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 디 임팩트 19권 7화
지휘부 회의장에 나타난 휴반트를 바라보는 시선은 하루 사이에 많이 바뀌어 있었다. 어제 있었던 전투는 비록 패했지만 그 와중에 드러난 휴반트의 무력이 그들 사이에 소문이 난 것이다.
더 이상 수백 명의 기병을 끌고 다니는 영주의 대리인이라고 해서 그를 무시할 사람은, 적어도 이 지휘부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다 모이자 지휘부에서 제일 명성이 높은 나이 지긋한 영주가 입을 뗐다.
“어제 보급로 습격을 넬리 경에게 맡겼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소. 수백 대 마차 분량의 보급품이라면 적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오.”
말을 잠시 멈춘 영주는 얼굴이 굳어 있는 넬리 경을 바라봤다.
“큰 피해를 입은 넬리 경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소.”
“면목 없습니다.”
회의를 주도하는 눈썹이 흰 영주는 넬리 경이 섬기는 작은 영지의 영주보다 큰 영지의 주인이었다. 아무리 넬리 경이 영주를 대표해서 대신 전장에 왔다지만, 상석에 앉아 있는 영주와 편안하게 말을 섞을 입장은 아니었다.
당장 지휘부 진영에 주둔하고 있는 5만의 병력 중 상당수는 눈썹이 흰 영주가 데리고 온 병력으로, 그는 샤르비티와 직접 서신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말하자면 붉은 성 주변에 포진한 일곱 곳의 지휘부 중 한 곳을 책임지는 힘 있는 역할을 맡고 있는 셈이다.
“휴반트 경, 다리를 다쳤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신가?”
“네, 괜찮습니다.”
“에이저의 화살은 그동안 우리 사자 동맹군에게 큰 골칫거리였어. 한데, 휴반트 경이 그를 잡을 뻔했다니, 놓친 게 아쉽소.”
회의 탁자 위에 놓인 술을 한 모금 한 영주는 자못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휴반트 경과 싸운 자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군. 분명 대공 측 인물일 가능성이 높은데 말이야.”
“뭘 그리 걱정하십니까? 전쟁의 승패가 사람 한 명으로 뒤바뀔 것 같습니까? 아무리 강한 자라도 단련된 수만의 대군 앞엔, 그저 나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검은 수염을 짧게 기른 중년의 영주는 병력의 힘을 믿었다. 물론 그저 그런 병력이 아닌 싸움에 능하고 체계적으로 훈련돼, 아무리 강자라 해도 지치게 만들 그런 병력의 힘이었다.
그러나 팔짱을 끼고 조용히 앉아 있는 휴반트는 속으로 그런 그를 비웃고 있었다.
‘네가 백도현을 앞에 두고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씨드의 힘은 만 명에 필적한다. 그리고 그런 씨드의 힘을 완벽히 소화해 검술과 융합한다면, 그땐 그 이상의 힘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휴반트가 지금 그런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휴반트도 도현과의 첫 싸움에서 이유야 어쨌든 물러나야만 했다.
‘백도현은 너희들이 잡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표정 없이 검을 휘두르던 도현을 떠올리며 그는 회의 탁자 밑에서 손가락을 이리저리 검처럼 움직였다.
놀랍게도 그의 손가락을 통해 도현의 호검술 일부가 비슷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 * *
“대공과의 만남은 어땠나?”
집무실 밖으로 나온 도현에게 돈조르니가 물었다.
“좋았습니다.”
간단한 대답이었지만 돈조르니는 그거면 됐다는 듯 가볍게 미소를 보였다.
“술을 내려 주시더군요.”
집무실 근처를 벗어나자 도현은 대공이 하사품처럼 따라 준 술을 언급했다.
“자네가 마음에 드셨나 보군. 대공께 술을 받은 신하들은 많지 않네. 그들은 모두 대공께 인정을 받는 자들이지.”
“제라이즈에 관해서는 속으로 불쾌해하셨을 겁니다.”
“크게 신경 쓰지 말게, 어차피 그럴 각오를 하고 대공을 만난 게 아닌가?”
“그렇긴 합니다만, 정말 진심으로 말씀드리는 건데…….”
햇빛이 쏟아지는 복도를 걷던 도현은 걸음을 멈추며 돈조르니를 똑바로 응시했다.
“제라이즈를 억지로 만나려 하지 마십시오.”
