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 디 임팩트 18권 23화
에이저의 활약은 실로 눈부셨다. 이미 난전이 된 상황 속에서도 그는 짐마차 위에서 정확하게 적들만 골라 화살을 퍼부었다.
활과 화살이 있는 한 그는 전투의 신 같았다.
기세 좋았던 사자 동맹군은 그 수가 크게 줄었을 뿐만 아니라 짐마차 위에서 화살을 쏘는 노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점차 전투 의지가 꺾이고 있었다.
반대로 베일 연합군은 기세가 살아나 오히려 적들을 조금씩 밀어 내고 있었다.
“빌어먹을! 저 노인네가 여기에 있었다니!”
뒤에서 지휘를 하던 넬리 경이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누구요, 저 노인은?”
철가면 휴반트가 인상적인 싸움을 벌이고 있는 에이저를 보며 물었다.
“이름이 에이저라고 알려진 작자인데, 대공의 숙부와 친구라는 말이 떠돌고 있소. 저 노인에게 당한 우리 사자 동맹군 측 강자들이 여럿이오.”
“그렇군.”
“아무래도 안 되겠소, 병사들을 물리고 후퇴해야지. 더 큰 피해를 보기 전에.”
이미 많은 부하들을 잃은 넬리 경은 후퇴 명령을 내리려 했다.
“잠깐만.”
그때 휴반트가 넬리 경을 제지했다.
“내가 저 노인을 없애 버리겠소.”
“당신이?”
넬리 경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휴반트를 응시했다. 벨피타 영주의 대리인으로 온 이 사내에 대해 알려진 건 거의 없었다. 그저 다른 지휘부의 지시를 어기고 단독으로 움직이는 골치 아픈 존재라는 정도.
솔직히 오늘 같이 오긴 했지만 그에게 뭘 바라지는 않았다. 철가면에 호기심이 생겼을 뿐.
그런데 저 노인을 죽이겠다니, 그럴 실력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시간 낭비할 겨를이 없소. 내 부하들이 죽어 가고 있다니까.”
“왔으면 승리를 해야 할 게 아니오?”
말에서 내린 휴반트는 병사의 창을 빌려 가볍게 집어 던졌다.
붉은 빛에 휩싸인 창은 번개처럼 날아가 에이저가 화살을 날리던 짐마차와 충돌했다.
콰아앙!
짐마차가 산산조각 났다.
허공으로 떠오른 에이저는 땅에 내려서며 위력적인 창이 날아온 곳을 응시했다. 멀리 철가면을 쓴 자가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활을 쏠 기회를 세 번 주겠소.”
낮고 작은 목소리였지만 귀에 똑똑히 들렸다. 에이저를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세상을 냉소적으로 보며 살아온 에이저는 젊었을 때 자주 보였던 입 모양을 오랜만에 다시 만들었다. 왼쪽 입꼬리가 쭉 올라간 것이다.
“재밌는 녀석이군.”
그는 등에 메고 있던 작은 화살집에서 화살을 하나 꺼내 활시위를 당겼다.
“소원이라면 들어주지.”
화살이 우렛소리를 내며 벼락처럼 휴반트에게 날아갔다. 에이저의 이번 화살은 마나가 화살 끝에 응축돼서 적중하는 순간,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에이저는 철가면 사내의 시체조차 남겨 놓지 않을 속셈이었다.
콰앙!
큰 폭음과 함께 휴반트 발밑의 땅들이 들썩이며 먼지구름을 만들었다.
투두둑.
조각난 돌 조각들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바람에 먼지구름이 흩어지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휴반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태연히 에이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두 번의 기회가 남았군.”
“이름이 뭐냐?”
화살을 활시위에 걸며 에이저가 물었다.
“휴반트.”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구나.”
“나 역시 에이저라는 당신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소.”
“앞으로 영원히 잊지 못하도록 해 주마, 죽어서도 기억할 수 있다면.”
에이저는 하늘을 향해 화살 한 발을 쐈다.
끝없이 올라간 화살은 이내 사라졌다. 화살이 잠시 뒤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수십 개의 화살들로 변해 있었다.
각각의 화살은 회오리바람을 만들며 무서운 속도로 하강했다.
콰콰콰쾅쾅쾅!
땅이 진동하며 엄청난 강풍이 주위에 휘몰아쳤다. 근처에서 싸우던 많은 병사들이 강풍의 영향으로 수십 미터씩 날아갔다.
