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3] 디 임팩트 18권 18화
“하아.”
별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쉰 베르노프는 생각할수록 울화통이 터졌다.
얼음의 기운이 스며든 고대 병사들을 부하로 거둘 수 있었는데 칼라치 때문에 다 틀어졌다.
“자그마치 수백의 고대 병사였어. 그 아까운 놈들이 내 손에서 다 빠져나가다니.”
그는 술을 마시며 칼라치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잠 안 자고 또 술 마시나?”
윌벤슨이 다가와 하는 말에 베르노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자네가 그자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내 고대 병사들이 그 녀석 몸속으로 들어갔겠냐고!”
“미안하네. 난들 그리될 줄 알았는가?”
마차 바퀴에 기대 술을 마시는 베르노프의 모습이 처량해 보여 윌벤슨은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만 잊게. 이미 엎질러진 물, 되돌릴 순 없잖은가?”
“그게 지금 날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인가?”
“진정하게. 브링틱을 떠나 여기 베일 가문의 영지에 올 때 까지 힘들어하는 자네의 모습이 걱정돼서 하는 말이니까.”
칼라치와 윌벤슨 일행은 밀튼 영주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전쟁 중인 베일 가문의 영지 내로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이제 그들은 밀튼 영주를 만나기 위해 이동하는 중이었다.
“시끄럽네. 한 팔뿐인 내가 앞으로 무슨 낙으로 살겠나! 고대 병사들을 부려 보고 죽었으면 했는데, 자네와 칼라치 때문에 다 틀어졌어!”
마차 바퀴에 기대 술을 마시던 베르노프는 술병을 박살 내며 벌떡 일어섰다.
시끄러운 소리에 마차 근처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잠을 청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났다.
“또 시작이네 또. 밤마다 잠도 못 자게.”
헬구스는 짜증 난다는 얼굴로 모포를 뒤집어썼다. 윌벤슨의 시종 비버 역시 하품을 하며 눈을 감았다.
“모른 척해요.”
일어서서 베르노프에게 가려던 칼라치의 상체를 옆에 누워 있던 이디언이 지그시 내리눌렀다.
“이미 수없이 사과했잖아요. 더 이상 어떻게 하겠어요, 의도했던 것도 아닌데.”
이디언과 시선을 교환하던 칼라치는 반쯤 일으켰던 상체를 다시 눕혔다.
그녀 말대로 고대 병사의 무덤에서 벌어진 사건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죽음의 엘바에 고대 병사들이 반응하다니.’
수백의 고대 병사를 칼라치에게 빼앗긴 베르노프는 그 이유를 찾다가 엘바 때문이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베르노프는 윌벤슨과 칼라치가 자신을 이용했다며 맹렬히 비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도 윌벤슨이나 칼라치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소환술사인 그도 몰랐던 엘바의 효과를 소환술과 관련이 없는 그들이 어떻게 알고 준비했겠는가.
더군다나 칼라치는 브링틱에서 우연히 만난 상황.
베르노프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재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찌 됐건 우리에겐 잘된 일이에요. 그로 인해 당신이 더 강해졌으니까요.”
이디언은 미소를 지으며 누워 있는 칼라치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막 키스를 하려던 순간, 윌벤슨의 큰 목소리가 들렸다.
“베르노프! 멈추게!”
“다 필요 없어! 전쟁은 너희들끼리 해!”
마차에 올라탄 베르노프는 한 손으로 말고삐를 움직여 마차를 출발시키려 했다.
“난 떠날 거야. 너희들과 같이 다니다간 화병으로 죽을 것 같아!”
“진정하게 베르노프! 미안하다고 했지 않나.”
“비켜!”
베르노프는 앞을 가로막고 있는 윌벤슨을 깔아뭉갤 기세로 마차를 몰았다.
윌벤슨은 마법을 사용해 막으려다 포기하고 옆으로 비켜섰다.
“주인님, 막을까요?”
비버가 묻자 윌벤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같이 다녀도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니 차라리 떠나는 게 나을는지도 모른다.
윌벤슨과 비버, 칼라치, 이디언 그리고 헬구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마차는 숲 공터를 벗어나 길을 따라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베일 가문의 대공이 본성을 버리고 후퇴해 온 ‘붉은 성’은 거대한 바위산 위에 세워진 천혜의 요새다.
