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 디 임팩트 18권 9화
“아직 결정짓지 못했소.”
“자네에겐 좋은 기회네. 이런 혼란기가 아니면 어떻게 영주가 돼 보겠는가?”
어젯밤 윌벤슨은 칼라치에게 베일 가문의 대공을 위해 싸우자고 제안했다.
적발 거한 칼라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앉아 있는 윌벤슨의 앞에 섰다.
신장이 커서 그의 머리가 여관의 천장에 닿을락 말락 했다.
“아침에 헬구스와 정보 상인을 만나고 왔소. 지금 대공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고 하던데, 내가 왜 그를 위해 싸워야 합니까?”
“보상이란 원래 약한 쪽에 붙을수록 커지는 법이네. 사자 동맹군에 붙어 봐야 용병 취급이나 당하며 푼돈이나 만지고 말겠지. 하지만 대공을 도우면 훗날 자네에겐 영지가 내려질 수도 있어.”
윌벤슨은 말을 끊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앞에 서 있는 칼라치의 몸이 부서지지 않는 철벽처럼 느껴졌다.
“이보게, 칼라치, 전장의 상황은 언제든지 뒤바뀔 수가 있는 거야. 자네 같은 사람이 대공을 돕게 된다면 말일세. 나와 함께 밀튼 영주 밑에서 대공을 도우세.”
밀튼은 윌벤슨과 친분이 깊은 영주로, 베일 가문의 대공 측에 서서 사자 동맹군과 싸우고 있었다.
“윌벤슨, 사실 난 이해할 수 없소. 왜 뜬금없이 저들의 싸움에 끼어들려는 거요? 당신은 평생 스므차를 죽이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소? 한번 패했다고 이제 스므차는 포기한 거요?”
“이런, 자네 아직 모르고 있군. 하긴, 쉬쉬하고 있으니 그 정보가 아직 떠돌진 않고 있겠지.”
“뭘 말이오?
“스므차는 죽었네.”
칼라치의 몸이 순간 휘청거렸다.
“그가…… 죽었다고?”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네. 다크캐슬에 심어 놓은 내 첩자가 얼마 전에 알려 왔네.”
“그는 어떻게 죽었소? 병으로? 아니면 무슨 이유로?”
“자네 얼굴이 창백해졌군. 괜찮은가?”
“묻는 말이나 대답하시오!”
칼라치는 분노하고 있었다. 술집 여자인 어머니의 배 속에 자신을 잉태시켜 놓고 그는 거들떠도 안 봤다. 시궁창 같은 어린 시절의 삶은 온통 스므차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점철되어 있었다.
언젠가 스므차를 패배시키고 당당하게 자신이 누군지 밝히리라 맹세했는데, 이렇게 죽어 버리다니.
이 가슴에 맺힌 한과 어머니의 절규를 어디 가서 토하겠는가.
눈의 실핏줄이 터져 눈물과 핏물이 뒤섞여 흘러내리는 모습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칼라치, 스므차에 대한 자네의 원한이 이리 깊은지 몰랐군. 진정하게, 비록 자네 손으로 죽이진 못했지만 그는 통쾌하게 죽었다고 하니까.”
윌벤슨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칼라치가 스므차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그는 그저 칼라치의 승부욕이 지나치다고만 생각했다.
“그는 어떻게 죽었습니까?”
눈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을 닦아 내며 칼라치가 재차 물었다.
“스므차의 저택에서 일하는 내 첩자에 의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침입해 스므차와 검을 겨룬 끝에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는군. 스므차를 보호하던 친위대들도 상당수가 죽었고.”
놀라운 얘기였다.
스므차를 죽일 정도면 그 실력이 대륙을 뒤흔들 수준일 것이다.
“대단한 강자가 스므차를 죽인 것 같네. 스므차는 괴물 같은 놈이었는데 말이야.”
병으로 죽은 것도 아니고 패해서 죽었다는 말에 칼라치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우뚝커니 서 있던 칼라치는 입을 느리게 열었다.
“스므차를 누가 죽였는지 전혀 단서도 없소?”
“글쎄……. 내 첩자가 그날 저택을 빠져나가는 그자의 옆모습을 보긴 했다는데, 그게 어두워서 말일세. 가면 같은 걸 착용했다고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도 정확히 뭘 봤는지 모르더군.”
“가면?”
너무 피상적이었다.
“아무튼 스므차가 죽었으니 내가 더 이상 다크캐슬에 신경 쓸 이유가 사라졌지 뭔가.”
