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 디 임팩트 19권 2화
두터운 성벽과 날카로운 눈빛의 병사들만 아니면 이곳이 베일 가문이 최후 항전을 위해 설계한 성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릴 것 만 같았다.
검이 부딪히고 방패가 둔탁한 소리를 내는 병사 훈련장을 지나친 그들은 얼마 후, 2층 구조로 된 벽돌 집 앞에 도착했다.
“들어오게.”
에이저가 집 현관문을 열며 도현에게 말했다.
“이곳은…….”
“내 집이네. 돈조르니의 친구라고 집 한 채를 내주더군.”
집안은 해가 져서 어두웠다. 몇 개의 초에 불을 붙여 집안을 밝힌 그는 거실에 서 있는 도현과 그 일행을 잠시 둘러보다가 말했다.
“난 돈조르니를 만나 자네 얘기를 하고 오겠네. 그동안 여기서 쉬고 있게. 피곤하면 빈 방이 여러 개니, 아무 곳에서나 잠을 자도 되고.”
“감사합니다.”
“되도록이면 밖은 돌아다니지 말게. 아직 정식으로 자네들이 이곳에 머무는 게 허락 되지는 않았으니까.”
성문을 통과한 것도 에이저가 보증을 해줬기에 가능했다.
“알겠습니다.”
대공을 돕기 위해 왔다고 해서 절차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에이저가 나가자 거실에 멀뚱히 서 있던 짐브리오와 리타는 창밖을 내다봤다.
“결국 붉은 성엔 오긴 왔네. 리타, 요리 좀 해라. 배고프다.”
“벌써? 점심 늦게 먹었잖아.”
“말 타고 오다가 다 소화됐다.”
“하지만 여긴 에이저의 집인데. 괜찮을까?”
리타는 눈빛이 매서운 에이저가 보통 성격이 아니라는 걸 벌써부터 꿰뚫어보고 있었다. 함부로 행동 했다간 그 노인이 은색 활을 겨눌지도 모른다.
철가면에게 져서 그렇지, 이 노인도 싸움 좀 할 줄 안다. 아니 싸움 좀 할 줄 아는 게 아니라 정말 강한 사람이다. 철가면이나 도현이 유독 강해서 그렇지.
“그럼 어떡해? 배고픈데. 밖에서 요리를 할 수도 없잖아. 주방 좀 빌려 쓰는 게 큰 죄도 아니고. 요리하고 깨끗이 내가 청소해 놓을 테니까 걱정 말고 해. 안 그렇습니까, 대장?”
어베인은 도현을 한번 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짐브리오나 그나, 로나는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오진 않았다.
그들의 기준에서 크게 거슬리지 않으면 행동한다. 그것이 그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주 딘은 달랐다. 오는 길에 에이저에게 자신이 영주였다는 사실을 말한 그는 체면이 중요했다.
“남의 집에 오자마자 그 무슨…….”
“영주님은 제 음식 안 드실 거죠? 정말 맛있게 할 건데.”
딘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리타가 배시시 웃었다. 그러자 리드만 사제는 딘과 한 걸음 떨어졌다.
“일곱 신은 남의 집 주방도 잘 이용하시는 분이지. 리타, 난 고맙게 먹겠다.”
“저도요.”
에드도 냉큼 리드만 사제의 뒤를 따랐다.
“도현, 자네는 내 마음을 이해하겠지?”
“물론입니다, 영주님. 하지만 저도 오늘은 리타의 요리가 기대되는 군요.”
도현이 미소 띤 얼굴로 말하자, 딘은 못마땅한 얼굴로 크게 헛기침을 했다.
“다들 뜻이 그러면 나도 따르는 수밖에 없겠군. 리타, 이왕 할 거면 넉넉히 해. 집 주인인 에이저도 맛을 볼 수 있게.”
“걱정 마세요. 그럴 생각이었으니까요.”
리타는 팔을 걷어 부치며 주방으로 향했다. 음식 재료는 마법 주머니 안에 충분히 보관 되어 있어서 문제가 안됐다.
“그럼 오랜 만에 내 솜씨를 발휘해볼까?”
“잠시만.”
도현은 본격적으로 요리를 하려는 리타를 거실로 오게 했다. 그는 모두에게 해줄 말들이 있었다.
