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446화 (446/575)

[446] 디 임팩트 18권 21화

시신이 산처럼 쌓인 요새를 둘러보며 칼라치는 고대 병사의 힘에 놀라워했다.

그는 고대 병사가 신체가 잘려도 다시 붙는다는 것을 이번 전투를 통해 처음 알게 됐다.

그뿐 아니라 고대 병사들은 때에 따라선 무기에 얼음의 힘을 부여해 적들을 얼리기도 했다.

얼어 있던 고대 병사가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 베르노프가 말해 주지 않고 떠나 버렸기 때문에 하나부터 열까지 칼라치가 직접 알아낼 수밖에 없었다.

‘고대 병사가 내 몸속에 들어온 이후 난 엘바의 힘으로 극복하지 못했던 또 다른 경지에 도달했다. 전보다 몇 배나 강해졌어. 그런데 고대 병사들은 그 자체로도 큰 힘이 된다. 수백의 고대 병사들이 한꺼번에 적과 싸우게 되면…….’

수만 명의 적과 싸워도 이들이 있다면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불타는 요새에서 술통을 찾아낸 칼라치는 놀란 눈으로 요새 안의 상황을 돌아보는 윌벤슨과 비버, 이디언, 헬구스에게 다가갔다.

“참으로 대단하군.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였다니. 수십의 고대 병사만 사용했다고?”

머리가 부서진 요새 지휘관의 시신을 보며 윌벤슨이 물었다.

“그렇소.”

“자네, 정말 무서운 힘을 갖게 됐군. 자네 자체로도 강한데, 이런 막강한 부하들까지 휘하에 두다니. 베르노프가 왜 우리를 그토록 미워하며 떠났는지 일면 이해가 되는군.”

“내게 몇 놈 줄 수 없는가? 내 호위로 데리고 다니면 기가 막히겠어.”

부러워하는 헬구스에게 칼라치는 들고 있던 커다란 술통을 툭 던졌다.

“아이쿠.”

묵직한 술통의 무게에 잠시 비틀거리던 헬구스는 요새 안에 있는 사자 동맹군의 말에 술통을 매달았다.

“내가 아무리 술에 굶주렸어도 이곳에선 마시기 좀 그렇군. 다리를 건너가세.”

헬구스가 먼저 말을 몰고 다리를 건너자 뒤에 남은 사람들도 말을 한 마리씩 타고 그 뒤를 따랐다.

다리를 건넌 이디언은 칼라치에게 미소를 보였다.

“씨드가 얼마나 큰 힘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대 병사의 힘을 흡수한 당신도 그 못지않게 강해졌다고 봐요.”

“글쎄, 과연 그럴지 모르겠군.”

칼라치는 전설의 씨드를 누가 차지했는지 여전히 궁금했다. 어쩌면 헬구스의 말대로 거인의 섬이 가라앉는 바람에 그 누구도 씨드를 차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도현, 설마 그가 차지한 건 아니겠지?’

말에서 내린 칼라치는 숲에 자리를 잡고 술통을 열고 있는 헬구스를 지그시 응시했다.

헬구스는 도현과 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고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그는 직감적으로 그와 도현이 의외로 가까운 사이일 것 같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 부쩍 들고 있었다.

“아, 뭐 하나, 술 한잔하지 않고?”

헬구스는 술통에서 따른 술을 칼라치에게 내밀었다. 술잔을 받은 칼라치는 술을 단번에 비웠다.

‘그래, 도현과 헬구스가 가까운 게 뭐가 중요한가? 지금 이거면 족한 거지.’

“며칠만 더 가면 붉은 성이군.”

해가 지는 높은 산 위에서 도현 일행은 멀리 아래를 내려다봤다.

수만 명은 되어 보이는 사자 동맹군의 진영이 평원에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수천의 기병들이 분주히 동과 서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면, 저곳이 사자 동맹군의 지휘부 중 한 곳일 것 같았다.

지금까지 여러 사자 동맹군 주둔지를 목격했지만, 저 평원의 진영은 그중 단연 최대의 규모였다.

도현의 시선이 평원 넘어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저곳 어딘가에 붉은 성이 존재할 것이다.

“쉬었다가 새벽 일찍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어베인의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산속에 쉴 만한 장소를 찾았다.

산 위에서 보면 적의 진영과 가까웠지만 실상은 상당히 먼 거리였다. 밤에 쉬었다 이곳을 벗어나도 그리 큰 위험이 될 장소는 아니었던 것이다.