삼면이 송곳처럼 깎아지른 바위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지상에서부터 이어진 절벽 길이 유일했는데, 그 앞만 막으면 수만 대군도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설령 그 절벽 길을 통과해도 바위산 정상에 버티고 선 웅장한 붉은 성은 또 한 번 공격자들에게 절망을 줄 만큼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천여 명으로 10만 대군을 막을 수 있다는 난공불락의 성.
그곳이 바로 사촌들에게 뒤통수를 맞고 반격을 준비하는 대공 알조베티 베일이 머물고 있는 곳이다.
주름살이 제법 깊어지는 50대의 알조베티 베일은 붉은 성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워낙 높은 위치에 세워진 성이라서 그런지 아주 먼 곳까지 시야가 미쳤다.
몇 개월 전, 본성에서 후퇴해 올 때는 적들이 바위산 밑에까지 쫓아왔지만, 지금은 붉은 성에서 주위를 둘러봐도 적들의 깃발은 보이지 않는다. 베일 가문의 충신들과 그를 지지하는 영주들의 지원군이 각자 군대를 이끌고 와 붉은 성 주변에서 적들을 간신히 밀어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게 보면 적들이 외곽에서 붉은 성을 포위하는 형국을 취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려면 붉은 성을 함락시켜야 한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죽음을 원하는 것이겠지.”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는 뒤돌아서서 숙부인 돈조르니를 응시했다.
“숙부.”
“예, 대공.”
돈조르니는 조카지만 대공의 위치에 있는 그에게 예를 잊지 않고 답했다.
“이 싸움, 승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반드시 승리할 겁니다. 그래서 저 반역자들의 목에 준엄한 심판의 칼날을 내리쳐야지요.”
“고맙습니다, 숙부. 숙부께선 한결같이 제 편이시군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알조베티는 충성심 깊은 늙은 숙부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성벽 아래로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내려가는 그의 얼굴 표정은 아주 차가웠다. 숙부에겐 부드러운 편이었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겐 일절 미소 같은 건 보여 주지 않는다. 그 때문에 신하들로서는 좀처럼 가깝게 다가갈 수 없는 존재다.
그럼에도 그를 위해 사자 동맹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는 충신들이 많은 이유는 대공이 매사에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고 상과 벌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나름 존경받는 인물이라 반역자를 택하느니 기존의 대공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친위대에 둘러싸여 붉은 성 내부로 들어가는 대공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돈조르니는 몸을 돌려 성벽 난간에 기댔다.
바람이 갑자기 세져 그의 옷자락이 심하게 펄럭였다.
‘돕겠다는 그자는 왜 나타나지 않는 건가?’
제법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구름이 쉬어 가는 숲의 그자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친구들이 날 비웃게 될지도 모르겠군.’
같이 동행했던 에이저나 나중에 그의 이야기를 들은 마법사 로제로와 도끼의 달인 커크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가 그 집에 머물고 있다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차라리 그날 목걸이만 넘길 게 아니라 강제로라도 문을 열고 들어가 그자가 누군지 확인했어야 할까?’
돈조르니는 어쩌다 자신이 이렇게 누군가를 의지하게 됐는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쓴웃음을 삼킨 그는 성벽을 내려갔다.
숙부와 헤어져 붉은 성의 집무실로 돌아온 대공은 거대한 지도 앞에 섰다.
지도엔 전서구를 통해 들어오는 각 지역의 전황이 반영돼 있어 아군과 적군의 상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싸움은 붉은 성을 중심으로만 이뤄지는 게 아니었다. 그를 지지하는 ‘베일 연합군’과 반역자 측의 ‘사자 동맹군’이 베일 가문의 영지 내 곳곳에서 충돌하고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가문을 둘로 쪼개 버리다니.”
알조베티는 반역을 일으킨 사촌들을 진작 죽이지 않은 게 후회가 됐다.
수백 년간 일궈 온 베일 가문의 힘이 이번 전쟁으로 거의 대부분 소진될 것이다.
술잔을 든 그는 오래된 집무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150여 년 전 그의 선조는 외부의 침입을 받았을 때 최후의 보루로 사용할 목적으로 이 성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 짚었다. 적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었다.
싸늘한 눈빛으로 거대한 지도를 응시하던 알조베티는 술잔을 우그러트렸다.
해가 질 무렵, 도현과 에드는 몬테지오에 도착했다.
몬테지오는 베일 가문의 전쟁에서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한 영주의 작은 도시로, 그곳과 베일 가문의 영지는 산과 들판을 경계로 나뉘어 있었다.
