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453화 (453/575)

[453] 디 임팩트 19권 3화

“참으로 냉정하게 말씀하시는군요.”

“서운하셔도 마음을 굳건히 잡으십시오. 오히려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게 인질로 잡힌 그들을 위해서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어쩌면 대공과 그리 똑같은 말씀만 하십니까? 모진 분들입니다, 참으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그녀는 방 한쪽에 조용히 시립해 있는 중년의 시녀에게 손짓을 했다.

“술을 가져오너라!”

시녀는 돈조르니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술을 가지고 갔다. 술잔에 술을 가득 따라 마신 캐서린은 고개를 돌려 돈조르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집 안에서 보내온 병사가 몇 명인지 아시지요?”

“3만이 넘습니다.”

대영주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제법 규모가 있는 영주 집안의 장녀인 캐서린은 말 한마디로 3만이 넘는 병력을 움직일 수 있었다.

3만이란 병력은 그녀의 집안에서 직접 보내 준 군사와 용병 그리고 혈연관계로 이어진 인척들이 보낸 군사들의 총합이었다.

그들은 오직 캐서린을 위해 보내진 군사로, 대공의 진영에 머물고 있었다.

“대공의 사람이 아니라 해도 내가 직접 아이들을 구출할 수도 있어요.”

“그러시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캐서린의 눈빛은 술기운 속에서도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 * *

캐서린의 방에서 나온 돈조르니는 은은한 불빛이 밝히고 있는 조용하고 차가운 복도를 걸었다.

저벅저벅.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리에 매달린 검집이 조금씩 움직이며 그가 걸친 푸른색 사자 갑옷과 마찰을 일으켰다.

마찰음이 꼭 사자가 날카롭게 울부짖는 것 같았다.

‘여기서 그녀가 문제를 일으키면 대공의 명성과 지도력에 심각한 타격이 온다. 고민이로군.’

그는 심란했다. 평소 온화했던 캐서린이 붉은 성에 오면서부터 사람이 완전히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녀를 탓할 순 없겠지. 자식들이 그녀를 위해 싸우다 사로잡혔으니, 그 심정이 오죽할까.’

반란이 벌어진 그날, 대공은 친위대와 함께 본성을 탈출하며 적들의 미끼 노릇을 했다. 적들의 시선을 그가 끌어모으는 사이 그의 가족들이 안전하게 본성을 벗어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일이 잘못됐고, 결국 캐서린만이 용맹한 두 아들과 딸의 도움을 받아 적지를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대공이 그녀를 잘 설득해야 할 텐데…….’

모퉁이를 돈 그는 수십여 명의 친위대가 도열해 있는 복도 공간을 지나 넓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 전에 지휘관 회의가 끝났는지 집무실 안에 존재하는 긴 회의 탁자 위를 몇몇 사람들이 정리하고 있었다.

그들이 모두 나가기를 기다린 돈조르니는 집무실 의자에 앉아서 편지를 쓰고 있는 대공에게 다가갔다.

“그녀를 만나고 왔습니까?”

“예, 상황이 몹시 좋지 않습니다.”

“그래요?”

편지를 쓰던 대공은 잠시 고개를 들어 돈조르니를 바라보다가 다시 편지 쓰는 데에 집중했다.

“뭐라고 그럽니까?”

“대공께서 나서지 않으면 직접 하겠답니다.”

“마음 아픈 소리를 하는군요.”

짧은 한숨 소리를 낸 대공은 마무리한 편지 위에 인장을 찍어 책상 위에 올려놨다.

“그렇게 쉽게 될 일이라면 내가 벌써 나섰을 겁니다. 샤르비티는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내 자식을 바로 죽일 겁니다. 날 더 흔들어 놓기 위해서요.”

대공은 집무실 의자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거대한 지도 앞으로 걸어갔고, 그 뒤를 돈조르니는 묵묵히 따라갔다.

“그렇기 때문에 샤르비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샤르비티, 그놈은 내가 사람을 보내 자식들을 구하러 오길 애타게 기다리겠지만요.”

말을 하는 대공의 눈빛은 겨울 찬 바람처럼 싸늘했다.