간단히 저녁을 먹은 도현은 에드를 데리고 일행과 좀 떨어진 계곡으로 향했다.

일행은 도현이 에드에게 검을 가르치려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디 가냐고 굳이 묻지 않았다. 몬테지오를 떠나 여기까지 오는 여정 동안 매일 밤마다 벌어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거기 편하게 앉아.”

도현은 자신이 먼저 계곡가에 앉으며 에드에게 손짓을 했다.

허리의 검에 손을 얹고 있었던 에드는 공손히 스승의 앞에 앉았다.

“오늘은 너와 검을 대련하는 대신 내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겠다.”

“경험담이라면, 혹시 스승님의 원수라는 태선군과의 싸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에드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는 스승과 함께 다니는 동안 최대한 스승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싶어 했다. 그것이 검에 관한 것이든, 혹은 스승의 개인사든.

‘왜냐면 난 스승님의 제자니까.’

언제고 스승과 헤어지면 그 많은 이야기들을 곱씹으며 스승과의 추억을 길게 이어 가고 싶었다.

“이 녀석, 태선군 이야기는 아니다.”

“아, 죄송합니다, 스승님.”

에드는 습관처럼 뒷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말할 경험담은 깨달음과 관련된 것이다. 하나의 벽에 가로막혀 있던 내가 겨울 산 폭포 밑에서 어떻게 그 벽을 깨는 깨달음을 얻게 됐는지, 당시 나의 생활들과 마음가짐 그리고 고민들을 네게 말해 주겠다.”

“경청하겠습니다, 스승님.”

에드는 눈을 빛내며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것은 나의 경험이라 네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훗날 네가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나의 말을 참고하면 작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다.”

도현은 당시 단전의 크기 때문에 내공이 더 이상 모이지 않을뿐더러 검의 발전도 정체되어 있었다. 그 벽을 겨울 취영산에 있는 노부부 집에 머물며 허물었다. 그때의 일을 도현은 말해 주려 한 것이다.

계곡물 소리를 배경으로 도현은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했고, 에드는 스승의 경험담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정신을 집중했다.

“여기까지다.”

스승의 이야기에 너무 몰두해서 그런지 에드는 도현의 말이 순식간에 끝나 버린 것 같아 조금은 아쉬웠다.

그래도 뭔가 느껴지는 게 있었는지 에드는 그 자리에서 깊은 생각에 잠겼고, 도현은 그대로 눈을 감고 바크 드라모스의 검술을 생각했다.

‘용의 검술은 아주 조화로웠어. 그가 살아온 긴 세월처럼 모든 걸 품은 듯이 말이야. 그런 검은 인간이 이룰 수 없는 것인가?’

도현은 붉은 성에 가는 여정 속에서도 깨달음과 검의 경지를 높이기 위해 매 순간 노력해 오고 있었다.

‘조화라…… 조화……. 무엇과 무엇의 조화를 말하는가? 인간과 검인가? 아니면 내공인가? 그도 아니면 자연과의 조화인가?’

고승처럼 눈을 지그시 감은 도현은 조화라는 화두에 목말라하며 깊이 매달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먼저 깨어난 에드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승님을 방해해선 안 되지.’

명상에 잠긴 스승의 모습을 잠시 지켜본 에드는 그곳을 벗어나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다 발걸음을 멈췄다.

어베인이 로나의 단검술 상대가 되어 실전처럼 싸우고 있었다. 원래 로나는 어베인의 상대가 될 수 없었지만 씨드 나무를 약으로 복용한 후, 싸움에 능한 여전사처럼 바뀌었다. 씨드 나무가 일정한 능력을 그녀에게 준 것이다.

두 자루 단검으로 어베인의 마나가 깃든 검을 힘차게 막아 낸 그녀는 뒤로 회전하며 발끝으로 어베인의 얼굴을 걷어찼다.

“살살해.”

로나의 발길질을 간신히 피한 어베인이 헛바람을 삼키며 말했다.

“실전처럼 하라면서요?”

“내가 그랬나?”

빙그레 웃은 어베인은 턱에 묻은 흙을 털어 내며 로나를 대견스럽게 봤다. 병을 치료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는 이제 웬만큼 강해지기까지 했다.

“내가 죽어도 이제 혼자 다닐 수 있겠어.”

“무슨 소리예요, 그게!”

가슴 높이까지 세웠던 단검의 날을 허리 밑으로 내리며 로나가 화난 표정을 지었다.

“어렸을 때 오갈 데 없는 나를 대장이 딸처럼 키웠잖아요. 그럼 끝까지 책임져야죠. 몇십 년만 같이 더 다녀요.”

