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 디 임팩트 18권 25화
그렇지 않아도 밤새워 이동하며 아침까지 거른 도현과 일행은 매우 시장했다.
“붉은 성 주변엔 이런 진영이 많습니까?”
에이저를 따라가며 도현이 물었다.
“열 군데가 넘네. 이렇게 영주 단독으로 있는 곳도 있고, 여러 영주들이 함께 진영을 이룬 곳도 있지.”
“병력이 상당하겠군요.”
“처음보단 많이 좋아진 상황이지. 여기 밀튼 영주도 얼마 전에 합류했네.”
“네에.”
“뒤에 따라오는 자네 동료들도 제라이즈가 보낸 건가?”
도현은 뒤를 돌아봤다.
짐브리오와 리타는 에드를 놀리며 웃고 떠들어 댔고, 그 뒤에 어베인과 로나, 딘, 리드만 사제는 진영을 둘러보며 조용히 따라오고 있었다.
“저들은 저를 돕기 위해 온 겁니다. 제라이즈는 저만 보냈지만요.”
“그렇군. 한데 자넨 제라이즈와 어떤 사이인가? 제자 같지는 않고.”
“그냥 가까운 사이입니다.”
“가까운 사이라……. 난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네. 하지만 그가 별로 친절한 성격이 아닌 건 느꼈지.”
비 오는 날 문밖에 세워 두고 오만하게 말했던 바크 드라모스의 행동에 에이저는 지금도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자넨 그와 다른 것 같군. 어딘지 완성된 인간의 형태라고나 할까?”
“높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난 입에 발린 소리는 못하는 성격일세. 진심으로 하는 얘기니까, 그렇게 들었으면 해.”
도현은 은색 활을 등에 매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에이저의 뒷모습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잠시 후, 병사들이 배식을 받는 목조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점심시간이 많이 지나서인지 안에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에이저는 그의 신분이면 좀 더 좋은 곳에서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고 발 가는 대로 찾아온 것 같았다.
식판에 걸쭉한 고기 수프와 빵을 받아 든 도현은 먼저 배식을 받은 동료들을 향해 걸어가다가 누군가 쳐다보는 느낌에 건물 구석진 곳을 돌아봤다.
뚱뚱한 중년 남자가 히죽 웃으며 도현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헬구스였다.
‘어떻게 여길 왔지?’
도현은 뜻밖의 장소에서 또 헬구스를 만나자 이제는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다크캐슬과 브링틱, 이제는 붉은 성이라니.
헬구스는 밖에서 기다린다는 손짓을 했고, 도현은 서둘러 식사를 마친 후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 봤다.
하품을 하며 서 있는 헬구스가 보였다.
“헬구스.”
“오, 도현, 여기서 또 보는군. 반갑네.”
마치 친형제를 만난 듯 헬구스는 도현을 보며 즐거워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도현은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그 역시 헬구스가 싫진 않았다.
“칼라치를 따라왔지.”
“그도 여기 있습니까?”
“물론이네, 이디언도 있지. 그뿐만 아니라 다크캐슬에서 전쟁을 주도한 윌벤슨과 그의 못생긴 부하 녀석, 비버도 있다네.
“윌벤슨도요?”
도현은 브링틱 원로 올라르의 집 앞에서 본 윌벤슨과 비버가 생각났다.
“그래, 윌벤슨이 브링틱을 찾아왔거든, 고대 병사 때문에. 그때 우연히 만난 거지.”
“고대 병사라니,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하아, 이거 말하면 곤란한데.”
늘어진 턱살을 손등으로 툭툭 치며 고민하던 헬구스는 도현의 눈치를 보다가 큰 결심을 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정도는 뭐 말해 줘도 괜찮겠지. 자넨 이디언을 구해 주기도 했으니까, 칼라치도 이해할 거야.”
그는 주변을 지나치는 병사들이 듣지 못하도록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들으면 깜짝 놀랄 이야기야. 실은 말이야…….”
헬구스는 베르노프가 소환한 고대 병사 수백 명이 칼라치의 몸속으로 들어간 이야기를 해 주었다.
“엘바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데, 아무튼 그로 인해서 칼라치가 엄청나게 강해졌어. 게다가 고대 병사들을 종처럼 부려서 적을 공격할 수도 있게 됐다고. 고대 병사들이 얼마나 강한지 여기로 오는 길에 시험해 봤는데, 말도 못해. 괴물이 따로 없다니까.”