기분 좋게 웃은 윌벤슨은 탁자 위의 주전자를 기울여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그래서 친분이 있는 밀튼을 돕기로 했네. 그는 다크캐슬에서 전쟁을 일으키려는 날 은밀히 돕기도 했거든. 그에 대한 보답이라고 할까, 뭐 그런 것이지, 하하하!”
칼라치는 크게 웃고 있는 윌벤슨의 머리를 박살 내고 싶었다. 그뿐만 아니라 방 안에 모든 물건들을 다 파괴하고 싶었다.
끓어오르는 파괴 본능을 가까스로 잠재운 그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이제 이해가 됐나, 내가 왜 밀튼을 도와 베일 가문의 내분에 참전하게 됐는지?”
칼라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도 말했지만 대공을 지지하는 밀튼 영주를 돕다 보면 자네 앞으로 작은 영지가 생길 수도 있네. 이디언을 사랑한다고 그랬지? 그녀를 위해서라도 자네도 보금자리를 만들 필요는 있잖은가. 영주가 되면 더욱 좋을 노릇이고.”
“전쟁에서 패하면?”
“그땐 자네나 나나 떠나면 되는 것이네. 할 만한 싸움 아닌가?”
“할 만한 싸움…… 그렇군.”
스므차의 죽음 소식에 전신의 맥이 풀린 칼라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목표가 하나 사라지자 그 상실감이 주는 허무함은 칼라치도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였다.
“이디언이 돌아오면 다시 한 번 상의한 후에 결정하겠소.”
“기대하겠네.”
윌벤슨이 방을 나가자 칼라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버지는 죽었지만 가슴속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고 죽은 어머니만 자꾸 생각났다.
‘스므차가 죽다니, 아버지가 죽다니. 저주받을 스므차! 마지막까지 내게 기회를 안 주는구나. 지옥에서 영혼이 썩어 버려라!’
아버지를 원망하는 그의 얼굴에 눈물이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이 눈물은 당신을 위해서 흘리는 게 아니야. 비참하게 죽은 내 어머니와 나를 위해서 흘리는 거지. 잘 죽었다, 스므차. 잘 죽었어.’
어머니를 닮아 머리카락이 짙은 붉은색을 띤 적발 거한 칼라치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마음속 괴로움을 표출했다. 그러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는 서둘러 눈가의 눈물을 훔쳤다.
방문이 빼꼼히 열리며 뚱뚱한 헬구스가 얼굴을 내밀었다.
“거기 앉아서 뭐 하나?”
“생각.”
“생각?”
문을 닫고 들어온 헬구스는 의자에 앉지 않고 칼라치처럼 바닥에 앉았다.
“자네 울었나?”
“헛소리하지 마.”
“그렇지? 내가 잘못 봤겠지. 자네가 눈물을 보일 이유가 없지.”
칼라치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헬구스는 자신이 잘못 봤을 거라는 식으로 대꾸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을 하기에 표정이 그리 좋지 않은 건가?”
“스므차가 죽었다는군.”
감정을 수습한 칼라치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뭐? 그자가?”
깜짝 놀란 헬구스의 눈이 커졌다.
다크캐슬의 지배자가 갑자기 죽다니. 그는 나이는 많았지만 정정한 눈빛과 체력으로 지난번 다크캐슬 전쟁 때 윌벤슨의 부하들과 구역장들을 삽시간에 도륙 내 버린 강자였다. 아무리 강자라도 세월이 흐르면 육체가 노쇠하고 기력이 약해지는 법인데, 스므차는 여전했던 것이다.
그런 사람이 죽었다고 하니, 헬구스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해?”
“윌벤슨.”
칼라치는 조금 전 윌벤슨이 말해 준 스므차의 죽음을 설명해 주었다.
“잘됐군, 어차피 자넨 그를 싫어했잖은가?”
“내 손으로 그를 잡았어야 했어.”
칼라치의 말에 헬구스는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자넨 스므차와 싸우고 싶어 했지. 그래서 이렇게 넋 나간 얼굴로 앉아 있던 겐가? 아쉬워서?”
“…….”
칼라치는 대답이 없었다. 헬구스는 그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마시다 만 술이 좀 남았을 텐데…… 여기 있군.”
방 한쪽에 있는 술병을 찾아낸 그는 술 한 모금을 마신 후 술병을 통째로 칼라치에게 건넸다.
“어찌할 생각인가? 윌벤슨이 조금 전에 다녀간 이유는 뻔해 보이는데.”
