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451화 (451/575)

[451] 디 임팩트 19권 1화

샤르비티

거대한 원형 경기장 안.

수만 명의 인파가 지켜보는 가운데, 수백 명의 관리들이 끌려나왔다.

혹독한 고문을 받았는지 그들의 전신은 피투성이였다.

힘없이 비틀거리며 줄줄이 걸어 나온 그들은 원형 경기장 한 가운데 열을 맞춘 후, 두 무릎을 꿇었다.

이들은 대공 알조베티 베일을 지지하는 각지의 관리들로 그동안 반란군에 의해 감옥에 갇혀 있었다.

“목을 길게 빼시오. 고통 없이 죽으려면.”

날선 칼로 어깨를 툭툭 치며 사형 집행인이 말하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관리는 체념한 얼굴로 짧은 목을 최대한 길게 늘였다.

“집행!”

상급자의 지시에 맞춰 수십 명의 사형 집행인이 일제히 칼을 내리쳤고, 곧 수십 개의 목이 허공 높이 떠올랐다.

앞 열의 수십 명을 죽인 사형 집행인들은 피가 묻은 칼을 들고 뒤의 열로 이동했다.

“집행!”

또 다시 지시가 떨어졌고 사형 집행인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관리들의 목을 잘라냈다.

한동안 계속된 학살로 인해 원형 경기장 안의 땅은 붉은 피로 깊게 물들고 있었다.

“아까운 관리들입니다. 좀 더 회유를 하면 우리 편으로 끌어 들일 수 있었을 텐데.”

대공의 사촌 중 한명인 중년의 마리지스 베일은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목이 떨어져 나가고 있는 관리들 대부분은 유능한 하급 관리들이었다.

당장 전쟁이 끝나면 저들이 필요할 것이다.

대공을 지지한다고 해서 저렇게 막 죽이면 베일 가문이 소유한 거대한 영지는 누가 관리를 할 것인가.

전쟁은 병사가 필요하지만, 전쟁 후 영지에 필요한 건 손발이 되어줄 유능한 하급 관리들이다.

“그렇게 아쉬워 할 필요 없네. 인재야 또 뽑으면 될 터.”

차가운 인상의 알레드로 베일은 함께 반란을 일으킨 마리지스에게 덤덤히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백 구의 시신이 경기장에 쓰러져 있었다. 사형 집행이 끝난 것이다.

그는 경기장 관람석을 길게 둘러봤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두운 얼굴로 서 있었다.

대공 알조베티 베일은 이 경기장을 축제의 장소로 활용했지만 본성을 차지한 그의 사촌들은 이곳을 절망과 공포를 주는 장소로 이용했다.

“마리지스. 지금은 우리의 단호한 의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게 중요해. 붉은 성에 틀어 박혀 있는 알조베티에게 동조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말이야.”

“유능한 관리 수백을 죽였다는 소식이 빨리 퍼지겠지요. 하지만 그뿐입니다.”

사형 집행을 반대해온 마리지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을 이었다.

“난 욕심이 있어 이번 반란에 참여한 것이지, 우리 가문을 뿌리째 망가트리려고 한 게 아닙니다. 이런 식의 전쟁은 모두에게 득이 될게 없습니다.”

“어찌하겠나. 알조베티가 이 성을 빠져 나가 붉은 성으로 가는 바람에 이리 된 것을. 그가 우리 계획대로 그날 이곳에서 죽어줬다면 지금의 이런 혼란은 없었을 거야.”

대공 알조베티 베일은 놀라운 무력으로 포위망을 뚫고 친위대와 함께 본성을 빠져나갔다.

당시 대공의 검에 죽은 강자들이 수십 명은 됐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대공의 무력이 그날 입증된 것이다.

“그만 돌아가세.”

사형 집행을 주관한 알레드로는 마리지스와 함께 원형 경기장을 나섰다.

곧게 뻗은 관도를 따라가던 마차는 얼마 후 내성에 도착했고, 그들은 대공의 집무실이었던 곳으로 향했다.

집무실 문을 열자마자 십여 명이 넘는 자들이 제각각 떠드는 목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화려한 의복차림인 그들은 30대에서 50대 초반의 사람들로 반란의 주역인, 대공의 사촌들이었다.

물론, 입구에 서서 이 시끄러운 상황을 한심하다는 듯이 보고 있는 알레드로와 마리지스 역시 반란의 주역인건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모두 혈연관계로 맺어진 사이다.