헬구스는 고대 병사들이 신체가 잘려도 다시 붙고, 무기에 닿은 사람들을 얼려서 죽이기도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고대 병사들이 칼라치의 몸속에 들어 있다니, 웬만한 일엔 크게 놀라는 표정을 짓지 않는 도현도 이 말에는 표정이 변할 수밖에 없었다.
“자네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칼라치는 여전히 자넬 뛰어넘을 대상으로 보고 있으니까. 아마 마주치면 싸우려 할지 몰라. 주의하라고.”
“감사합니다, 헬구스.”
“감사는 뭐, 우리 사이에.”
헬구스는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한번 쓸어봤다. 칼라치나 이디언이 나타날지 몰라 은근히 신경 쓰는 것 같았다.
“밀튼 영주 진영엔 왜 온 겁니까?”
“윌벤슨이 밀튼과 친분이 있다더군. 그래서 그를 도우려고 왔네. 칼라치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영지를 얻을 수도 있다는 말에 조금 마음이 움직인 것 같고. 그런 자네는 왜 여기에 있는 건가?”
“저도 대공을 돕기 위해 왔습니다. 다만, 전 붉은 성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오, 그런가? 붉은 성이라면 대공을 직접 만나려고?”
“대공은 아니고 그의 숙부인 돈조르니를 만나려고요.”
도현의 대답에 헬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돈조르니라면 내가 오래전에 만난 적이 있지.”
“그렇습니까?”
“25년도 더 됐지. 왕실 만찬장에서 말이야. 그땐 내가 이리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야.”
잠시 표정이 어둡던 헬구스는 곧 표정을 다시 밝게 만들었다.
“최근엔 브링틱 성의 시장에서 우연히 만나기도 했네. 얼음탑주와 싸우기 위해 왔던 것 같은데, 베일 가문의 내분 때문에 그냥 돌아갔지.”
“네에.”
“전쟁에 참여한 대가로 뭘 받기로 했나?”
“그게…….”
헬구스에겐 미안했지만 도현은 바크 드라모스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말해 줄 수가 없었다. 그를 어느 정도 믿긴 했지만 칼라치와 같이 다니는 그가 실수라도 해서 그들에게 비밀을 발설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대공이 승리하게끔 도와 달라는 계약을요. 그래서 친구들과 온 겁니다.”
“좋은 계약 조건이었나 보군. 자네가 직접 온 걸 보면 말이야.”
“칼라치와는 언제까지 같이 다니실 겁니까?”
도현의 물음에 헬구스는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글쎄, 꼭 언제까지라는 법은 없지, 그냥 되는 대로 사는 거니까. 그래도 나와 칼라치는 조금씩 말이 통하는 부분이 있거든. 뭐랄까 우정이랄까.”
“우정요?”
“우습지? 다크캐슬에선 내가 그놈을 그렇게 싫어했는데. 아무튼 자네와 칼라치의 사이가 좋았으면 하는데, 나로서도 그 부분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군.”
“이해합니다.”
도현은 마법 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 보물 상자 안에 담긴 커다란 보석을 꺼냈다. 헬구스에겐 그저 가죽 주머니 안에서 보석을 꺼내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받으십시오.”
“나에게 이걸 주려고?”
상당한 가치가 있는 사파이어 보석을 보며 헬구스의 눈이 커졌다.
“힘들 때 사용하십시오. 언제든 돈이 힘을 발휘할 때가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험, 그렇긴 하네만 받아도 될까?”
“다른 사람 봅니다.”
“고맙네.”
헬구스는 빠른 동작으로 커다란 사파이어 보석을 받아 챙겼다.
“몸조심하십시오.”
“자네도 조심하게.”
몸을 돌린 도현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대공의 진영에서 전쟁을 하다 보면 칼라치와 언젠가 마주칠 수밖에 없다.
다크캐슬에서 악연을 맺은 그들은 싸우면서도 서로 도움을 준 사이다.
칼라치는 얼음탑주의 손에서 도현을 구해 줬고, 도현은 망각의 숲 안에서 이디언을 구해 줬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인해 칼라치와 도현의 사이가 완전히 바뀐 건 아니었다.
도현은 사실 싸울 마음이 없지만 칼라치는 눈을 잃은 패배를 설욕하려 할 것이다.
‘싸워야 한다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도현이 마음을 다잡을 때 뒤에서 헬구스가 그를 불러 세웠다.
“이보게, 도현! 내가 깜빡 잊고 말해 주지 않은 게 있네.”