휴반트는 약간 비틀어진 철가면을 바로잡으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분화구처럼 생긴 깊은 웅덩이가 생성돼 있었다. 에이저의 폭풍 화살이 만든 결과였다.
“이제 한 번 남았군.”
에이저는 별말 없이 빈 활시위를 휴반트에게 겨눴다. 화살이 없는 빈 공간에 회오리가 치더니 밝게 빛나는 화살 모양의 물체가 생성됐다.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화살 모양의 물체는 에이저가 평생 활을 수련하며 얻은 깨달음의 결정체였다.
사냥꾼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고사리손으로 활을 배운 그는 철가면 사내를 겨누며 묘하게 흥분이 됐다.
‘마치 잡기 힘든 짐승을 잡는 것 같군.’
아버지와 함께 첫 사냥에 성공했던 당시의 기쁨을 다시금 느껴 보고 싶었다.
‘짐승아, 사냥꾼이 왔도다.’
옷자락을 펄럭이며 활을 겨누던 에이저의 손에서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화살이 천천히 날아갔다. 지극히 느려 보여서 중간에 땅에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 화살을 바라보는 철가면 휴반트는 처음으로 감탄했다.
“괜찮군.”
화살을 받아 내며 여태껏 검을 뽑지 않았던 휴반트도 이 번만큼은 검을 뽑아 들었다.
사막의 지하에서 발견한 고대 검이 기괴하게 울며 느리게 다가오는,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화살을 으적으적 씹어 먹어 버렸다.
에이저는 자신의 화살이 사라지는 것을 착잡한 시선으로 지켜봤다.
‘마지막 사냥은 실패군.’
그는 은색 활을 겨눈 그 자세 그대로 흐트러짐 없이 철가면 사내를 응시했다. 상대는 믿을 수 없이 강한 짐승이었다.
“이제 당신의 목숨을 취하겠소.”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좁힌 휴반트는 검은색 검신을 지닌 고대 검을 부드럽게 휘둘렀다.
에이저는 검은 괴물이 현신해 자신을 삼키는 환상을 봤다.
‘친구들, 먼저 가네.’
그는 돈조르니와 로제로, 커크를 떠올리며 자신의 최후를 기다렸다. 피하고 싶어도 저 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최후의 화살을 쏘며 심력과 체력, 마나를 몽땅 소진한 까닭이다.
한데 악마처럼 다가오는 검은색 일색의 검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은색 검이 불쑥 튀어나와 철가면의 검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누가?’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옆에서 검을 휘둘러 철가면 사내의 검을 막은 사람은 그도 처음 보는 사내였다.
“여긴 제가 맡을 테니 잠시 쉬십시오.”
도현은 에이저에게 등을 보이며 휴반트와 마주 섰다.
“이리 오시오.”
짐브리오는 일시적으로 힘의 공백이 생긴 에이저를 안고서 뒤로 훌쩍 물러났다.
붉은 성
휴반트는 자신의 검을 막아선 도현을 지그시 응시했다.
‘이놈은 좀 다른데?’
사막 지하 유적에서 고대 검술을 익히고 씨드의 힘까지 차지한 휴반트는 자신이 어디까지 강해졌는지 그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그것을 피부로 느끼고자 은밀히 세상을 돌며 마법사를 비롯한 다양한 부류의 강자들을 상대해 봤다.
결론은 자신의 힘을 온전히 보여 줄 대상이 현재 세상엔 없다는 것이었다. 역사서에 기록된 씨드를 복용한 영웅이 글 속에서 튀어나와 그를 상대해 주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런데 에이저를 죽이려고 한 그의 고대 검술을 막아선 자가 나타났다.
그저 막아 낸 것도 아니고 찰나의 순간에 반격을 가해 그의 가슴을 베어 내려 했다. 놀라운 검술이었다.
‘진짜 싸울 만한 놈이 나타난 건가?’
어려서부터 외톨이로 지내며 검을 친구로 사귄 휴반트는 검을 품고 잠을 잘 정도로 검에 미친 사내기도 했다.
그동안 자신의 검을 받아 줄 상대가 없어 무척 지루했는데, 오늘 신선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에이저와 그 사이에 끼어든 불청객이 그는 그래서 매우 반가웠다. 어차피 죽일 대상이었지만.
“이름이라도 좀 들어 볼까?”
휴반트는 검 끝으로 도현을 가리켰다.
도현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물어 오는 철가면 사내의 눈을 들여다봤다.