평소에는 상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몬테지오를 거쳐 베일 가문의 땅으로 향했지만, 전쟁 후 그 발길이 반 이상 줄었다.
“전쟁의 여파가 여기까지 미친 것 같군.”
도시 전체가 살얼음판 위에 있는 것처럼 도시 주민들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불난 집 옆에 집이 붙어 있으면 집주인은 걱정이 안 들 수가 없다. 언제 불길이 넘어올까, 그 불길이 꺼지기 전까지는 마음의 염려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베일 가문의 땅과 지척인 몬테지오 사람들의 심정이 꼭 그랬다.
“그래도 여기가 다크캐슬보다는 살기 좋은데요. 이 사람들은 그걸 모르는 것 같습니다.”
본토에서 갖가지 이유로 도망쳐 온 자들의 마지막 안식처라고도 볼 수 있는 다크캐슬의 그 빈민가는 매일이 생존을 위한 경쟁 장소였다.
“굳이 그런 쪽으로 비교를 하다니, 너도 못된 구석이 있구나.”
스승의 지적에 에드는 낮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스승님, 스승님의 친구분들이 저를 좋아하실까요?”
“너 하기에 달려 있겠지.”
“과묵하게 있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말을 많이 하는 게 좋을까요?”
에드는 곧 있으면 스승의 친구들과 만난다는 생각에 왠지 긴장이 되었다.
소녀 모습을 한 흑마법사도 있고 모험가이자 도둑이었던 사람들도 있고, 스승처럼 폭주하는 힘을 몸에 지닌 영주와 신성한 치료의 능력이 있는 사제도 있었다.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은 흥미롭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긴장이 된다.
“자연스럽게 있으면 돼. 그들 모두 좋은 사람이니까.”
긴장한 제자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인 도현은 사람들에게 물어 몬테지오 광장 주변에 있는 여관 거리로 향했다.
여행자들과 상인들을 위한 여관들이 밀집된 그곳은 전쟁의 여파로 한산했다.
도현은 그곳을 돌아다닌 끝에 여관에 머물고 있는 동료들을 찾아냈다.
“어, 왔냐?”
짐브리오는 반가운 목소리로 도현을 향해 먼저 손짓을 했다.
여관에 딸린 식당에서 막 저녁을 먹으려고 모여 있던 사람들은 도현이 나타나자 마치 아침에 외출을 하고 저녁에 돌아온 가족을 맞이하는 태도로 자연스레 맞아 주었다.
“제자는 잘 만나고 왔나?”
“네.”
도현은 대답을 하며 뒤를 돌아봤다. 에드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드.”
스승이 부르자 에드는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의 얼굴은 옅게 상기되어 있었다.
“걘 누구냐?”
짐브리오가 빵 조각을 입에 넣으며 물었다.
“제 제자입니다. 이번에 만나고 오겠다는 녀석이 바로 이 녀석이었습니다.”
“오, 그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에드에게 쏠렸다. 다크캐슬에서 지내는 동안 인연을 맺고 도현의 검술을 배웠다는 청년. 누군지 궁금했지만 이렇게 직접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은 예상을 못 했다.
“에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꾸뻑 인사를 하는 에드의 모습에 다들 웃었다.
“자식, 귀여운데. 자, 이쪽으로 와서 앉아. 저녁 먹으면서 얘기하자.”
짐브리오가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자 식탁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리타가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소리야, 여기에 앉아야지. 에드야, 난 리타라고 하거든, 혹시 스승님에게 내 얘기 들어 봤니?”
보라색 머리카락을 한데 묶어 등 뒤로 길게 내린 리타가 예쁘게 웃으며 물었다.
“예? 예에, 들었습니다.”
겉보기와 달리 나이가 많은 흑마법사였다.
“그럼 내 옆에 앉아야지. 어서 와.”
리타는 자신과 로나 사이의 빈 의자를 손가락으로 콕콕 찍어 가리켰다. 에드가 그쪽으로 움직이려 하자 짐브리오의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먼저 말한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냐?”
“예? 그게 아니라…….”
“뭐가 아닌데? 잔말 말고 어서 와.”
험상궂은 짐브리오의 눈빛에 에드는 몸을 틀어 그쪽으로 가려 했다.
그러자 이번엔 리타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왜 자꾸 이랬다저랬다 해? 너, 나 무시하는 거지? 생긴 게 이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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