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454화 (454/575)

[454] 디 임팩트 19권 4화

바위산에 물이 없었다면 붉은 성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깊은 지하에서 올라온 거대한 물줄기가 바위산 정상 부근에 흐르면서 붉은 성은 나무가 자라고 생기가 흐르는 곳이 됐다.

돈조르니는 거미줄처럼 연결된 붉은 성의 수로를 따라 밤거리를 걸었다. 덕분에 도현은 맑은 물이 흐르는 폭 50센티 정도 되는 수로를 계속 감상할 수 있었다.

‘긴 물의 흐름이 끊기지 않고 흐르고 있다.’

밤이 되며 조용해진 붉은 성을 물소리가 지배하고 있었다. 폭포수처럼 우렁차진 않지만 귀를 기울이면 시원하게 들리는 물소리.

어느새 도현은 돈조르니와 함께 걷는 것도 잊고 수로에서 들리는 물소리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고 있었다.

“그래, 이제야 생각이 나는군.”

도현을 데리고 수로를 따라 걷던 돈조르니는 큰 문제를 해결한 사람처럼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뭐가 생각났다는 거지?’

도현은 돈조르니를 응시했다.

“자네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다 했어. 얼굴도 아주 낯설지만은 않고.”

“저를…… 알고 계십니까?”

“자네 브링틱의 그 용병이 아닌가, 반돌로 경과 계약해 우리 가문의 땅을 보호해 주던.”

고대 도시 땅을 빼앗은 얼음탑과 플레온 가문에 대한 보복전을 위해 브링틱에 도착한 돈조르니는 얼음탑주와 싸우다 사라진 도현을 찾으려고 수소문한 적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베일 가문을 위해 싸워 준 그의 용맹함과 활약이 인상 깊었기도 했고, 또 얼음탑주와 맞서 싸울 정도로 강한 무력을 소유한 그가 단순히 용병으로 썩기엔 아까운 인재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찾아내지 못했고, 도현의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는 그의 소지품 가방 어딘가에 한자리를 차지하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뤼호른 연합군을 와해시키고 얼음탑과 싸운 용병. 바로 자네지 않나?”

잠시 뜸을 들인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맞습니다.”

“초상화가 아닌 실물로 한번 보고 싶었는데, 여기서 만나게 됐군. 브링틱에서 자네를 찾으려 꽤나 노력을 했었네.”

“그러셨군요.”

돈조르니는 수로를 따라 다시 걸음을 옮기며 질문을 던졌다.

“브링틱의 용병이 갑자기 제라이즈를 대신해 여기로 오다니, 어떻게 된 일인가?”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군요.”

“에이저의 말로는 그와 가까운 사이라고 했다던데……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군. 혹시 그와 용병으로서 계약을 맺고 온 건가?”

도현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나는 바크 드라모스의 용병인가?’

대공을 도와주기로 하고 대가를 받기로 했으니 어찌 보면 용병으로서 움직인다고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용병이라고 인정하면 왠지 바크 드라모스가 화를 낼 것 같았다. 그는 단순한 용병이 아니라 바크 드라모스의 체면을 유지시켜 주는 얼굴 역할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는 용병으로 온 게 아닙니다, 제라이즈의 사람으로서 온 것이지.”

“그런가?”

“제라이즈는 절 보내며 대공이 전쟁에 승리할 수 있게끔 도우라고 했습니다. 제 목적은 오직 그것 하나. 그것을 위해 검을 들 겁니다.”

돈조르니는 걸음을 늦추며 도현의 옆모습을 봤다. 수로에 시선을 던지는 그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도 보일 만큼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정말 범상치 않은 사내군. 에이저의 말이 맞는 걸까?’

에이저는 조금 전 오는 길에 그에게 이렇게 장담했다.

-검으로 그 사내를 이길 자가 앞으로 백 년 내에 나타날까 모르겠군.

-그 정도란 말인가?

-내 활을 걸고 장담하지.

그러나 얼음탑주에게 패해 사라진 용병이 1년도 안 되어 에이저에게 극찬을 받을 정도로 강해져서 나타난 게 일면 납득이 되질 않았다.

그 정도 실력이라면 얼음탑주를 죽이고도 남을 실력이기 때문이다.

‘제라이즈에게 가르침을 받은 건가?’