“낮에 밀튼 영주의 진영에서 헬구스를 만났습니다.”
“그가 여기에?”
사람들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칼라치와 스므차에 대해 말해주더군요.”
도현은 먼저 수백의 고대 병사를 몸속에 흡수한 칼라치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놀라운 이야기에 주변이 잠시 조용해졌다.
“뭐야 그 자식. 이제 완전히 괴물이 다됐네. 몸속에 고대 병사들을 품고 다니다니. 그러고도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나?”
눈이 커진 짐브리오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흠,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어베인이 미간을 찌푸리자 이마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칼라치가 어떤 사내인지는 도현을 통해서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웃으며 만날 사이는 아닌 것이다.
“대공의 진영에 있다 보면 조만간 마주 칠거예요. 승부를 보려 할 가능성이 높아요.”
병에서 치유돼 예전의 미모로 되돌아온 아름다운 로나가 걱정서린 눈빛으로 도현을 보며 말했다.
칼라치는 괴물이나 다름없는 고대 병사들을 수하로 부리고, 본인의 능력도 강해졌다고 한다.
상황에 따라 도현이 위기에 처할 수도 있어서 마음 한편이 불안했다.
“죽은 자들을 불러내는 것은 일곱 신이 노여워하는 일인데……. 수백이나 몸속에 있다니. 참으로 걱정이 되는 일이로군.”
리드만 사제는 무거운 얼굴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스승님! 어서 나와 보세요. 스승님 시대에 있던 고대 병사들이 되살아나서 칼라치의 부하가 됐대요!”
-듣고 있다.
“그들의 신체는 잘려도 다시 붙고, 적들을 얼려서 죽이기도 한데요. 어떻게 하면 그들을 막을 수 있죠?”
-그걸 왜 너희들이 걱정하느냐?
“네? 그야…….”
리타는 맞은편에 서 있는 도현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의외로 도현의 표정은 담담했다. 고대 병사로 인해 칼라치가 강해졌다고 하는데 전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다.
-지금은 대공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게 중요하지 않냐? 오히려 칼라치가 강해 진건 너희들에게 좋은 일이다. 고대 병사들을 수하로 둔 그녀석이 사자 동맹군 녀석들에겐 재앙이 될 테니까.
“그런 면이 있지.”
영주 딘은 양 갈래 콧수염을 훑어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결국 칼라치는 스승님을 노릴 겁니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에드가 쭈뼛거리며 어렵게 끼어들었다.
-네 스승은 저리 태연한데, 그 제자란 놈은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겠군. 소심한 놈.
“제, 제가요?”
-너 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가 그렇다. 대체 지금까지 도현이 너희에게 무엇을 보여주었느냐? 왜 그를 믿지 못해? 바크 드라모스가 왜 그를 이곳에 보냈다고 생각하느냐? 단순히 씨드의 힘을 얻어서?
자수정 안에 맺힌 락제프의 눈동자가 좌우로 돌아다니며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아니다. 도현은 그 자체로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존재.
검은 용이 인정한.
사람들은 검이 매달린 허리춤에 손을 가볍게 올린 도현을 일제히 응시했다.
-그를 믿어라. 바크 드라모스가 그를 신뢰 하듯이.
“젠장. 이상하게 몰아가네. 누가 안 믿었다고. 당신이나 좀 조용히 하시오. 일이 있으면 걱정하는 게 당연하지. 뭘 또 그렇게 거창하게 말을 해서는.”
짐브리오가 톡 쏘자 락제프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저놈의 주둥아리는 변함이 없구나!
“그럼 내 주둥아리가 어디로 사라진답니까?”
-뭐야? 저, 저놈을!
“스승님 진정하세요. 우리 모두 스승님 말뜻은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리타가 락제프를 진정시키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현은 한 걸음 나서며 힘 있게 말했다.
“칼라치가 바보가 아닌 이상 전쟁 중에 극단적으로 도전을 해 오진 않을 겁니다. 그도 원하는 것이 있어서 이 전쟁에 참전을 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만약 도전해오면 상대 해줄 겁니다. 나도. 그도. 후회 없게.”
