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 디 임팩트 18권 10화
일행은 붉은 성으로 가는 계획을 조금 더 논의한 뒤 내일 산을 내려가기로 했다.
“그나저나 도현이 우리 세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
도현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짐브리오가 아쉬운 눈빛으로 말했다.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도현은 그가 머물 수 있는 시간이 길어야 9개월 정도라고 설명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우울한 소식일 수밖에 없었다.
“미완성 마법진을 완성시키면 그가 우리 세계에 계속 있을 수 있을지도 몰라.”
리타가 말했다.
“하지만 누가 그걸 완성시키겠어? 율리비어스? 그자는 도현을 절대 도우려 하지 않을 텐데. 그리고 좀 불안하잖아, 그 새낀. 지난번 거인의 섬 사건을 보라고. 섬을 가라앉게 했잖아. 오히려 도현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고.”
짐브리오는 율리비어스를 믿지 못했다.
“락제프 님, 락제프 님의 능력으로도 저 미완성 마법진은 완성시킬 수 없는 겁니까?”
영주 딘이 묻자 락제프는 못한다고 딱 잘라 말했다.
현재로선 마법학의 대가인 율리비어스가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미완성 마법진을 완성시켜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분위기가 계속 가라앉자 로나가 박수를 치며 크게 말했다.
“자, 웃어요. 도현과 함께하는 동안은 즐겁게 보내자고요. 내가 아플 때도 그렇게 해 줬잖아요. 안 그래요?”
“맞아! 도현이 지구에서 그 스톤인지 뭔지를 또 구해서 우리를 만나러 올 수도 있잖아! 난 그럴 거라고 믿어.”
그새 눈물이 맺힌 리타가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그녀는 내색하진 않았지만 도현이 이계에 영원히 머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했을 때 속으로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 도현은 그녀에게 구원자이자 가족이자 모험을 함께할 친구였기 때문이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볼일을 보고 돌아온 도현이 뭔가 이상한 느낌에 방 안을 둘러보며 묻자 사람들은 딴청을 부렸다.
“일은 무슨.”
도현은 짐작되는 일이 있었지만 더 깊게 묻지는 않았다.
“보여 줄 게 있습니다.”
마법 주머니를 꺼낸 그는 방 안에 보물 상자를 내놓기 시작했다.
약간 어둡고 칙칙했던 통나무집 안의 분위기가 뚜껑이 열린 보물 상자에서 뿜어져 나온 휘황찬란한 광채로 인해 사뭇 달라졌다.
“이게 다 뭐야? 웬 보물이야?”
“바크 드라모스의 보물 창고에서 가져온 겁니다. 선물로 주더군요.”
“선물? 이게 다?”
사람들은 도현이 마법 주머니에서 꺼낸 수십 개의 보물 상자 사이를 돌아다니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고대의 장신구부터 수백 년 전, 어느 왕국에서 유행하던 보석 갑옷까지 다양한 종류의 보물들이 상자 안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었다.
“귀걸이도 있어.”
리타는 값진 보석이 박힌 아름다운 귀걸이를 귓불에 대며 좋아했다. 그녀의 손목과 목에는 이미 호화로운 팔찌와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이건 암살자들이 보물로 여기는 고대의 단검!”
짐브리오는 보물 상자 안에 거꾸로 박혀 있는 단검을 꺼내 손잡이 부분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러자 단검의 날이 십여 개로 분리되며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나무 벽에 박혔다.
“흐흐흐, 소문만 나돌던 실물을 여기서 보다니.”
짐브리오가 단검 손잡이를 몸 쪽으로 당기자 벽에 박혔던 단검의 날이 소리 없이 합해지며 단검 손잡이에 제자리를 잡았다.
다양한 보물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보물 상자 위에 걸터앉아 있는 도현에게 다가갔다.
“축하하네, 자넨 엄청난 부자가 됐군.”
어베인이 웃으며 말했다. 모험가이자 도둑인 어베인은 이렇게 눈부신 보물들을 한꺼번에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것에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보물은 나눠야죠.”
“아니네, 용이 자네에게 준 선물이야.”
“그래도 그러는 게 아니죠.”
도현은 깔고 앉아 있던 보물 상자 위에서 내려왔다. 그 안에는 샤닐의 뿔이 백여 개도 넘게 쌓여 있었다.