헬구스는 베일 가문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술병을 기울여 벌컥거리며 술을 마신 칼라치는 잠시 뜸을 들이다 답했다.
“이디언만 반대하지 않으면 베일 가문의 전쟁에 참전할 생각이네.”
“하아, 씨드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데, 이번엔 전쟁터에 간다고?”
“어차피 갈 곳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용병으로 어느 놈 밑에 가서 일을 해 주느니, 윌벤슨과 함께 크게 활약하는 게 낫겠지. 전쟁에서 승리하면 윌벤슨의 말대로 영주가 될 기회가 생길 수도 있고.”
헬구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칼라치는 마음이 굳어진 것 같았다.
“자넨 어쩔 생각인가, 나와 이디언이 윌벤슨과 함께 움직인다면.”
“별수 있나, 나도 따라가야지. 혼자는 너무 외로워.”
헬구스는 투덜대며 방을 나가려 했다. 그때 술병을 들고 일어선 칼라치가 헬구스의 등을 보며 물었다.
“도현이 씨드를 얻은 것 같진 않았나?”
어깨가 살짝 흔들린 헬구스는 고개를 돌려 칼라치를 응시했다.
“그,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는 이디언을 구해 주고 망각의 숲으로 곧장 사라졌으니까.”
“거인의 섬에 있는 씨드를 노리고 얼음탑주와 율리비어스, 쌍둥이 검객,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도현까지 나타났어. 과연 가라앉은 그 섬에서 그들 중 누가 씨드를 차지했을지 몹시 궁금해.”
아직 이들은 얼음탑주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을 일일이 만나 확인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알겠나? 섬이 빠르게 가라앉는 통에 씨드가 사라졌을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럴 수도 있겠지.”
칼라치는 도현이 그 자리에 나타난 게 너무 의외여서 의심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넨 도현과 가까운 사이였나?”
문득 물어보는 칼라치의 눈길을 슬며시 피한 헬구스는 방문을 열고 나가며 말끝을 흐렸다.
“그다지…….”
다시 방 안에 혼자 있게 된 칼라치는 침대에 벌렁 누워 천장을 올려다봤다.
‘누굴까, 스므차를 죽인 자가?’
도현과 일행은 베일 가문의 대공을 돕기 위해 그가 머물고 있다고 알려진 붉은 성으로 갈 계획을 잡았다.
강력한 무력을 가진 도현이라 할지라도 이 넓은 대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베일 가문의 전쟁에 일일이 개입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돌아가는 정세에 맞춰 핵심적인 전장에 참여해 대공에 반기를 든 반란군과 그를 지원하는 사자 동맹군을 붕괴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공의 사령탑이 있는 붉은 성으로 가서 적절한 정보를 얻고 때에 따라선 지시를 받는 게 필요하다.
대공의 숙부인 돈조르니 베일도 그곳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붉은 성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배를 타고 항구도시 누마까지 간 다음, 그곳에서 육로를 이용하는 것이네.”
어베인은 커다란 지도를 펴 놓고 손가락으로 항구도시 누마를 짚었다.
“누마까지는 배로 얼마나 걸립니까?”
탁자 위의 지도에 시선을 둔 도현이 물었다.
“중간에 배를 갈아타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대략 8일 정도. 하지만 날씨나 배 사정에 따라 조금 더 걸릴 수도 있겠지.”
“길게 잡으면 10일 정도군요.”
도현의 시선이 항구 도시 누마에서 내륙 쪽에 위치한 붉은 성으로 옮겨 갔다. 어베인이 별도로 지도 위에 표시한 지점이었다.
“누마에서 붉은 성까지 가는 길도 쉽지 않겠군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전쟁터니까.”
같이 지도를 내려다보던 영주 딘이 대꾸했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정말 치열한 싸움이 될 거야. 지는 쪽은 많은 걸 희생해야 할 테니까.”
“수십 명의 영주 목이 달아나는 거지.”
짐브리오가 자신의 목을 손날로 그었다.
“그럼 영주들이 많이 바뀌겠네?”
리타가 과일을 먹으며 지도에 그려진 많은 영지들에 눈독을 들였다.
“당연하지. 대공이 승리하면 반란을 일으킨 대공의 사촌들은 물론이고 지지하던 사자 동맹군 소속의 영주들도 칼날을 피할 수 없게 되니까.”
“전쟁에서 이기면 우리도 땅을 주면 좋겠다. 영주님이 새 영지가 필요하잖아.”
“혹시 모르지, 도현의 활약을 보고 대공이 챙겨 줄지.”
짐브리오가 말을 하며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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