‘깊고 어둡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조금 전 철가면의 검을 막을 때 도현은 그 속에 도사린 지독한 날카로움에 마음이 베일 뻔했다. 그가 단순히 막아서는 데 그치지 않고 찰나간 반격을 가한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철가면의 검 속에 도사린 그것에 자신이 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검이 살아 있다, 놀라울 정도로.’
도현은 칠흑처럼 어두운 독특한 검이 철가면 사내와 완벽히 교감을 이루고 있다고 판단했다. 상대는 검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검의 고수였다.
“난 백도현이다. 당신은?”
“벨피타 영주의 대리인 휴반트라고 한다. 반갑군, 백도현.”
도현은 철가면에 가려진 사내의 얼굴이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널 죽이고 네가 데리고 온 녀석들도 다 죽일 거다. 저놈도, 저놈도, 그리고 저놈들도.”
휴반트는 수송부대와 사자 동맹군 사이의 전투에 끼어든 어베인과 딘, 로나, 에드 등을 시선으로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
“미리 말해 둘 필요 없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도현의 담담한 대답에 휴반트의 웃음소리가 철가면 안에서 흘러나왔다.
“하하하! 그럼 어디 시작해 볼까?”
휴반트의 모습이 순간 도현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도현은 당황하지 않고 왼편을 향해 길게 검을 베었다.
사라졌던 휴반트가 모습을 드러내며 폭풍 같은 기세로 도현의 검을 막았다.
채채채챙챙!
수십 번의 공방전이 한 호흡 동안 발생했고, 둘의 눈은 서로의 검을 향해 단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자유롭게 땅과 공중을 오가며 싸우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수십 명이 싸우는 것처럼 아름다운 환영을 만들어 냈다.
땅이 갈라지고 그들이 싸우며 지나친 여러 대의 짐마차들이 허공으로 떠올라 눈송이처럼 잘게 부서져 내렸다.
채채채챙! 채채챙!
도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휴반트의 검을 상대하다가 뽑지 않은 세타이움 장검을 마저 뽑아 들었다.
쌍검을 손에 쥔 도현의 검이 갑자기 몇 배나 빨라지고 내공의 힘이 폭증했다.
쉬쉬쉬쉭! 사사사삭!
현묘함이 깃든 쾌검술이 휴반트의 전신을 난도질하는 듯했다.
흠칫한 휴반트의 몸이 그 자리에서 팽이처럼 회전을 일으켰다.
카카카캉!
도현의 쾌검술이 모조리 뒤로 튕겨져 나갔고, 되레 빈틈이 생겼다.
그 빈틈으로 휴반트의 검이 사악한 이빨을 드러내며 짓쳐 들었다. 휴반트 역시 씨드의 힘을 본격적으로 개방한 것이다.
‘정말 만만치 않은 자군.’
도현은 재빨리 검을 교차해 방어를 하며 뒤로 물러났다가 어느 순간 다시 공세적으로 나섰다.
‘대체 어디서 이런 힘을 갖게 됐을까?’
검술이 뛰어나다 해서 마나까지 저절로 생기는 건 아니다. 씨드의 도움으로 내공이 바다처럼 넓어진 도현으로서는 자신의 엄청난 내공이 실린 검을 잘 받아 내는 휴반트가 그저 놀랍기만 했다.
그러나 놀라기는 휴반트도 마찬가지였다.
‘뭐지? 씨드의 힘이 실린 고대 검술을 모조리 막아 내고 있잖아!’
휴반트는 도현의 강함 덕분에 마음껏 검을 휘두르고는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끝이 없어 보이는 상대의 힘에 마음 한편이 서늘해지고 있었다.
‘설마 이 녀석도 씨드를?’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도현의 변화무쌍한 검이 번뜩이며 눈앞으로 다가왔다. 화들짝 놀란 그는 전신을 옭아매는 기이한 도현의 검으로부터 간신히 벗어나 허공 높이 솟구쳤다.
그 순간, 도현은 한 자루 검을 비검술로 날렸다. 푸른 광채에 휩싸인 그 검은 허공으로 떠오른 휴반트를 쫓아가다 다리 근처를 살짝 스쳐 지나갔다.
허공에 피를 뿌린 휴반트의 얼굴이 철가면 안에서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생각지도 않은 도현의 수법에 허벅지를 베인 그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도현이 나타났을 때만 하더라도 즐길 대상으로 여겼지 이렇게 자신의 몸에 상처까지 입힐 상대로는 간주하지 않았다.
그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살기와 함께 거대한 기운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죽여 버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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