“전쟁이 끝나면 대공은 아마 그를 만나려 하실 텐데.”
“그럴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절대,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는 억지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설사 대공이 찾아와도요.”
도현은 이들이 바크 드라모스의 심기를 건드려 큰일을 당하지 않기를 바랐다.
“흐음, 자네가 이렇게까지 강조를 하니 왠지 모를 두려움이 내 손을 타고 심장까지 전해지는군, 하하하!”
도현의 심각한 경고를 그저 웃음으로 넘길 듯하던 돈조르니는 웃음을 뚝 멈췄다.
“알겠네. 내가 무슨 수를 쓰든 대공을 설득하도록 하지. 하지만 그건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나 벌어질 일. 우리에게 급한 건 그 일이 아니지.”
“물론입니다.”
도현은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에게도 전쟁의 승리는 중요했다.
“내 방으로 가세, 그곳에서 설명해 주지.”
대공의 공관 건물 안엔 돈조르니의 방도 존재했다. 대공의 최측근으로서 그는 언제든 대공과 만날 수 있는 위치였다.
돈조르니의 방으로 향하던 도현은 위층 계단에서 내려오는 몇몇 사람들과 마주쳤다.
“예를 취하게, 대공 부인이시네.”
돈조르니의 작은 목소리에 도현은 시녀들을 대동하고 계단을 내려오던 캐서린을 잠시 바라보다가 정중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몇 개의 계단을 더 내려온 캐서린은 고개를 숙인 도현을 힐끔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려 돈조르니에게 말했다.
“어제는 제가 숙부님께 결례를 범한 것 같습니다. 마음이 편치 않아요.”
“별말씀을. 응당 제게 하실 말씀이었습니다.”
“술을 어제 이후로 끊었습니다. 숙부님 말씀처럼 술은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요.”
“그러셨다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좀 더 맑은 정신으로 자식들 걱정을 해 보려고요. 그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숙부님?”
캐서린이 돈조르니에게 하는 말을 옆에서 듣게 된 도현의 눈빛이 깊어졌다.
‘차갑다. 말속에 칼을 품은 듯한 이 느낌은 뭐지?’
도현은 기품 있지만 얼굴이 많이 상해 보이는 대공 부인과 시선이 우연히 마주쳤다.
“숙부님, 옆에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제가 부른 사람입니다. 검술 실력이 뛰어나 대공께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아, 그래요?”
그녀는 도현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
“이름이 무엇인가요?”
“백도현입니다.”
“숙부님이 검술 실력을 인정할 정도면 대단한 실력이겠군요.”
“작은 재주일 뿐입니다.”
“겸손할 필요 없어요.”
잠시 도현의 얼굴을 눈여겨본 그녀는 고개를 돌려 돈조르니를 봤다.
“숙부님, 또 뵙죠.”
“예.”
캐서린과 그녀의 시녀들이 스쳐 지나가자 돈조르니는 근심 깊은 표정으로 복도를 걸었다.
그 모습을 보며 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있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대공의 부인과 숙부 사이에 거리감이 느껴지는 거지?’
짧은 대화였지만 도현은 둘의 사이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피부로 느꼈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캐서린을 만난 후, 얼굴 표정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돈조르니를 향해 도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공의 자녀들이 인질로 잡혀 있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대공 부인의 심기가 날로 날카로워지고 계시네.”
“그렇군요.”
“여기네.”
방에 도착한 돈조르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대공의 집무실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종류의 지도가 그의 방에도 걸려 있었고, 그 옆에 책상과 탁자가 놓여 있었다.
“앉게.”
탁자 앞 의자를 권한 돈조르니는 벽장에서 술을 꺼내며 물었다.
“샤르비티가 왜 대공의 자녀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 두고 있는지 아는가?”
“글쎄요.”
“대공을 흔들기 위해서네. 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도 친자식들이 고문받고 죽어 간다면 그것을 그냥 지켜보는 게 괴롭거든.”
두 개의 잔에 술을 채워 온 그는 그중 하나를 도현의 앞에 내려놨다.
“조금만 마셔 보게. 150년 전 이 성을 축성한 선조들이 술 저장고에 봉인해 놓았던 거야.”
한 모금 하자 목이 타들어 갈 것같이 뜨거웠다.
“후우, 굉장하군요.”
술이 센 도현도 절로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이 술은 이성을 한순간에 마비시켜 버릴 만큼 독하고 강렬했다.