“더 지켜볼 것 없이 총공격을 해야 합니다! 대공의 지원 세력이 날로 늘고 있어요!”

“하지만 붉은 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고 봅니까? 그야말로 그곳은 죽음의 성입니다. 군사만 많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에요! 일단은 붉은 성 외곽에 진을 치고 있는 사자 동맹군이 아직 튼튼하니까, 좀 더 지켜봅시다.”

“뭘 더 지켜봅니까? 대공이 순순히 항복할 거라고 봅니까?”

“그의 자식들을 우리가 붙잡고 있습니다. 그들을 넘겨주는 대가로 정식으로 대공의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해 봅시다.”

“가당치도 않은 소리! 대공이 어떤 인물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요? 그는 자식들을 다 죽여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냉정한 사람입니다! 당신들은 대공을 곁에서 지켜보지 않아 모르나 본데, 나는 압니다. 그는 오히려 복수심에 불타 우리를 모두 찢어 죽이려 할 겁니다!”

“그럼 그것도 좋겠군. 차라리 그의 자식들을 모조리 죽여 그 수급을 보냅시다. 이성을 잃고 그가 붉은 성을 뛰쳐나오면 오히려 싸움이 쉬워지는 게 아니겠소? 붉은 성을 함락시키지 않아도 되니 말이오.”

십여 명의 사촌들은 전쟁이 길어지고 대공의 주위로 사람들이 모이자 슬슬 불안해졌는지, 하루빨리 전쟁을 종식시키고 싶어 했다.

장내의 목소리는 잠시 후 하나로 거의 통일되었다. 의견의 차이야 있었지만 다수의 목소리가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말고 총력을 기울여 붉은 성 외곽을 지키는 ‘베일 연합군’을 궤멸시키고 그 중심에 위치한 붉은 성을 함락시키자는 주장이었다.

“샤르비티 경. 어찌 생각하시는지…….”

시끄럽게 떠들던 대공의 사촌들은 집무실 안쪽에 말없이 앉아 있는 한 남자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반란의 불은 누군가 불을 붙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 불을 붙인 사람이 바로 대공의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는 그였다.

실질적인 이들의 수장이자, 전쟁이 끝나면 다음 대 대공으로 즉위할 인물.

나이에 비해 주름이 깊어 노인처럼 보이는 40대 중반의 샤르비티 베일은 수백 년간 적통으로 이어온 가문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엎으려고 했다.

그는 베일 가문과 앙숙인 뤼호른 가문과의 접경 지역에 영지를 부여 받고 자신의 세력을 성장시켜왔다.

용맹한 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질 좋은 무기들로 무장을 했어도 알조베티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베일 가문과 다투던 뤼호른 가문은 무시 못 할 대영주 가문.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샤르비티가 병사 육성에 힘을 들이는 줄 알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알조베티는 뼈아픈 실수를 한 셈이었다.

한동안 사촌들의 질문에 답을 내놓지 않던 그는 뒤편에 서 있는 알레드로에게 시선을 던졌다.

“관리들은 다 참수 했나?”

“네.”

“대공이 좋다는 녀석들에게 아량을 베풀 필요는 없지. 수고했네.”

“별 말씀을.”

알레드로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차렸다. 사촌관계라고는 하나 샤르비티 베일은 전쟁이 끝나면 대공이 될 인물이었다. 이미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주종 관계가 성립되고 있었다.

샤르비티는 대공의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 의자에 앉기 위해 그의 아버지 때부터 각고의 노력을 해왔다.

장자가 아닌 둘째로 태어난 그의 부친은 장자보다 뛰어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공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수백 년간 내려온 가문의 역사와 전통은 단지 한 개인이 뛰어나다는 것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부친은 그에게 일종의 사명을 주고 죽음을 맞이했다.

-갈아엎어라.

샤르비티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며 의자에서 손을 떼고 뒤돌아섰다.

함께 운명을 건 사촌들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뤼호른 가문이 나를 지원해주기로 약조가 되어 있었지만, 그들 또한 후계자 문제로 진통 중이오. 별수 없이 지금 있는 사자 동맹군과 우리만이 대공의 군사와 싸울 수밖에 없소.”

“병사 수야 지금도 우리가 저들을 압도하지 않습니까? 대공에게 기회를 주지 말고 전력을 기울여 총공격을 퍼부어야 합니다.”

“저들에겐 붉은 성이 존재하오. 우리의 선조들이 얼마나 대단한 성을 바위산 위에 축성했는지 다들 알고 있지 않소?”

“사전에 그 성을 우리가 차지했어야 했는데, 빌어먹을!”