그것을 본 리타의 눈이 커졌다.
“이건 샤닐의 뿔이잖아!”
“리타, 이걸로 마법 주머니를 만들어서 동료들에게 하나씩 나눠 줬으면 좋겠는데.”
마법 주머니 한 개를 만들기 위해선 최소한 샤닐의 뿔 열한 개가 필요하다.
그동안 샤닐의 뿔이 부족해서 도현과 리타를 제외하곤 마법 주머니를 소유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신기한 마법 주머니를 동료들도 하나씩 소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얼른 만들어 줘.”
짐브리오는 침을 꿀꺽 삼키며 리타를 쳐다봤다.
“가만히 좀 있어 봐. 자꾸 보채면 안 만들어 줄 거야.”
보물 상자로 인해 좁아진 방 한구석에 마법진을 그린 리타는 그 주위에 열한 개의 샤닐의 뿔을 배치한 후, 락제프에게 배운 마법어를 발동시켰다.
부르르 떨리던 샤닐의 뿔이 허공으로 천천히 떠오르며 영롱한 푸른 빛을 발산했다.
그 빛이 한데 모여 마법진 안에 서 있는 리타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번개가 치듯 번쩍거리는 빛은 리타의 손에서 서서히 가죽 주머니 형태로 변화해 갔고, 잠시 후 파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샤닐의 뿔이 가루로 변했다.
“짠! 마법 주머니 3호 완성!”
리타는 자신이 만든 마법 주머니를 흔들었다.
뒤이어 그녀는 몇 개의 마법 주머니를 연속해서 더 만들었다.
“다 됐어.”
도현은 리타가 만든 마법 주머니를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 줬다.
“이걸 감히 내가 받을 자격이 있나 모르겠군.”
약초 노인 톨리핀이 머뭇거리자 도현은 직접 그의 손에 마법 주머니를 쥐여 줬다.
“지금 받지 않으면 후회하실 겁니다. 세상에서 이 주머니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여기 있는 리타밖에 없으니까요.”
“어서 받으세요. 로나를 구해 주셨잖아요.”
리타가 웃으며 하는 말에 톨리핀은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마법 주머니가 내 손아귀에 들어왔군. 고맙다, 도현. 정말 갖고 싶었는데.”
짐브리오는 마법 주머니를 받고 싱글벙글이었다.
어베인이나 딘, 리드만, 로나도 뜻밖의 선물에 기뻐하긴 마찬가지였다.
마법 주머니는 돈이 있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오로지 락제프로부터 마법을 전수받은 리타만이 구사할 수 있는 마법과 샤닐의 뿔이 있어야만 한다.
사람들이 고마워하자 도현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보물 상자가 많습니다. 원하시는 걸로 하나씩 가지고 가십시오.”
“이것만 해도 족하네.”
사람들은 사양했지만 도현은 그들에게 보물 상자를 하나 씩 챙겨 줬다. 방 안에 있는 동료들에게 보물 상자를 하나씩 나눠 줘도 남은 보물 상자의 수가 스무 개가 넘었다. 지구에서 이 보물들을 처분하면 얼마가 될지 상상이 안 될 정도로 여전히 많은 양이었다.
리타에게 마법 주머니 사용 방법을 교육받은 그들은 보물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넣었다 뺏다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한쪽에 서서 지켜보던 도현은 리타에게 질문했다.
“지구의 물건은 마법 주머니 안에 들어가지 않았거든. 방법이 없을까?”
“음,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고개를 갸웃한 리타는 락제프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가 수천 년간 자수정 속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깨달아 만든 것이 현실의 부피와 무게에 상관없이 물건을 보관하는 마법 주머니이기 때문이다.
“스승님, 도현의 말 들으셨죠? 왜 마법 주머니에 그곳의 물건들을 집어넣을 수 없는 거예요?”
-마법 주머니는 만들어지는 순간, 이 세상의 물건에 반응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 지구의 물건에 반응을 안 하는 건 당연하다.
“해결책은요?”
-없다. 그냥 있는 대로 사용해.
락제프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리타는 도현을 돌아봤다.
“안 되나 봐.”
“어쩔 수 없지.”
도현은 지구에 있는 홍영과 용주, 장철호에게도 마법 주머니를 선물로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구에서 마법 주머니는 그곳의 물건들을 새롭게 넣거나 뺄 수 없는 반쪽짜리 물건에 불과했다.