“하루에 한 잔 이상 마시면 그날은 싸움이고 뭐고 내팽개쳐야 한다네. 그러니 꼭 한 잔만 마시게.”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 잔이 세 번째 잔입니다. 대공께서 주신 술이 바로 이 술이었거든요.”
도현의 말에 돈조르니는 어이가 없었는지 나직이 웃었다.
“허허, 대공께서 약은 수를 쓰셨군. 이 술을 자네에게 권했다고?”
독한 이 술을 두 잔이나 마시게 했다는 건, 술김에라도 제라이즈와 관련된 비밀을 도현이 발설하기를 원했던 것 같았다.
“전혀 술에 취해 보이지 않는데.”
“안 취했으니까요.”
도현은 빙그레 웃으며 독한 술을 한 모금 더 했다.
“정신력이 대단한 친구군.”
혀를 찬 돈조르니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도현을 깊은 시선으로 응시했다.
“조금 전 하던 말을 계속하자면, 샤르비티는 대공의 자녀들을 이용해 어떡하든 대공에게 타격을 주려 기회를 엿보고 있지. 반면 대공은 그것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처음부터 자녀들을 없는 사람 취급했네.”
“쉽지 않은 선택이었겠군요.”
“당연하지. 누군들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나? 더구나 대를 이어 줄 자식들인데. 그렇지만 그는 대공이란 숙명이 주는 무게를 감당해야만 했네. 수백 년 역사를 지닌 가문을 지켜 내는 것, 바로 그것 말일세.”
“대공 부인께선 펄쩍 뛰셨겠습니다.”
“바로 보았네.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지. 그래서 안타까운 것이고.”
독한 술로 입술을 축인 돈조르니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샤르비티에게 사로잡힌 대공의 자녀들은 사실 그에게도 매우 가까운 혈육이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그들과 웃으며 얘기를 나눈 사이.
그러나 심장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 전쟁은 이겨야 한다.’
대공의 자녀들 때문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 그것이 전쟁의 기세 싸움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돈조르니는 벽에 걸려 있는 거대한 지도를 떼 와 탁자 위에 펼쳤다.
“지금 우리는 붉은 성을 중심으로 방어막을 치고 있네. 사자 동맹군은 그 방어막을 깨고 들어오려 노력을 하고 있지. 하지만 그들도 알고 있네, 방어막을 일부 뚫는다 해도 정작 붉은 성을 공략하기엔 마땅치 않다는 것을.”
“그럼 지금 전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는 뭡니까?”
“소모전이지, 지속적으로 전투를 벌여 우리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거야. 어찌 됐든 전쟁 물자와 병력은 그들이 우리에 비해 우월하니까. 그러다…… 때가 되면.”
돈조르니는 대공이 빼앗긴 본성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들이 나설 거네. 본성을 지키고 있는 샤르비티의 군사가. 그들의 병력은 대략 10만여 명. 잘 훈련된 병사들이지. 사자 동맹군 40만과 샤르비티의 군 10만이 합세한 50만의 병력이 붉은 성을 향해 총공격을 감행하는 거야.”
도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50만.’
상상만 해도 거대한 군사였다.
“지금 총공격이 들어와도 이상할 게 없겠군요.”
“그렇지. 대공을 돕기 위한 지원 세력이 늘고 있으니까, 아마 본성에 있는 반군들의 수뇌부는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일 것이야. 바로 샤르비티와 그 사촌 녀석들 말일세. 괘씸한 놈들!”
말을 하며 화가 치솟았는지 돈조르니는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들은 모두 대공 알조베티처럼 돈조르니의 조카들이다. 그들의 얼굴과 목소리가 눈앞에 선했다.
“하지만 총공격을 섣불리 결정짓지 못할 걸세.”
“그건 왜 그렇습니까?”
“한번 진군의 깃발을 올리면 그땐 되돌릴 수 없으니까. 샤르비티는 자신이 대공이 된 이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거네. 붉은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그가 흘려야 할 피와 희생이 얼마나 클지 충분히 예상이 되거든. 만약 실패라도 하면 두 번의 기회도 오지 않고. 자연히 신중해질 수밖에 없겠지.”
도현은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붉은 성 외곽에 방어막을 치고 있는 베일 연합군의 진영이 군사의 수와 함께 표시되어 있었다.
대략 20만 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