그의 고모는 제라이즈가 세상에서 제일 강한 남자라고 했다. 믿지 않았지만 검으로는 가히 최강이라고 극찬을 받는 백도현이 나타났으니, 그를 보낸 제라이즈의 능력을 어쩌면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려운 시기에 자네가 왔으니 큰 힘이 될 거야. 부디, 자네의 검이 전쟁에 승리할 때까지 부러지지 않았으면 좋겠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데, 철가면을 쓴 그자 말일세. 벨피타 영주의 대리인으로 왔다는 휴반트. 그자가 참으로 신경 쓰이는군. 오늘 자네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에이저는 꼼짝없이 그에게 당했을 거라던데.”

“강한 자입니다, 의심의 여지없이요.”

“흠, 그런 자가 전장에서 돌아다니면 우리 군의 사기가 많이 저하될 거야.”

잠시 고민하던 돈조르니는 도현을 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기회가 되면 그를 죽여 주게, 반드시.”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린 도현은 한동안 대답을 않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피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겁니다.”

적으로 만날 사이다. 한쪽이 물러나지 않으면 도현의 검은 더욱 차갑게 변할 것이다.

“조만간 대공을 만나게 해 주겠네. 자넬 보면 크게 기뻐하실 거야.”

수로를 따라 걷던 그들은 방향을 바꿔 에이저의 집으로 향했다.

“자네와 함께 온 사람들 면면이 특이한 것 같은데.”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에이저의 집으로 돌아온 도현은 일행을 정식으로 돈조르니에게 소개했고, 돈조르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붉은 성에 잘 오셨소. 오늘 밤은 여기서 머무시오, 내일 새 거처를 알아볼 테니.”

“그럴 필요 있나? 난 이들과 함께 있고 싶은데? 빈 방도 많고.”

리타의 음식 솜씨에 매료된 에이저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안 되네.”

돈조르니는 단번에 에이저의 불만을 꺾어 버렸다.

* * *

마법으로 불러낸 백마를 타고 어두운 숲 속을 통과하던 율리비어스는 늑대 몇 마리가 달려들자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땅속에서 튀어나온 가시넝쿨이 송곳니를 드러낸 늑대들의 전신을 휘감더니 핏덩이로 만들어 버렸다.

빽빽한 나무로 인해 숲으로 들어오는 달빛은 적었지만 마법의 백마는 그 자체로 빛을 발산해서 앞길을 환히 밝혀 주었다.

늑대 시체를 밟으며 숲길을 가던 율리비어스는 모닥불이 피워진 장소에 도착했다.

모닥불 곁엔 외팔의 노인이 늑대가 출몰하는 숲에서 대담하게 혼자 야영을 하려 하고 있었다. 늑대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모닥불에 토끼 고기를 구워 먹던 노인은 후드로 얼굴을 가린 자가 백마를 타고 나타나자 흠칫하다가 해골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누구냐?”

“맛있는가? 그 토끼 고기 말이야.”

“까불지 말고 꺼져라. 내 몸이 이렇다 해서 우습게 봤다간 찢어 죽여 줄 테니까.”

베르노프는 무시무시한 말로 백마를 탄 사람을 쫓아내려 했다. 그러나 거친 말과 달리 해골 지팡이를 잡은 그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왜 떠는가? 난 그저 토끼 고기 맛을 물어본 것뿐인데.”

“알았으니까, 그냥 가! 난 당신과 말을 섞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누군지 아는 것 같군.”

백마가 조금씩 모닥불 곁에 있는 베르노프를 향해 다가갔다.

“대륙은 넓은 것 같으면서도 참 좁은 곳이야, 이런 곳에서 자넬 다시 만나게 되다니. 안 그런가, 베르노프?”

“빌어먹을!”

베르노프는 해골 지팡이로 율리비어스를 공격하는 척하다가 반대편으로 도망을 갔다.

상대는 마법학의 대가 율리비어스다.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수풀을 헤치며 도망가던 그는 돌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연못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헉헉!”

한참을 도망가던 그는 뒤를 돌아보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율리비어스가 백마가 아닌 흑마를 타고 그의 바로 뒤에서 쫓아오고 있었다.

흑마의 입에서 불길이 쏟아져 나와 베르노프의 머리카락을 홀랑 태워 버렸다.

“크아아악!”

머리 가죽이 타며 핏물이 얼굴로 흘러내렸다. 그 고통에 그는 땅에 쓰러져 몸부림을 쳤다.

“감히 내 앞에서 도망쳐?”

“자, 잘못했습니다, 율리비어스 님. 제, 제발 살려 주십시오.”

“다른 두 녀석들은 어디에 있느냐?”

흑마를 뒤로 물린 율리비어스가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하아, 하아. 그들은 얼마 전에 스므차의 손에 죽었습니다.”

“또 거짓말을 하려 하다니.”

“저, 정말입니다. 이 팔도 그때 잃은 겁니다.”

