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 디 임팩트 18권 11화
“날?”
칼라치는 상체를 일으켜 이디언을 응시했다. 그녀는 또박또박 말했다.
“조용한 곳에서 당신과 지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작은 용병 일을 해 주고 돈을 벌거나 아니면 사냥꾼으로 살거나.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 말이에요. 하지만 내가 잘못 봤어요.”
침대에서 내려와 겉옷을 걸친 그녀는 여관 방 한쪽에 놓인 칼라치의 거대한 철 방패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당신은 전사예요. 싸움터에서 그 빛을 발하고 생기가 넘치는 사람. 싸움이 없는 곳에서 지내면 당신은 오래 살지 못할 거예요. 그럼 나 역시 불행해질 테고.”
“이디언, 그렇지 않소.”
칼라치는 부정했다.
“아니요! 당신은 그렇게 될 거예요. 내 앞에 그런 미래가 보여요.”
마법사인 이디언이 목소리를 높이자 방 안의 촛불들이 바람도 없는데 꺼질 것처럼 크게 요동쳤다.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곳은 전쟁터가 될 거예요. 영원히, 늙어 죽을 때까지.”
그녀는 들고 있기 버거울 정도로 무거운 거대한 철 방패를 침대에 앉아 있는 칼라치에게 힘주어 던졌다.
“그러니까 스므차는 잊고 새롭게 등장할 적들에게 집중해요. 그들의 뼈와 피를 즐겨요.”
한 손으로 가볍게 방패를 받아 든 칼라치는 무거운 얼굴로 침대를 내려와 이디언 앞에 섰다.
“진심이오?”
“그래요, 진심이에요. 조용한 삶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우리는 죽을 때까지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 노를 저으며 살 운명이에요. 아름답지 않아요?”
“미쳤군.”
칼라치는 폭발적인 야성미를 뿜어내며 거칠게 이디언을 끌어안았다. 격정적인 입맞춤을 하는 그들의 귀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칼라치, 안에 있나?”
윌벤슨의 목소리였다.
이디언과 떨어진 칼라치는 겉옷을 입은 후 한밤중에 찾아온 윌벤슨을 맞이했다.
“내가 방해를 한 것 같군.”
“이 시간에 무슨 일이오?”
“원로들의 허락이 떨어져 고대 병사들의 무덤에 갈 생각이라네. 같이 갈 텐가?”
“이 시간에 말이오?”
칼라치는 미간을 찌푸렸다.
“베르노프가 안달이 나서 말일세. 한시라도 빨리 가 보고 싶어 하네.”
칼라치는 윌벤슨과 베르노프가 어떤 목적으로 고대 병사들의 무덤에 가려는지 잘 알고 있었다. 금지된 소환술로 부하들을 만들려는 것이다.
“우리가 같이 가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이디언이 다가와 말했다.
“자넨 궁금하지 않나, 소환술사가 어떻게 죽은 자들을 부하로 만드는지. 같이 갈 생각이면 밑으로 내려오게, 마차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방을 나가던 윌벤슨은 문이 닫히기 전 칼라치에게 조용히 물었다.
“이디언과 상의는 해 봤는가?”
“우린 당신과 함께 베일 가문의 전쟁에 참여하기로 했소.”
“허허,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잘 선택했네. 전쟁이란 끝날 때까지 끝을 알 수 없는 거라네. 밀튼 영주와 함께 대공을 도와 보세.”
윌벤슨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얼마 후 여관에서 내려온 칼라치와 이디언은 마차에 올랐다. 마차 안에는 윌벤슨과 베르노프가, 마부석에는 작은 체구의 비버가 앉아 있었다.
칼라치와 이디언이 마차에 오르자 비버는 마차를 출발시키려 했다. 그 순간 헬구스가 급히 여관에서 뛰어나와 그 앞을 가로막았다.
히이이잉!
놀란 말이 앞발을 세우며 길게 울었다.
“잠깐! 나는 왜 빠트리고 가는 거야!”
헬구스는 마차 옆문을 벌컥 열고 머리를 집어넣었다.
“같이 갑시다, 윌벤슨. 다크캐슬에서 함께 싸운 형제를 이렇게 무시하기요?”
“자리가 없네.”
윌벤슨은 뚱뚱한 헬구스를 태울 생각이 없었다. 그가 타면 마차가 너무 비좁고 불편해진다.
“너무하는군. 딱 보니 고대 병사 무덤에 가려는 것 같은데, 나도 구경하고 싶다고.”