“부인께서는 견딜 수 없어 하십니다. 오늘 저를 부른 건 대공께 보내는 최후통첩과 같은 성격이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어리석은 여자가 아닙니다. 그녀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가 어떻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녀는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전쟁 중이었다. 대공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독단으로 그녀가 행동하면 아무리 대공의 부인이라도 그 책임을 회피할 수가 없다. 그것은 대공의 위신과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돈조르니는 자신을 쏘아보던 캐서린의 심상치 않은 눈빛을 상기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바쁘시더라도 그분을 찾아 위로를 해 주심이 어떠십니까?”

붉은 성에 온 이후로, 대공은 캐서린과 같이 보낸 시간이 많지 않았다. 돈조르니는 그 점을 지적한 것이다.

지도에 시선을 두던 대공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의 집무실에서 나온 돈조르니는 왠지 가슴이 답답했다. 대공은 캐서린의 일에 관해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 같았다. 어쩌면 평소에 보여 준 캐서린의 연약하고 온화한 성격이 대공을 착각의 늪에 빠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건가?’

아무튼 오늘 만난 캐서린의 눈빛은 가슴이 서늘할 정도였다.

깊은 상념에 빠져 걷던 그는 친위대가 지키는 대공의 공관을 빠져나오다 정문 밖에서 그를 기다리던 에이저와 마주쳤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가?”

에이저의 물음에 돈조르니는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아무 일도 아니네. 그보다, 소식 들었네. 습격을 받았다고?”

보급품 수송부대의 지휘관은 아침에 있었던 사자 동맹군의 습격을 간략하게 적어 전서구를 통해 붉은 성에 보냈고, 그 정보는 돈조르니의 귀에도 들어온 상태였다.

“죽을 뻔했네.”

“과장이 심하군, 누가 자넬 죽이겠나.”

“과장이 아니네.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자네와 이렇게 얘기를 주고받을 수도 없었을 거라고.”

은색 활을 등에 찬 에이저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 그는 도현이 아니었다면 철가면 휴반트에게 죽을 목숨이었다.

“음, 지휘관의 보고가 사실이었군. 너무 놀라운 얘기라서 자네가 오면 직접 확인하려 했는데 말이야.”

사실 보고서엔 에이저와 철가면 사내 그리고 그 싸움에 개입한 제3의 사내에 대해 적혀 있었다.

천 단위 싸움이라면 홀로 싸움의 향방을 결정지을 수 있는 막강한 전투력을 보유한 에이저가 죽음의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에이저의 전투력은 대공이나 그 밖의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보다 훨씬 대단했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단어와 친숙해질 수 없는 에이저를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한 철가면 사내 그리고 그런 철가면 사내를 쫓아 버린 또 한 명의 강자.

“폭풍이 밀려오는 것 같군. 갑작스러운 강자들의 출현이라니……. 대체 누군가, 자넬 도운 자가?”

“그는 구름이 쉬어 가는 숲에서 온 자네.”

“뭐? 그럼 그가 제라이즈란 말인가!”

돈조르니의 눈이 커졌다.

“그는 아니고 그가 보낸 사람이네. 그 증표로 자네가 그날 맡긴 목걸이를 가지고 왔더군. 자네 고모의 유품 말일세.”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 집에 머물고 있네.”

“가면서 얘기하세.”

돈조르니는 바람처럼 에이저의 집을 향해 달려갔다.

‘정말 돕기 위해 오긴 왔군. 제라이즈는 아니지만.’

돈조르니는 구름이 쉬어 가는 숲을 다녀온 후 제라이즈를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그러나 제라이즈는 나타나지 않았고, 점차 그의 뇌리 속에서 그 일은 잊혀 갔다.

그런데 에이저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 다름 아닌 그가 보낸 자라고 하니, 손끝이 떨릴 만큼 충격이 왔다.

제라이즈가 보낸 사람이 에이저를 돕지 않았다면 에이저의 저 멋진 은색 활은 시커멓게 변해 주인과 운명을 같이했을 것이다.

그 점이 무엇보다 고맙고 기뻤다.

“그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

“백도현, 백도현이라고 그러더군.”

* * *

“자! 다 됐으니까 모두 모여요!”

에이저의 주방에서 저녁을 준비한 리타가 국자를 손에 들고 외쳤다.