분한 표정의 사촌들이 이곳저곳에서 이를 갈았다. 그 성만 아니었으면 진작 전쟁이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희생이 두려워 이대로 시간을 하염없이 보낼 수는 없겠지.”

샤르비티는 말을 하며 수백 년간 내려온 대공의 의자를 박살내버렸다.

질 좋은 목재로 만들어진 고풍스런 의자는 잘 관리만 되면 천년을 가도 버틸 수 있는 의자였다.

수백 년 전, 베일 가문은 작은 영지에서부터 출발했는데, 그 당시 만들어진 의자가 수백 년을 내려오며 권위 있는 대공의 의자로 정착된 것이다.

그것을 부순 것은 곧 수백 년 베일 가문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 과 같았다.

당연히 집무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기겁을 하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누가 뭐래도 자랑스러운 베일 가문의 혈통을 이은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의자를!”

집무실에 모여 있는 사촌들은 샤르비티의 돌연한 행동에 너무 놀라 사고가 정지한 듯 입만 벌린 채 그를 쳐다만 봤다.

“오래 됐으면 바꿀만 하잖아.”

발로 의자 조각을 짓밟아 먼지처럼 만든 그는 시원한 얼굴 표정을 지었다.

“아무런 계책 없이 붉은 성을 치는 건 멍청한 짓이다. 그렇게 해서 대공을 잡는 다해도 나와 당신들에겐 남는 게 없어. 남는 건 산더미처럼 늘어난 병사들의 시신과 우리를 지원해준 사자 동맹군에게 지불해야할 막대한 보상금뿐이야. 해서, 난 다른 방법으로 승리하려고 한다.”

의자가 있던 단 위에서 샤르비티는 강한 기세를 만들며 사촌들을 굽어 봤다.

“어떻게 말입니까?”

마리지스가 묻자 샤르비티는 껄껄 웃으며 답했다.

“붉은 성을 지상에서 지워 버릴 것이다. 돌 조각 하나 남김없이 말이야. 먼지처럼!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알조베티도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겠지. 그렇게 되면 그를 도우려 모인 베일 연합군은 자연히 흩어질 것이다.”

“하지만 무슨 방법으로 그런 일을 벌인단 말입니까? 바위산 정상에 위치한 붉은 성은 거대하고 견고해서 마법사들의 공격도 끄떡없이 버틸 수 있는데 말입니다.”

“지켜보면 알게 될 것이다. 붉은 성 내부에 그 일을 할 사람이 이미 침투해 있으니까.”

좌중이 술렁였지만 샤르비티는 사촌들의 궁금증을 이 자리에서 풀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만큼 비밀스런 일이었다.

“만약 계획하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땐 어쩌실 겁니까?”

알레드로의 물음에 샤르비티는 차가운 음성으로 답했다.

“그땐 어쩔 수 없겠지. 피의 강을 만들고 시체로 산을 쌓더라도 붉은 성을 함락시켜 알조베티의 목을 내 손으로 직접 자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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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산 위의 붉은 성은 150여 년 전, 유사시 베일 가문의 생존을 위해 지어진 최후의 성이다.

그 성격답게 방어를 위한 천혜의 조건은 다 갖췄다.

일단 성으로의 접근이 어렵고, 바위산 이라는 명칭답지 않게 산 정상엔 지하수로가 연결되어 있어서 물이 풍부하다.

식량도 넉넉하게 비축되어 있어서 몇 년이고 버틸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산은 그 정상이 뾰족하고 좁지만 이 바위산은 세상을 창조한 거인이 주먹으로 산 정상을 내리친 듯, 평평하고 매우 넓었다.

덕분에 수만 명은 머물 수 있는 거대하고 견고한 성이 완성될 수 있었다.

150여 년 전, 이 성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희생 됐는지, 성의 이름은 붉은 성이라는 다소 어둡고 무거운 이름을 갖기도 했다.

‘생각 보다 넓고 아름답다.’

붉은 성에 도착한 도현은 말에서 내려 에이저와 함께 걸으며 성 내부를 구경하고 있었다.

삭막하리라 예상했던 성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생각과 달리 수백 그루의 나무들이 한쪽에 숲을 이루며 자라고 있었고, 인공으로 만들어진 수로가 성 내부 건물 곳곳으로 흐른다.

성이 넓어, 크고 작은 수백 채의 건물이 들어차 있었다.

발달한 도시 같았다.

‘일반인은 보이지 않는다. 다들 무장한 병사들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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