‘그래도 만들어서 가지고 가 볼까? 이계의 보물이라도 넣다 뺐다 할 수는 있잖아. 나중에 보물을 처리할 때도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할 수 있고. 보관하기도 용이하고.’
도현은 남은 샤닐의 뿔을 보물 상자에서 꺼냈다. 몇 개는 더 만들 양이 됐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또 다른 의문점이 떠올랐다.
‘홍영 씨나 용주가 지구에서 각인을 할 수 있을까?’
마법 주머니를 사용하기 위해선 먼저 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서 각인을 해야 한다. 마법 주머니는 최초의 주인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법 주머니의 각인은 아무런 제한 조건이 없다. 아마 될 것이다.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락제프의 긍정적인 대답에 힘입어 도현은 남은 샤닐의 뿔을 이용해 지구에 가지고 갈 마법 주머니를 만들었다.
바람이 조금씩 불 때마다 통나무집 앞에 피워 놓은 모닥불의 불꽃들이 좌우로 춤을 췄다.
내일 산을 내려가기로 한 사람들은 모닥불에 구워지는 고기를 안주 삼아 이곳에 남을 톨리핀과 이별주를 마시고 있었다.
“함께 가자는 말은 못 하겠소. 전쟁터라서 위험하기도 하고.”
짐브리오의 말에 톨리핀은 주름 가득한 미소를 만들었다.
“내가 짐이 될까 그런 건 아니고?”
“험, 어찌 아셨소? 아무튼 신세를 참 많이 졌소.”
“신세는. 감옥에 갇혀 있던 나를 구해 주고, 씨드 나무라는 귀한 물건을 약재로 사용해 볼 수 있게 기회를 주기도 했는데, 내가 오히려 고맙지.”
톨리핀은 모닥불 맞은편에 앉아 있는 도현을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였다.
“내가 죽기 전에 또 볼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만나서 정말 반가웠네.”
“저 역시 그렇습니다.”
담담히 미소를 지어 보인 도현은 들고 있던 술잔을 천천히 기울였다.
모닥불이 점점 작아지자 술을 적당히 마신 그들은 자리를 정리한 후 집으로 들어갔다. 톨리핀의 집에서 갖는 마지막 밤이었다.
침대가 부서져라 짐승처럼 뜨겁게 사랑을 나눈 칼라치와 이디언은 땀이 범벅이 된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들은 사랑을 나눌 때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서로의 육체를 탐했다. 그것이 이들의 사랑 방식이었다.
“당신, 힘들어 보여요.”
침대 위의 이디언은 안대를 한 칼라치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긴 손가락으로 도현의 검에 찔린 눈의 상처를 어루만진 그녀는 그의 눈에 입맞춤을 했다.
“스므차가 죽어서 그래요? 그만 잊어버려요. 죽은 자는 기억해서 뭐해요.”
“그는 내게 조금은…… 특별한 자라서.”
무거운 칼라치의 목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어떤 면에서요?”
“오래전부터 그자의 강함을 동경했다고나 할까.”
이디언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상체를 조금 세워 칼라치를 내려다봤다.
다크캐슬에서 스므차에게 죽을 뻔한 일에 대한 복수심을 갖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동경이라니.
“스므차를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던 거예요?”
“나름 유명한 자니까…….”
“몰랐어요. 당신은 그를 싫어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건 그를 좋아하고 싫어하고의 문제가 아니야. 그는 내가 뛰어넘을 존재였다는 말이지. 그런 그가 죽어 버렸어.”
허무함이 깃든 칼라치의 말에 이디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칼라치는 철로 만든 방패처럼 늘 강인한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철이 아닌 조잡한 나무 방패를 들고 허허벌판에 서 있는 사내 같았다.
진한 외로움과 나약함이 그로부터 풍기자 이디언은 당혹했다. 스므차의 죽음에 칼라치가 이렇듯 큰 영향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말없이 칼라치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가 말했다.
“우리 윌벤슨을 따라가요.”
“갑자기 왜 생각이 바뀐 거요? 아까 당신은 부정적으로 말했는데.”
옷을 사서 돌아온 그녀에게 윌벤슨과 합류하는 게 어떠냐고 했을 때 이디언은 간접적으로 거부했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은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잘못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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