왕의 서자로 태어난 그는 왕위 계승 문제로 오랫동안 암살의 위협을 느끼며 살다 다크캐슬에서 자리를 잡아 구역장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윌벤슨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다크캐슬을 떠나야만 했다.
보금자리가 사라진 그는 이제는 될 대로 돼라는 식으로 칼라치와 돌아다니고 있었다.
딱히 삶의 낙이 없던 그는 죽을 때 죽더라도 일반인들은 경험해 보지 못한 신비로운 것들을 접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칼라치와 망각의 숲에 간 이유도 씨드를 지키는 거인들을 보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산처럼 거대하다던 거인들은 구경도 못 하고 호수에 빠져 죽을 뻔했다.
‘이대로 브링틱을 떠나면 섭섭하지. 고대 병사들의 무덤이라도 구경해야 해. 베르노프의 소환술도 지켜보고.’
헬구스가 기를 쓰며 마차에 타려 하자 윌벤슨이 혀를 찼다.
“자넨 체면도 없나? 그만 내리게.”
“그깟 체면 이미 다크캐슬에서 다 벗어던지고 왔소. 나도 좀 끼워 주시오. 이봐, 칼라치, 나 혼자 외롭게 여관에 버려둘 생각인가?”
칼라치는 윌벤슨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는 앞으로도 나와 함께 움직일 거요.”
“음, 자네 뜻이 그렇다면야.”
윌벤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비버가 앉아 있는 마부석을 언급했다.
“헬구스, 마부석으로 가게. 그렇다면 내가 허락을 하지.”
헬구스는 별말 없이 마부석으로 갔다. 그도 자신까지 마차 안에 타는 건 서로에게 불편한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비버, 출발해라.”
윌벤슨의 지시에 비버는 마차를 움직였다.
성의 북문을 통과한 마차는 한동안 잘 정비된 길을 따라 가다가 좁은 길로 들어섰다.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얼마간 들어간 끝에 마차는 ‘거룩한 고대 병사들의 무덤’이라고 쓰인 거대한 동굴의 입구에 다다랐다.
원로원으로부터 사전에 연락을 받아서인지 경비 책임자는 마차에서 내린 윌벤슨이 내민 출입 허가증을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들어갔다 언제 나올 겁니까?”
경비 책임자가 허가증을 돌려주며 물었다.
“해가 높이 뜬 낮까지는 안에 있어야 할 것 같소. 연구할 시간이 많이 필요해서.”
윌벤슨이 베르노프를 힐끔 쳐다보며 답했다.
“안에서 연구할 게 뭐가 있다고.”
혼잣말을 작게 중얼거린 경비 책임자는 부하들에게 손짓을 했다.
“길을 터라.”
그의 지시에 병사들은 동굴 입구를 지키는 거대 전투 몬스터들을 옆으로 물러나게 했다.
“들어가십시오.”
“고맙소.”
윌벤슨과 그 일행은 횃불을 손에 들고 목소리가 울리는 넓은 동굴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밖은 더웠지만 동굴 속은 시원함을 넘어 흰 입김이 나올 정도로 차가웠다.
“주인님,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 추워지는데요?”
작은 체구의 비버는 얇게 입고 온 옷차림을 후회하며 몸을 떨었다.
“고대 병사들의 유해에서 흘러나오는 냉기가 동굴을 차갑게 만드는 것이다.”
얼음산의 폭발로 한순간에 얼어서 매몰된 고대 병사들은 발굴되어 공기를 접하는 순간, 신기하게도 근육과 피부, 장기 들은 먼지처럼 사라지고 해골만 남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수만 구의 해골들을 동굴에 모두 모아 놓으니 얼음굴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고대의 죽음의 향기가 점점 강렬해지는군.”
베르노프는 음산하게 웃으며 코를 벌름거렸다.
몇 걸음 앞서가는 윌벤슨과 비버, 베르노프를 보며 헬구스가 속삭였다.
“칼라치, 고대 병사들은 얼마나 강할까?”
“홀로 수백 명의 병사들은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을 정도라더군.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고.”
마차 안에서 들은 얘기를 칼라치가 말해 주었다.
“오호, 생각보다 굉장하군.”
“얼마나 많은 고대 병사들이 소환술에 응답할지는 두고 봐야 할 거예요.”