“몇십 년이나? 지겨운데. 하지만 노력해 보지.”

둘은 미소를 짓다가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정말 아버지와 딸 같아.’

에드는 그들을 지나쳐 모닥불이 피워진 잠자리에 도착했다.

영주 딘은 언제나처럼 리드만 사제와 일곱 신을 주제로 장난스러운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가까이 가면 리드만 사제님이 날 붙잡고 또 일곱 신에 대해 길게 말씀하실 거야.’

지루한 그 시간을 피하고 싶었던 에드는 리드만 사제와 눈이 마주치지 않게 신경 쓰며 짐브리오와 리타에게 빠르게 걸어갔다.

그들은 보물을 걸고 도박을 하고 있었다.

“야, 얼른 주사위 굴리라고.”

“재촉 좀 하지 마.”

혀를 날름거린 리타는 정육면체 주사위를 땅에 굴렸다. 짐브리오보다 높은 수가 나왔다.

“헤헤, 내가 또 이겼네!”

리타는 진주 목걸이와 보석이 박힌 반지들을 자신의 앞으로 쓸어 왔다. 그녀 앞엔 짐브리오로부터 딴 보물들이 적지 않게 쌓여 있었다.

“아, 열 받아! 쪼그마한 게 어디서 주사위만 굴리다 왔나.”

술을 한 잔 마신 짐브리오는 마법 주머니 안에서 보물 상자를 통째로 끄집어냈다. 도현에게 선물로 받은 보물 상자였다.

“크게 한 번 걸자.”

“크게? 얼마나?”

리타는 자신 있는지 팔짱을 끼며 물었다.

“이거 전부 다.”

짐브리오는 커다란 보물 상자를 통째로 내밀었다.

“후회할 텐데.”

“잔말 말고 어서 너도 걸어.”

“흥! 좋아!”

리타도 마법 주머니 안에서 보물 상자를 꺼냈다.

“이거 잃고서 도현에게 보물 상자 더 달라고 하지 마.”

“죽어도 그런 말 안 해.”

짐브리오는 큰 소리로 말한 후 주사위를 에드에게 넘겼다.

“이걸 왜 제게…….”

얼떨결에 주사위를 받아 든 에드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니가 던져.”

“예? 제가요?”

“그래, 나 대신 네가 하는 거야. 높은 수가 나와야 한다.”

에드는 손안에 주사위를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들어 보물 상자를 쳐다봤다.

누가 이기든 진 쪽은 상당히 열이 받을 상황이었다.

“그냥 직접 던지시면 안 됩니까?”

에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짐브리오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왠지 운이 더 좋을 것 같아. 널 믿는다.”

“하지만 너무 큰 보물이 걸려 있는데요. 제가 어떻게…….”

“편안하게 해, 넌 이길 수 있으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눈빛은 반드시 이기기를 원하고 있었다. 부담스러운 그의 눈빛에 에드는 주사위를 내던지고 도망치고 싶었다.

‘전쟁터에 와서 주사위 도박이라니, 대체 왜들 이러시는 거야?’

에드는 머리가 아팠다.

“화끈하게 던져 봐. 넌 리타를 이길 수 있어.”

망설이던 에드의 손에서 결국 주사위가 던져졌다. 몇 바퀴 데굴데굴 구르던 정육면체 주사위가 멈췄다.

밑에서 두 번째로 낮은 수가 나왔다. 짐브리오의 얼굴이 굳어졌다.

“장난치냐?”

“죄, 죄송합니다.”

“헤헤, 이번에도 내가 이기겠는걸.”

리타는 신이 난 얼굴로 주사위를 던졌다. 제일 낮은 수가 나오는가 싶더니 한 번 더 옆으로 구르며 제일 높은 수가 나왔다. 기적은 없었다.

“이겼다!”

신이 난 리타는 짐브리오가 딴말하기 전에 마법 주머니에 두 개의 보물 상자를 순식간에 넣어 버렸다.

짐브리오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괴로워했다.

“대체 왜 한 번도 못 이기는 거야! 왜!”

-멍청한 놈.

“뭐? 멍청해?”

손으로 얼굴을 감쌌던 짐브리오는 손을 내리며 자수정을 노려봤다. 락제프의 눈이 그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왜 멍청하다는 거요?”

-리타가 마법으로 널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걸 눈치채지 못하니 멍청하다고 말한 거다.

락제프의 설명에 짐브리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리타, 사실이야? 너 날 속인 거야?”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