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6] 디 임팩트 19권 6화
“대공의 눈은 베일 가문 영지 전역에 깔려 있네. 이미 10년 전에 샤르비티의 영지를 감시하던 자들이 그런 낌새가 보인다며 보고를 했어.”
“그런데 왜?”
“확실치 않았으니까. 물증도 없는 감시인의 느낌과 판단을 믿고 뤼호른 가문과 대치해 있는 샤르비티의 영지에 피바람을 일으킬 수는 없었던 것이지. 그때 과감히 칼을 빼 들었다면…….”
돈조르니의 얼굴에 아쉬워하는 기색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곧 표정을 회복하며 도현을 응시했다.
“그동안 대공은 구름이 쉬어 가는 숲에 제라이즈란 사람이 있다는 걸 전혀 모르고 계셨네. 오래전 돌아가신 고모님이 내게만 알려 주셨거든.”
“이제 알고 계시겠군요.”
“그러지 않고는 자네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으니까. 자네가 여기 오게 된 동기도 말이야.”
어제 도현을 만난 뒤, 그는 늦은 밤 대공을 방문해 확실치 않아 숨기고 있었던 제라이즈와 관련된 일을 설명했다.
“대공께선 자네도 만나고 싶어 하지만, 제라이즈에게도 관심이 크네. 그에 관해 여러 가지 질문을 할 수도 있어.”
“어제 말씀드렸다시피 그 부분에 대해선 저도 별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라이즈와의 약속입니다.”
“사소한 것도 안 되나?”
“죄송하지만, 약속을 어길 순 없습니다.”
도현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엔 약속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완강함이 담겨 있었다.
“알겠네, 더는 강요하지 않겠네.”
길게만 느껴졌던 복도가 끝이 나며 대공의 집무실이 저만치 보였다.
그 앞을 날카로운 기세를 풍기는 수십여 명의 친위대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키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귀신처럼 치렁치렁한 늙은 마법사도 보였다.
그들은 도현의 위아래를 살피다가 천천히 집무실 문을 양쪽에서 열어 주었다.
겨우 한 사람 들어갈 만큼 조금 열린 문틈 사이로 천장이 높고 넓은 집무실 공간이 일부 보였다. 바닥엔 붉은 융단도 깔려 있었다.
“들어가 보게.”
“저 혼자 말입니까?”
“대공은 자넬 부르셨네.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네. 어서 들어가 보게.”
같이 들어갈 줄 알았던 돈조르니가 뒤로 한발 물러나자 도현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열린 문 사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공은 어떤 인물일까?’
도현은 소문만 무성한 대공 알조베티 베일을 만나기 위해 한 발 한 발 집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지만 도현은 신경 쓰지 않고 집무실 안에 배치된 긴 회의 탁자를 지나쳐 좀 더 안으로 들어갔다.
붉은 융단이 끝나는 지점에 높은 단과 의자가 존재했지만 그곳엔 대공이 없었다.
도현은 왼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풍스러운 책상 뒤에 말없이 앉아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50대로 보이는 그 남자는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위엄이 몸에서 절로 풍겼고, 눈빛은 다소 차가웠다.
도현은 책상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공손하게 예를 취했다.
“대공께 인사드립니다. 백도현이라고 합니다.”
“일어나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도현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공이 말문을 열었다.
“숙부께 들었네, 그대가 얼마나 강한 검사인지. 나로서는 그대의 등장이 반갑기 그지없군.”
“별말씀을.”
“브링틱에서도 우리 가문을 위해 싸웠다지?”
“그렇습니다.”
“언젠가 브링틱에서 싸운 한 용맹한 용병에 관한 보고가 있었는데, 그가 자네였어.”
고개를 끄덕인 대공은 책상에 놓인 술잔에 술을 따라 앞으로 내밀었다.
“받게.”
도현은 선뜻 술잔을 내미는 대공의 행동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앞으로 다가와 그의 술잔을 두 손으로 받았다.
‘이걸 어떻게 마셔야지? 그냥 마시면 되나?’
