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7] 디 임팩트 18권 22화
“무, 무슨 소리야. 스승님, 왜 이상한 소리를 하세요? 제가 뭘요?”
리타는 시치미를 뚝 뗐다.
-다른 사람들은 잠을 자는 시간도 쪼개서 수련을 하는데 너는 짐브리오와 도박을 하며 노닥거리고 있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
“하나도 안 부끄럽거든요. 저도 마법 공부 열심히 하니까요. 잠시 쉬는 거 가지고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짐브리오, 리타는 현혹 마법으로 너와 에드의 시선을 순간적으로 가렸다. 너희들은 리타가 원하는 수를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락제프의 추가 폭로에 짐브리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박판에 속임수를 쓰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뭐, 어떻게 되는데?”
리타는 잘못한 게 있어서인지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손모가지를 꽉 그냥!”
짐브리오는 손목을 자르는 시늉을 했다. 움찔한 리타는 에드의 등 뒤로 숨었다.
“아, 미안해. 재미 삼아 장난 좀 친 거야. 하도 주사위 잘한다고 해서.”
“내 보물 내놔!”
“어차피 돌려주려고 했다고.”
리타는 마법 주머니에 손을 넣어 커다란 보물 상자를 꺼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더니.”
보물 상자를 되찾은 짐브리오는 리타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왜 때려!”
“그럼 손모가지 잘릴래?”
“…….”
평소 같으면 짐브리오가 제일 싫어하는 거대 얼굴을 만들어서 머리를 때린 것에 대한 보복을 했겠지만 오늘은 참아야만 했다.
리타의 까마귀 마법은 하늘을 통해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전체적인 적의 그림을 파악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공중에서 파악할 수 없는 여러 지형적인 제약도 많다. 예를 들면 무성한 나무들로 가려진 숲이나 산 등이 그렇다.
그런 곳은 직접 들어가 일일이 정찰을 하지 않는 한, 까마귀 마법으로도 그 내부 사정을 알기 어렵다.
도현 일행이 붉은 성으로 가는 길에 사자 동맹군과 싸울 때는 대부분 이런 숲과 산에서 마주친 경우였다.
“허억!”
사내는 갑옷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검에 숨이 끊어지며 손을 허우적댔다.
에드는 죽어 가는 사자 동맹군 정찰병의 입을 틀어막으며 몸을 깊숙이 숙였다. 코앞에 범상치 않아 보이는 강자 수십여 명과 수천 명의 병력이 지나치고 있었다. 정찰병이 소리라도 질렀다면 저들과 싸워야 될 상황이었다.
숨이 끊어진 정찰병의 시신을 뒤로 조용히 끌고 온 에드는 나무에 시신을 기대어 놓았다.
“용케 놓치지 않았구나.”
“스승님.”
에드는 허공에서 뚝 떨어진 스승의 등장에 살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 숲에서 마주친 일단의 정찰병들이 갑자기 사방으로 흩어지는 바람에 도현으로서도 일시에 그들을 모두 잡을 수 없었다. 그중 한 명을 에드가 잡은 것이다.
“수고했다. 이자를 놓쳤다면 바로 싸움이 벌어졌을 거야.”
에드와 함께 일행이 기다리는 숲의 한 지점으로 돌아온 도현은 적들의 매복을 신경 쓰며 이동했다.
숲을 통과한 그들은 어둠을 이용해 들판을 가로질렀다.
밤공기를 타고 멀리서 은은한 싸움 소리가 들렸다. 전선을 이루는 붉은 성 외곽 지역에서 충돌하는 소리였다. 이번 전쟁의 핵심 지역에 다다른 것이다.
“오늘은 잠을 자지 말고 계속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도현의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군. 잠자다가 적에게 포위당하기 딱 좋은 지역이니까.”
사자 동맹군은 어느 한 명이 단독으로 움직일 수 있는 종속적이고 통일된 병력 조직이 아니었다. 많은 영주들이 참여한 군사 연합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여러 개의 지휘부를 두고서 회의를 통해 전반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전투를 벌인다.
지휘부 중 한 곳으로 철가면 휴반트가 들어섰다.
임시로 지은 목조건물 안에서 회의를 벌이던 두 명의 영주들과 네 명의 영주 대리인들이 일제히 그를 응시했다.