그러자 2층 방에 엎드려 있던 짐브리오가 쿵쾅거리는 계단 소리를 내며 제일 먼저 달려왔다.

탁자 위엔 향긋한 냄새가 올라오는 따뜻한 버섯수프와 맵고 짜고 달달하기까지 한 구운 고기, 벌꿀이 발라진 마른 빵 등이 차려져 있었다.

마른 빵은 몬테지오에서 출발할 때 준비한 것인데, 상하지 않게 리타가 신경을 써서 마법 주머니에 보관해 온 것이다.

“몇 가지 음식을 더 준비할까 하다가 너무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충분해, 이 정도면. 수고했다, 리타. 역시 네가 최고다, 흐흐.”

군침을 삼킨 짐브리오는 리타를 칭찬하기 바빴다. 음식에서 풍기는 향으로 보아 굳이 맛보지 않아도 그 맛이 일품일거라는 예상이 됐다.

“잘 먹겠습니다!”

도현과 검 얘기를 하다가 주방에 온 에드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식기 전에 어서 먹어. 이 버섯수프는 따뜻할 때 먹어야 해.”

“네!”

하지만 에드는 스승인 도현의 입에 음식이 들어간 이후에야 리타가 준비한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그에겐 스승이 모든 일의 우선이었고, 그래야만 했다. 요즘엔 스승의 말투도 따라 하려고 노력 중이다.

‘키가 조금만 더 크면 내 체형도 스승님과 비슷해질 것 같아. 키가 더 커야 할 텐데.’

엉뚱한 상상을 하던 그는 슬며시 도현이 수프를 떠먹는 모습을 훔쳐봤다.

‘스승님은 먹는 것도 왠지 기품이 있어 보여. 여유로움도 가득하고. 저런 분위기를 만들려면 쉽지 않겠는데.’

도현의 강함을 동경하고 그의 인품을 존경하는 에드는 검뿐만 아니라 스승의 모든 걸 닮고자 했다.

눈치 빠른 짐브리오가 그것을 두고 놀리기도 했지만, 상관없었다. 에드에겐 스승만이 진리이고 가야 할 길이었기 때문이다.

가족의 은인이자 자신이 가진 검사로서의 재능을 일깨워 준 하나뿐인 스승.

에드는 당장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도 되어 있었다.

“먹지 않고 뭐 하는 거냐?”

꿀이 발라진 빵을 입에 넣던 도현이 한마디 하자 에드는 흠칫 놀라며 허겁지겁 손 가는 대로 음식을 입에 넣었다.

‘녀석.’

도현은 속으로 빙그레 웃다가 뒤에서 들리는 문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두 노인이 빠른 걸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한명은 에이저였고 다른 한 명은 바크 드라모스의 집에서 본 사람이었다.

‘돈조르니.’

식탁 주변에서 식사를 하던 사람들은 일제히 손을 놓고 에이저와 함께 등장한 노인을 응시했다.

“자네가 백도현인가?”

가까이 다가온 돈조르니가 도현의 깊은 눈을 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도현은 품 안에 있는 에디보르의 목걸이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제라이즈가 보내서 왔습니다.”

목걸이를 확인한 돈조르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목걸이가 다시 내게 돌아올 줄은 몰랐군. 반갑네. 짐작했겠지만 내가 바로 돈조르니 베일이네. 식사 중인 것 같은데, 마저 들고 밖으로 나오게. 기다리고 있겠네.”

“아닙니다. 다 먹었습니다.”

도현은 따라나서려는 일행에게 눈짓을 주고는 돈조르니와 함께 집을 나섰다.

“당신들 중에 훌륭한 요리사가 있나 보군.”

은색 활을 푼 에이저는 벽에 활을 걸어 두고 주방으로 향했다.

“허락도 없이 주방을 사용해서 죄송해요.”

리타의 사과에 에이저는 괜찮다는 듯 손짓을 했다.

“누가 사용하든 난 상관없어. 원래 내 소유의 집도 아닌걸. 흠, 별로 배가 고프진 않지만 이 좋은 음식 냄새는 견디기 어렵군.”

“드실래요? 아직 따뜻한데.”

리타가 국자를 들고 수프 앞에 서며 물었다.

“그럼, 부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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