대공이 술을 따라 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그는 은색 술잔을 들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자 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차가운 표정의 대공 얼굴이 조금 풀어지며 미소가 비쳤다.
“받았으면 마셔야 하지 않나?”
“예? 예.”
도현은 고개를 옆으로 약간 틀어 은색 잔에 찰랑이던 노란 빛깔의 술을 단숨에 비웠다.
“제라이즈는 어떤 사람인가?”
술을 마시고 숨을 돌리던 도현에게 대공은 기습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도현은 당황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 냈다.
“죄송하지만 그에 대해 말씀드릴 만한 게 없습니다.”
“그가 보냈다면서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미소를 잠시 보였던 대공의 표정이 금세 싸늘해졌다.
“날 놀리는 건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지금처럼 조용히 살기를 원하셔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입에 담기를 원치 않습니다.”
도현은 대공의 위압적인 눈빛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만약 구름이 쉬어 가는 숲에 내가 찾아가면 어찌할 텐가?”
“감히 말씀드리면, 그땐 지금의 전쟁보다 더욱 곤란한 일을 당하실 수도 있습니다.”
“건방지구나. 지금 네가 한 말을 너는 감당할 수 있느냐?”
“오로지 대공을 위해 드리는 직언입니다. 지금 대공께는 제라이즈보다 중요한 게 있지 않습니까?”
싸늘한 표정으로 도현을 노려보던 대공의 눈가가 서서히 부드러워졌다.
“숙부님 말씀대로 네 입을 통해선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낼 만한 게 없겠구나. 무례했다면 사과하마.”
대공은 도현에게 손짓을 해 가까이 오게 한 후, 도현이 들고 있던 술잔에 다시 술을 따라 주었다.
“그대 같은 강자가 날 돕기 위해 왔는데 내가 어찌 헛소리를 하며 시간 낭비를 하겠는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게 힘을 빌려주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 *
어두운 막사 안, 철가면 휴반트는 침상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막사 밖에서 병사들이 움직이는 소음이 크게 들려왔지만, 그의 의식은 오로지 전날 도현이 사용한 검술과 움직임에 집중되어 있었다.
곱씹을수록 백도현의 검술은 감탄이 나올 만큼 뛰어났다.
‘그자 역시 내 검술을 분석하고 있겠지?’
휴반트는 단순히 사막의 지하에서 씨드를 얻어 강해진 게 아니었다. 도현처럼 검술에서 있어서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외모에 대한 열등감은 그 천부적인 재능을 더욱 부채질해 높은 검의 경지로 그를 이끌었다.
그렇기 때문에 도현의 검이 얼마나 긴 수련을 거치며 단단히 성장해 온 것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듯, 백도현 그자 역시 모든 것을 보여 주지 않았다.’
도현과 충돌한 지 하루가 지나자 휴반트는 상황을 좀 더 냉정히 볼 수 있게 됐다.
어제만 하더라도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갖춘 도현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이 극에 달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를 죽이고만 싶었다.
그래서 사용하는 데 엄청난 대가가 따르는 ‘파멸의 힘’을 동원하고자 했다. 검술과 씨드의 힘만으로는 도현과 승부를 보기 어렵다고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며 그는 자신이 놓친 것을 깨닫게 됐다.
‘파멸의 힘을 사용해 백도현을 없앤다 해서 과연 무엇이 달라질까? 내 마음속의 이 불안함과 열등감은 그자 때문에 생긴 게 아닌데.’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휴반트는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차가운 철가면을 벗어 양손으로 받쳐 들었다.
얼굴 없이 산 지 30년이 넘었다.
그가 존재하는 이유와 자존심을 지탱시켜 준 건, 사실 이 철가면이 아니었다.
옆에 놓아둔 고대 검을 집어 든 그는 칠흑처럼 어두운 검신을 얼굴에 가져다 댔다.
서늘하면서도 여자의 손처럼 부드러웠다. 검은 그를 배신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영원히.
“파멸의 힘으로 백도현을 죽이면 나는 이제 너마저 부정하는 게 되겠지…….”