다른 지휘부에 소속되어 있던 철가면 휴반트가 그들을 찾아온 건 오늘 낮이었다. 대공의 세력이 차지하고 있던 후방의 요새 두 곳을 부수며 화려하게 등장한 그였기에 얼마 안 되는 기병을 데리고 왔다 해서 다른 지휘부처럼 무시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높게 평가해 주지도 않았다. 철가면 휴반트가 부순 후방의 요새들은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휴반트는 왕처럼 앉아 있는 두 명의 영주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후, 회의실 빈자리에 조용히 착석했다.
원래 그는 지휘부 따윈 무시하고 단독으로 움직이려고 했지만, 그를 따르는 수백 명의 부하들이 먹고 마실 보급품이 필요했고 부상당한 부하들을 치료를 할 장소도 구해야 했다. 결국 그는 지휘부가 구성된 진영으로 말을 몰고 올 수밖에 없었다.
휴반트로 인해 잠시 중단됐던 회의가 다시 이어졌다. 대부분 그들 지휘부가 맡고 있는 전선의 전투 상황에 관한 것이었다.
어디에 병력이 더 필요하다느니, 다른 지휘부와 합심해 어느 거점을 공략해야 한다느니 지루하게 떠드는 그들의 이야기에 휴반트는 점점 지쳐 갔다.
‘수십만의 병력으로도 붉은 성을 점령하지 못한 이유가 다 있었군. 병신 같은 것들.’
입으로 싸움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럼 내일 있을 보급로 습격은 넬리 경이 맡는 걸로 하겠소.”
“그렇게 하지요.”
“아, 휴반트 경도 같이 가는 게 어떻겠소?”
회의를 주도하던 한 영주가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휴반트는 알겠다고 대답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을 나선 그를 넬리 경이 불러 세웠다.
영주의 대리인 자격으로 온 그는 군사 4천 명을 휘하에 두고 있었다.
“당신 부하들은 다 지쳐 보이던데, 날 도울 수 있겠소?”
“내일 싸움에 내 부하들은 안 갈 거요. 당신 말대로 그들은 지쳐 있으니까.”
휴반트는 자신만 간다는 뜻을 내비치고는 진영 한편에 마련된 그의 숙소로 걸어갔다.
작은 막사에 도착한 휴반트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멍하니 땅을 응시했다.
‘그녀가 보고 싶군.’
벨피타 영주의 딸을 그리워하던 그는 천천히 철가면을 벗었다. 코가 떨어져 나가고 살점이 뒤엉킨 그의 얼굴은 한번 보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보기 흉했다.
손바닥에 물을 받아 얼굴을 씻은 그는 다시 철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철가면을 쓰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서 조금도 버틸 수가 없었다. 어느새 철가면이 그의 진짜 얼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새벽이슬을 맞으며 2천여 명의 병력이 은밀히 숲을 통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수백 대의 짐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는데, 짐마차 안엔 식량과 전쟁 물자가 가득했다. 베일 연합군의 보급품 수송부대 중 하나였다.
은색 활을 등에 맨 에이저는 보급품이 실린 선두의 짐마차 위에서 사방을 감시했다.
친구인 돈조르니를 위해 베일 가문의 전쟁에 참여 중인 그는 수송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어젯밤 이 근처에서 부대에 합류했다. 최근 들어 보급품을 노리는 사자 동맹군의 습격이 빈번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위험한 곳은 거의 다 벗어난 것 같은데, 그만 편히 가시지요.”
수송부대의 지휘관이 짐마차 위에서 숲 좌우를 감시하는 에이저에게 말했다.
대공의 숙부와 친구 사이인 나이 지긋한 노인이 밤부터 새벽까지 꼼짝도 않고 저러고 있는 모습이 지휘관에겐 부담이 된 것 같았다.
“나는 괜찮소. 그보다 전쟁터에 위험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소? 지휘관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마음을 풀지 마시오.”
날이 선 목소리로 에이저가 말했다.
가슴 한쪽이 뜨끔해진 수송부대의 지휘관은 얼굴이 벌게졌다.
‘말하는 것하고는. 누가 그걸 모르나? 좀 쉬라고 내가 그냥 한 말이지.’
턱에 수염이 거칠게 자란 지휘관은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한편으로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차가운 노인의 모습을 높이 평가했다.
들리는 소문으론 사자 동맹군의 여러 강자들이 이 노인의 화살에 죽었다고 한다.
직접 그 활 솜씨를 보고 싶기는 했지만 이대로 싸움 없이 무사히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게 더 낫다.