강한 의지는 곧 무형의 투기로 변해 주변 사람들을 순간적으로 압박했다 사라졌다.
“칼라치 이야기는 들었고, 이제 스므차 이야기를 들어볼까?”
영주 딘은 폭주의 해결 방법을 찾아 다크캐슬로 갔다가 도현과 함께 그에게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그래서 스므차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았다.
“스므차가 죽었습니다.”
도현의 말에 딘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치 낮에 헬구스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 들었던 도현의 표정과 비슷했다.
“그 늙은이가 죽었다고? 왜?”
짐브리오가 놀라며 물었다.
“가면을 착용한 의문의 사내에게 패해 죽었답니다.”
“가면!”
사람들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가면이라는 단어가 튀어 나왔다. 이른 아침에 보급품 수송대를 습격한 철가면 사내 휴반트는 도현과 맞서 싸울 정도로 막강한 자였다.
씨드를 얻은 자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그랬기에 사람들 뇌리에 깊이 각인이 되어 있었고, 그 상태에서 스므차가 가면을 착용한 사내에게 죽었다고 하자 무의식중에 휴반트를 떠올린 것이다.
“설마?”
사람들이 철가면 휴반트를 의심하는 눈길을 보내자 도현은 신중한 눈빛으로 답했다.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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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알조베티의 아내 캐서린은 평소 온화하고 미소가 아름다운 여자다. 하지만 붉은 성에 온 이래로 미소를 보인 적이 없었다. 두 아들과 딸이 적의 수중에 붙잡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암담한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듯 그녀가 머무는 방안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쓸쓸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돈조르니는 등을 보인 채 앉아 있는 캐서린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그래요.”
의자에서 일어난 그녀는 몸을 돌려 돈조르니를 응시했다. 수척하고 병색까지 엿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똑바로 마주 보기 민망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뗀 돈조르니는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이럴 때일수록 몸을 중히 여기셔야 합니다.”
“그러고 싶지만 음식에 손이 가질 않아요. 억지로 먹어봐도 구역질만 나오고요.”
“그렇다고 술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진 않습니다.”
그녀의 방안에선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아이들 때문에 마음이 타 들어가는데 어떻게 버티겠어요.”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진 자식을 걱정하는 캐서린의 마음이 깊숙이 전해져왔다. 그녀의 자식들은 어머니인 캐서린을 보호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다 적들에게 사로 잡혔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숙부님. 부탁이에요. 대공을 설득해주세요. 이대로 가면 제 아이들은 죽은 목숨이에요.”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무거운 표정으로 서 있는 돈조르니의 손을 부여잡으며 애처롭게 쳐다봤다.
“사람을 보내 아이들을 구출해주세요.”
“음…….”
돈조르니의 노안이 흔들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러겠다고 허락하고 싶지만 지금은 큰 그림을 보며 움직여야 했다.
“전, 대공의 명령을 어길 수 없습니다.”
“자식을 죽이겠다는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있답니까!”
분노한 그녀의 입에서 비명 같은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단 한번! 단 한번만 이라도 좋으니, 시도라고 할 수 있잖아요. 제발, 숙부님이 나서서 대공을 설득해주세요. 숙부님이라면 가능하잖아요?”
“불가합니다.”
“숙부님!”
“대공은 지금 전쟁의 승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라면 설사 자신의 자녀라도 과감히 포기하는 결단성과 차가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점을 무겁게 받아들인 충신들은 전장에서 목숨을 바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공의 핏줄이에요! 그들이 죽으면 전쟁에서 승리한다 한들 누가 저이의 뒤를 이어 가문을 이끌겠어요?”
맞는 말이었다. 현재 대공에겐 다른 후사가 전혀 없었다. 돈조르니는 굳은 얼굴로 답했다.
“우리 가문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수백 년을 이어왔습니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지금과 같은 내분으로 인한 위기는 단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 베일 가문이라는 명예와 역사를 부정하는 자들에게 가문이 넘어가는 일은 결단코 막아야합니다. 그것이 가문을 책임진 대공이 가장 우선시해야 할 일입니다.”
“대공의 자식들이 죽어도 말입니까?”
캐서린이 차가운 시선으로 돈조르니를 노려봤다.
“후사는 대공께서 현명한 판단을 내리실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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