베르노프는 머리가 불타 피가 흘러내리는 비참한 몰골로 다크캐슬에서 벌어진 전쟁 이야기를 다급하게 설명했다.

“그래서 세 놈 중에 살아 있는 건 너뿐이다?”

“예! 믿어 주십시오.”

겁에 질린 그의 눈동자를 흑마 위에서 말없이 내려다보던 율리비어스는 천천히 후드를 벗었다.

무덤에서 꺼낸 시체처럼 창백하고 표정 없는 율리비어스의 얼굴이 베르노프의 각막에 가득 맺혔다.

긴 세월이 흘러 주름이 가득했지만 저 특유의 차가운 얼굴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너는 운이 없구나, 셋이었다면 고통을 나눠 가졌을 텐데. 이제 넌 앞서 죽은 자들의 몫까지 고통을 견뎌 내야 할 것이다.”

“살려 주십시오, 율리비어스 님! 죽은 두 녀석들이 율리비어스 님을 속인 것이지 전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변명하지 마라.”

입에서 불을 뿜는 흑마가 육중한 몸집으로 다가와 앞발을 치켜들었다.

말발굽이 눈앞까지 다가오자 땅에 엎드려있던 베르노프는 뒤로 허겁지겁 물러나며 외쳤다.

“정말입니다! 억울합니다, 전!”

“버러지 같은 놈. 네놈들 때문에 내가 사막에서 고생한 걸 생각하면!”

30년도 훨씬 더 된 옛이야기다.

마법진을 실험하다 작은 도시를 통째로 날려 버린 율리비어스는 악의 대명사처럼 되어 이곳저곳에서 쫓기는 몸이 됐고, 그들을 피해 조용히 지낼 만한 곳이 필요했다.

그때 그가 자리 잡은 곳이 베르노프의 스승이 머물던 ‘죽음의 입구’였다.

죽음의 입구는 그 지역 사람들이 붙인 이름으로, 한마디로 공동묘지였다.

낮에도 으스스한 그곳은 숲과 산을 품은 거대 공동묘지였고, 수백 년 동안 매장된 수십만 구의 시신들이 사후의 세계를 기대하며 잠들어 있었다.

베르노프의 스승은 낮에는 공동묘지의 묘지기로 활동했고, 밤에는 시신을 파내 그 뼈로 소환술을 연구하던 사람이다.

율리비어스는 그들이 하는 일에는 관심도 없었다.

-지저분한 놈들.

때때로 묘지 안에서 마주칠 때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뿐이었다.

그곳에서 집을 짓고 수년간 지내며 마법 연구를 해 오던 그는 베르노프의 스승인 묘지기가 병으로 죽었을 때만 슬며시 들러 장례를 치르는 것을 지켜봤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은 묘지기의 제자들이 그를 방문했다.

-‘수비이라 사막’에 밤마다 빛을 내는 기이한 장소가 발견됐답니다.

-밤마다 빛을 내?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장소에 사람이든 낙타든 들어가면 모조리 사라진답니다.

-흥미롭군. 마법진 같은데…… 밤마다 빛을 내고 사물을 삼킨다…….

호기심이 생긴 율리비어스는 수비이라 사막으로 떠났고, 그로부터 석 달 후, 그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를 기다린 건, 폐허로 변한 그의 집터였다. 그가 죽음의 입구에서 지내며 연구하고 집필한 마법학책들이 모조리 잿더미로 변한 것이다.

그때의 충격이 되살아난 듯 베르노프를 응시하는 율리비어스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말장난으로 날 사막에 보낸 이유가 뭐였느냐?”

“율리비어스 님의 집에 소환술에 도움이 되는 마법서가 있을 거라고 그들이 말했습니다.”

“내가 사막에 간 틈을 이용해 내 마법서를 훔치려고 했다 이 말이지? 그런데 왜 집에 불을 질렀느냐?”

흑마에서 내린 율리비어스가 물었다.

“그게…… 집 안에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어서 방 깊숙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책장의 마법서도 손을 댈 수가 없었고요. 그래서 그들이 분풀이를 한 것입니다. 집에 불을 질러서요. 죄송합니다, 율리비어스 님. 하지만 진짜 전 죄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행동을 막으려 노력까지 했습니다.”

“닥쳐라.”

발밑에서 튀어나온 가시넝쿨이 베르노프의 몸을 순식간에 휘감아 나무에 거꾸로 매달았다.

비명을 지르며 높은 나뭇가지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그를 잠시 올려다보던 율리비어스는 땅에 떨어진 베르노프의 검은 해골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비천한 것들이 감히 내가 집필한 마법서를 불태워?”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