문만의 싸움이 아니라 많은 영주들이 그 전쟁에 참여하고 있거든. 대공을 돕는다는 것은 그들 모두와 싸워야 한다는 이야기도 돼.”
딘은 양 갈래로 기른 콧수염을 훑으며 도현에게 강한 눈빛으로 물었다.
“혹시 나 때문에 용과 거래를 한 건 아닌가?”
“아닙니다. 바크 드라모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폭주의 위험성을 경고했습니다. 해결치 않으면 언제고 비참하게 될 거라고요. 기회가 왔을 때 폭주를 해결해야겠다는 결심이 그때 섰습니다. 마음 한구석에 늘 폭주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으니까요.”
탁자 주위에 몰려 앉은 사람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용의 경고는 함부로 무시하기엔 그 무게감이 남달랐다. 도현의 선택이 바크 드라모스의 강압에 의해서만은 아니라는 걸 그들도 느끼게 된 것이다.
“영주님과 저, 둘 다 폭주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아, 자넨 날 여러 번 감격시키는군. 용 앞에서도 날 생각해 주다니.”
영지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신세인 그는 도현의 마음 씀씀이가 여간 고마운 게 아니었다.
“좋네. 이유야 어찌 됐든, 대공의 전쟁에 우리 발을 걸쳐 보세. 쉽진 않겠지만 말이야.”
새 영지를 구하는 일은 더 이상 우선 사안이 아니었다.
베일 가문의 대공이 전쟁에서 승리하게끔 돕는 게 먼저였다.
브링틱 성의 여관방에 누워 있던 칼라치는 윌벤슨이 들어오자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디언은 어디 갔나?”
“옷을 사러 갔소.”
의자엔 앉은 윌벤슨은 침대에 걸터앉은 칼라치를 지그시 쳐다봤다.
죽음의 엘바가 주는 고통을 극복하고 그 힘을 얻은 사내다. 그 용감함이 세상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진정한 사내였다.
“이디언은 진정으로 자넬 좋아하는 것 같더군. 차가운 그녀가 이렇게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어.”
“나 역시 그녀에 대한 마음은 다를 바 없소.”
“그리 보이네. 아주 아름다운 한 쌍이야, 허허.”
한차례 마른 웃음을 흘린 윌벤슨은 허리를 약간 굽히며 칼라치에게 물었다.
“그래, 생각은 해 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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