그럴 수는 없었다. 그것은 곧 백도현의 검에 자신이 굴복했다는 의미였다. 자신의 검에 또 하나의 철가면을 씌울 수는 없었다.
“휴반트 경, 지휘부의 회의에 참석하시라는 전언입니다.”
막사로 들어온 부관의 말에 휴반트는 옷을 갖춰 입고 지휘부로 향했다.
도현에게 입은 허벅지 검상이 깊진 않아서 움직이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붉은 성이 위치한 주변 지역을 포위하듯 감싸고 있는 사자 동맹군의 지휘부는 모두 일곱.
각각의 지휘부에는 작게는 4만, 많게는 7만의 병력이 속해 있었고, 그들 모두를 합하면 수십만 명이나 되는 대군이 된다.
철가면 휴반트가 머물고 있는 지휘부는 대략 5만 명의 군사와 용병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휴반트 경, 몸은 좀 어떠시오?”
들판에 세워진 지휘부 목조건물로 향하던 휴반트는 걸음을 늦추며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제 그와 함께 베일 연합군의 수송부대를 습격한 넬리 경이 술이 덜 깬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괜찮소.”
“몸 회복이 빠르시군. 나 같으면 며칠 꼼짝도 못할 것 같은데.”
간밤에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는지 해가 높이 떴는데도 불구하고 넬리 경의 입에선 술 냄새가 적지 않게 풍겼다.
“술을 꽤 드신 것 같소?”
“어제 습격을 하다 내 병사의 반이 죽거나 다쳤소이다. 공은 세우지도 못하고 병사들만 축냈으니 영지에 계시는 우리 영주님이 이 일을 알면 얼마나 한심해하시겠소, 가뜩이나 영지가 궁핍해 이번 사자 동맹군에 군사를 보내는 것도 힘들어하셨는데.”
영주와 인척 관계인 빼빼 마른 중년의 넬리 경은 괴로운 표정으로 하늘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능력도 안 되면서 왜 이 전쟁에 참여한 거요?”
휴반트는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대공이 쉽게 질 싸움이라 여기고 참가했소. 새로운 대공이 될 샤르비티와의 관계도 우호적으로 다져 놓고.”
“샤르비티가 새 대공이 되는 거요?”
“모르셨소? 이미 다들 아는 사실인데.”
“누가 되든 관심이 없었으니까.”
넬리 경은 무뚝뚝한 어조로 말하는 휴반트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도대체 저 철가면 안에 어떤 얼굴이 숨어 있는 걸까? 웬만해선 답답해서 저 가면을 계속 쓰고 있지 못할 텐데.’
호기심이 불같이 일어났지만 철가면 속 눈동자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자 넬리 경은 얼른 시선을 돌렸다.
“한데, 휴반트 경, 정말 대단하시오. 난 당신이 그렇게 놀라운 실력자일 줄은 예상치 못했소, 괴물 같은 궁수 노인을 물리치다니. 그 사내에게 패하지만 않았다면 어제 습격은 우리의 승리였을 텐데.”
넬리 경이 백도현 얘기를 꺼내자 휴반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난 그에게 패하지 않았소.”
“하지만 도망치지…….”
말을 잇던 넬리 경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휴반트의 번개 같은 주먹이 그의 복부를 강타한 것이다.
무게가 없는 사람처럼 허공 높이 떠오른 넬리 경은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쿠웅.
먼지를 만들며 떨어진 그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구역질을 해 댔다.
“우엑!”
주변을 지나치는 병사들이 제법 있었지만 그 누구도 넬리 경이 왜 저렇게 됐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휴반트의 주먹질은 그만큼 빨랐다.
“이제 좀 술이 깨시오?”
엎드려서 구역질을 해 대던 넬리 경을 일으켜 세워 준 휴반트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신이 왜 허공으로 솟구쳤는지 알고 있는 넬리 경은 얼굴이 붉어진 채 화를 내지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 잊고 있었다. 눈앞의 철가면 사내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자라는 사실을.
“이, 이제 됐소. 그만해도 될 것 같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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