“뭘 말입니까?”
“스므차 성주가 죽었다는군.”
“예? 스므차 성주가요?”
도현의 머릿속에 강인한 인상의 스므차 성주가 잠시 떠올랐다 사라졌다.
다크캐슬을 떠나기 전 그와 검을 겨루고 싶었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스므차 성주가 무슨 일인지 다크캐슬을 비웠기 때문이다.
한데, 난데없이 그가 죽다니. 도현은 어찌 된 일인지 궁금했다.
헬구스는 주위를 살피며 빠르게 설명했다.
“윌벤슨의 사람이 스므차 성주의 저택에 첩자로 있었던 모양이야. 그가 스므차 성주의 죽음을 직접 목격했다더군.”
“어떻게 죽은 겁니까?”
“정체가 알려지지 않는 자가 찾아와 싸움 끝에 스므차 성주를 죽였다는군.”
스므차를 죽일 정도면 굉장한 실력자일 것이다.
“그쪽에선 쉬쉬하는 모양이야, 스므차 성주가 죽은 사실이 알려지면 다크캐슬이 시끄러워질까 봐.”
“누가 그런 건지 전혀 알려진 게 없는 겁니까?”
“칼라치 말로는 가면이 어쩌고 한 것 같은데…….”
헬구스는 칼라치가 해 준 말을 상기하며 말끝을 흐렸다.
“가면요?”
“음, 그렇다는군. 스므차 성주를 죽인 자가 가면 같은 걸로 얼굴을 가렸다는데, 뭐 정확한 건 아닌 것 같고. 그게 뭐 중요한 단서가 되겠나, 얼굴을 가리고 싶어서 사용했나 보지. 나중에 가면을 벗으면 이 넓은 대륙에서 그자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보겠나?”
“가면…….”
도현은 아침에 자신과 싸운 철가면 휴반트가 불현듯 생각났다. 그 정도 능력이면 아무리 스므차 성주가 강하더라도 버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자네, 왜 그러는가? 짚이는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아닙니다.”
도현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아무튼 거목이 쓰러졌어. 스므차 성주에게 나도 죽을 뻔했었는데.”
“아쉽군요. 그를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었는데.”
두 사람 다 다크캐슬 전쟁을 겪어서인지 몰라도 스므차 성주의 죽음이 왠지 가슴에 오래 남았다.
한동안 말이 없던 헬구스는 땅에 시선을 두며 슬며시 말을 꺼냈다.
“아, 그리고 말이야. 이건 좀 민감한 질문인데, 지난번 거인의 섬에서 누가 씨드를 차지했는지 아나? 혹시 자넨 아닌가?”
조용했다.
헬구스는 시선을 들어 도현이 서 있던 공간을 응시했다. 언제 사라졌는지 텅 비어 있었다.
“어? 어디로 갔지?”
인사도 없이 사라진 도현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뒤를 확인하다 움찔했다. 이디언이 서 있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한참 찾아다녔잖아요.”
“아, 나, 난, 점심 먹으러 왔지. 또 배가 고파서.”
“밀튼 영주와 만나기로 했으니까, 어서 와요.”
눈을 살짝 흘기며 이디언이 돌아서자 헬구스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행동을 보니 그가 도현과 만나는 걸 못 본 모양이었다.
‘도현은 이디언이 오는 걸 보고 자리를 피했나 보군. 대단한 친구야, 기척도 없이 사라지다니.’
헬구스와 이디언이 사라지자 건물 지붕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도현이 깃털처럼 가벼운 몸동작으로 땅에 내려왔다. 헬구스의 짐작대로 도현은 이디언이 나타나자 바로 지붕 위로 몸을 숨긴 것이다.
“도현, 거기서 뭐 해! 에이저가 기다리고 있다고!”
짐브리오의 손짓에 도현은 가면 생각에서 벗어나 일행에게 돌아갔다.
“붉은 성으로 가세.”
에이저가 준비한 말을 타고 도현과 일행은 밀튼 영주의 진영을 벗어나 북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또 하나의 진영을 통과한 그들은 해가 많이 기울어질 무렵, 석양 아래 서 있는 바위산 위의 거대한 성에 도착했다.
‘붉은 성.’
포효하는 사자가 황금색 수실로 그려진 검정색 바탕의 거대한 깃발이 성벽 위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말 위에서 깃발을 바라보던 도현은 에이저를 따라 육중한 성문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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