빠르게 시간이 흘러 어느새 날이 샐 무렵, 짐마차 위의 에이저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휘관, 싸움을 준비하시오.”
말을 탄 지휘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숲 속에 많은 적들이 숨어 있소. 곧 습격을 해 올 것 같소.”
에이저는 지휘관에게 말을 하며 등의 활을 풀어 손에 쥐었다. 그의 발밑엔 수백 개의 화살이 든 긴 통이 놓여 있었다.
“모두 전투대형!”
지휘관의 지시에 나팔수가 길게 나팔을 불었다.
뿌우우! 뿌우우우우!
마차 행렬이 멈추며 2천여 명의 병사들이 재빨리 짐마차 주위를 감싸고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 순간, 숲에서 셀 수 없이 많은 화살들이 날아왔다.
“으아악!”
“내 다리!”
방어 진형을 짜고 방패로 몸을 보호했지만 대공 측 병사들은 적지 않게 피해를 입고 말았다.
“와아아아!”
숨어 있던 사자 동맹군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수송부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넬리 경의 부하들이었다.
“적들은 얼마 안 된다! 모조리 죽이고 보급품을 차지한다!”
거의 두 배나 되는 사자 동맹군 병력이 물밀듯이 수송부대를 향해 짓쳐 들었다.
“흥!”
짐마차 위에서 새카맣게 몰려드는 적들을 보며 에이저는 코웃음을 쳤다.
“네놈들이 겁 없이 날뛰는구나.”
에이저가 은색 활의 활시위를 놓자 세 개의 화살이 유성처럼 빠르게 날아갔다.
꽈지직. 쾅! 쾅!
달려오던 넬리 경의 부하들 십여 명이 동시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마나의 힘이 실린 세 개의 화살이 병사들의 갑옷은 물론 몸을 관통하며 뒤에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준 것이다.
그런 화살이 짧은 순간 수십여 발이나 나갔다.
화살을 날리는 에이저의 손동작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저절로 통 안의 화살들이 허공으로 떠올라 적들을 향해 날아가는 것 같았다.
짧은 순간에 백여 명이 넘는 적을 학살하듯이 죽인 에이저는 적들이 더 이상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오지 않자 수백 개의 화살이 든 긴 통을 어깨에 짊어지고 저만치 떨어진 짐마차 위로 몸을 날렸다.
긴 마차 행렬 전체에 대한 습격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리를 옮겨 가며 사자 동맹군을 공격해야 했다.
에이저의 마나가 깃든 화살은 방패며 사람이며 가리지를 않았다. 걸리면 죽는 것이다.
앞을 보며 화살을 날리던 에이저는 몸을 돌리며 뒤를 향해서도 화살을 날렸다.
콰앙!
“크아아악!”
짐마차 위로 기어 올라오던 병사의 몸이 반쯤 부서진 채 저 멀리까지 튕겨져 날아갔다.
에이저가 뒤로 시선이 빼앗긴 사이 그 틈을 이용해 마나를 배운 뛰어난 검사 서너 명이 동시에 짐마차 위로 뛰어올라 에이저를 포위 공격했다.
“늙은이 죽어라!”
“고약한 말버릇이로군.”
에이저는 들고 있던 은색 활의 시위를 그냥 당겼다. 화살 없이 그냥 활시위를 당기는 그를 마나를 배운 검사들이 비웃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심장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명이 급속도로 빠져나간 검사들은 짐마차 위에서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이 기술을 익히는 데 평생이 걸렸다. 너희들이 알 수는 없겠지.”
그때 수십 발의 화살이 에이저를 향해 빗발치듯 날아왔다. 적 궁수 수십여 명이 원거리에서 기회를 엿보다 작심하고 날린 것이다.
“느려, 힘도 없고.”
에이저는 들고 있던 은색 활을 이용해 적의 화살들을 너무나 쉽게 막아 냈다.
“돌려주지.”
피피피핑핑핑!
그는 마치 악기를 연주하듯 은색 활시위를 당겼고 그럴 때 마다 서너 개의 화살이 폭풍 같은 기세로 날아갔다.
숲의 나무를 방패 삼아 또 다른 화살을 준비하던 사자 동맹군 궁수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쓰러졌다. 나무를 뚫고 나온 에이저의 화살이 그들의 목과 심장에 박혔기 때문이다.
궁수들을 움츠리게 만든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다시 아군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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