칼라치의 옆에서 걷던 이디언이 흰 입김을 뿜어내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추위로 인해 다소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칼라치는 겉옷을 벗어 이디언의 어깨를 감쌌다.
“괜찮아요. 견딜 만해요.”
“그냥 걸치고 있으시오. 난 이깟 추위쯤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의 믿음직스러운 말에 이디언은 더는 거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동굴이 꽤나 깊군. 갈수록 추워지고.”
횃불에 손을 쬐던 헬구스는 문득 도현이 떠올랐다. 도현과 처음 만난 건 동굴 속 추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다크캐슬의 매서운 겨울 추위 속이었다.
‘그는 강을 헤엄치고 눈밭을 헤매며 혹독한 추위와 싸웠지. 나 같으면 그 추위를 견디지 못했을 텐데.’
칼라치를 비롯한 여러 구역장들의 추적을 피해 눈 덮인 산을 넘고 숲을 지나 체력을 회복해 결국은 그들 모두에게 타격을 입히는 저력을 보여 줬다. 그 끈질긴 의지와 강철 같은 체력은 지금 생각해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도현은 정말 대단한 인간이야.”
부지불식간에 마음속 생각을 입으로 터트린 헬구스는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앞서 걷던 윌벤슨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현, 그자가 어쨌다고?”
“아, 아무것도 아니오.”
“혹시 그자가 여기에 있나?”
윌벤슨은 거인의 섬 사건을 모르고 있었다.
“그가 어디 있건 내가 알 바 아니고, 추위를 느끼다 보니 예전 생각이 나서 말한 것뿐이오. 한겨울 다크캐슬에서 우리가 그에게 얼마나 크게 당했소?”
“많은 피해를 입었지. 칼라치는 눈을 잃었고.”
칼라치를 힐끗 쳐다본 그는 몸을 돌려 다시 동굴 안으로 향했다.
“정신 좀 차려요, 쓸데없는 혼잣말은 하지 말고.”
이디언의 톡 쏘는 말에 헬구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 입 가지고 말도 못 하나? 다들 잘났네. 젠장.”
헬구스가 입을 다물자 동굴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얼마 후, 침묵 속을 걷던 그들의 앞에 수많은 두개골과 뼈 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굴의 양쪽 벽면을 따라 층층이 길게 쌓여 있는 그 뼈들로부터 강한 한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으스스하군. 이것들이 갑자기 살아나서 날 공격할 것 같아.”
고대 병사의 두개골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 본 헬구스는 꼭 얼음에 손을 댄 기분이었다.
“드디어 우리가 만났구나.”
횃불로 고대 병사의 뼈를 비춘 베르노프는 잔뜩 들뜬 음성으로 말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걸 받아라.”
팔이 하나뿐인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비버에게 넘긴 후, 검은색 해골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불길하고 사악한 기운이 감도는 해골 지팡이에 주문을 외우자 지팡이 끝에 매달린 해골의 두 눈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따라오면서 색이 변한 두개골을 골라내게.”
베르노프의 요구에 윌벤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해골 지팡이를 앞세운 베르노프는 벽면에 쌓인 고대 병사들의 두개골 중 자신의 지팡이에 반응을 보이는 것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뒤에서 지켜보며 조용히 따라다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고대 병사의 두개골 중 하나가 해골 지팡이에 첫 반응을 보였다. 두개골이 푸른색으로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윌벤슨은 비버에게 눈짓을 했고, 비버는 날렵하게 움직여 뼈 사이에 끼어 있던 푸른색 두개골을 조심스럽게 끄집어냈다.
잠시 후, 또 하나가 발견됐고, 뒤이어 연속해서 세 개나 찾아냈다.
갈수록 반응을 보이는 고대 병사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렇게나 많다니!’
베르노프는 오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 고대 병사들 중 수십 명만 부하로 만들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조사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수십 개의 두개골이 소환 가능한 존재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이 정도 흐름이면 수십 명이 아니라 수백 명은 내 부하로 만들 수 있겠군. 수백 명의 고대 병사라니, 크하하하.’
속으로 크게 웃은 베르노프는 다시 정신을 집중해 해골 지팡이를 움직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푸른색 두개골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결국 비버 혼자만으로는 베르노프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게 됐다.
“아무래도 우리가 도와야겠군.”
칼라치는 헬구스와 함께 여기저기서 푸른색으로 빛나는 두개골들을 골라냈다. 나중에는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윌벤슨과 이디언까지 나서야만 했다.
그렇게 수백 개의 두개골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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