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0] 디 임팩트 19권 10화
서걱서걱.
믿었던 튼튼한 갑옷이 두 조각 나며 살 속으로 차가운 금속이 훑고 지났다.
호위대장은 피 묻은 손으로 도현의 얼굴을 움켜쥐려는 시늉을 하다 입으로 피를 토하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잘 가시오.’
살기를 포기하고 악착같이 덤비는 호위대에게 도현이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곤, 고통 없는 죽음을 선사하는 것뿐이었다.
도현은 그를 지나쳐 마차 앞에 섰다.
호위대장을 마지막으로 마차를 가로막는 자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전멸.
숲길에서 막강하기로 소문난 압할라의 상단 호위대들이 전멸한 것이다.
도현은 검을 움직여 마차와 연결된 말들을 풀어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크고 화려한 마차 안에 있는 압할라는 굳은 얼굴로 창밖만 내다볼 뿐 안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공이 보냈나?”
“그렇소. 그만 나오시는 게 어떻소?”
도현은 담담히 답하며 마차 안의 압할라를 응시했다.
“왜 우리를 공격하는 거냐?”
“대공의 자녀들.”
“빌어먹을.”
압할라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압할라, 마차에서 죽겠느냐, 아니면 땅을 밟고 죽겠느냐?”
에이저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날 이대로 보내 주면 당신들을 엄청난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군.”
에이저는 냉소를 흘리며 은색 활로 마차를 겨눴다.
“잠깐! 좋다, 내가 실수했어. 하지만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줘야지.”
“어떻게 말이냐? 네 배신으로 인해 대공의 자녀들이 샤르비티의 인질이 되었는데?”
“바로 그거요. 내가 벌인 일, 내가 원상태로 돌려놓겠소. 샤르비티의 손에 잡혀 있는 대공의 자녀들을 내가 구해 내겠다 그 말이오.”
도현은 에이저를 돌아봤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들을 가치도 없네, 이자를 신뢰할 수 없어. 게다가 돈조르니는 그가 어떤 말을 하든 믿지 말고 죽이라 했네.”
에이저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압할라, 끝이다.”
“그건 좀 곤란하겠소.”
마차 문이 열리며 검을 든 노인이 등장했다.
“그를 죽이려면 나를 먼저 상대해야 할 거요.”
폴허먼이 마차 앞을 가로막고 서자 활을 겨눴던 에이저는 놀란 눈빛으로 천천히 은색 활을 거뒀다.
“아니, 당신은…….”
“오랜만이오, 에이저. 날 알아보는구려.”
“폴허먼, 당신이 왜 이자와?”
“그와 난 친구 사이요.”
“음.”
에이저는 묵직한 신음을 흘렸다.
19년 전, 에이저가 산속 오두막집에 머물고 있을 때 강력한 지진이 그 일대를 관통해 엄청난 산사태가 일어난 적이 있었다.
한밤중에 벼락처럼 덮친 지진과 산사태는 아무리 강한 에이저라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대자연의 힘이었다.
피할 사이도 없이 오두막집과 함께 매몰된 그는 죽음을 기다리며 서서히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가 그의 몸을 흙더미 속에서 끌어냈고, 치료까지 해 줘 생명을 유지시켜 줬다.
며칠 뒤 제대로 의식을 회복한 그는 폐허로 변한 산의 한쪽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앉아 있는 검의 구도자와 만났다.
그 구도자의 이름은 폴허먼.
침묵의 기사단 출신으로, 기사단에서 추방되어 세상을 떠도는 사람이었다.
‘나의 생명을 구해 줬지. 며칠간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그가 하필 막아서다니, 허허.’
과거의 추억을 잠시 상기하며 눈을 감았던 에이저는 다시 눈을 뜨며 폴허먼을 응시했다.
“근 20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다니, 정말 기쁘기 그지없소이다.”
“나 또한 그렇소.”
“붉은 성엔 독하기 그지없는 술이 있다오. 내가 대접하고 싶으니, 나와 함께 갑시다.”
폴허먼은 뒤를 돌아봤다. 압할라가 무거운 표정으로 마차 안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압할라를 이대로 보내 준다면 내 기꺼이 당신을 따라가겠소.”
“미안하지만 그건 좀 어렵겠소이다. 그는 상인으로서 신의를 저버리고 대공을 배신한 자요.”
“그렇다면 난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소.”
“나와 싸우더라도 말이오?”
“전쟁이 끝날 동안 그를 보호해 주기로 약속을 했소.”
설사 에이저와 싸우는 한이 있어도 폴허먼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에이저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를 설득하려 했다.
“내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찾아온 것이라면 당신의 얼굴을 보아 이대로 모른 척 떠날 수도 있소.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다르오. 난 지금 대공의 편에 서서 싸우는 몸이란 말이오.”
“이 사람도 마음이 아프오.”
짤막한 말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폴허먼은 에이저 뒤에 말없이 서 있는 도현에게 시선을 던졌다.
있는 듯 없는 듯 서 있는 그의 몸에서 추측할 수 없는 검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폴허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오.”
“변함이 없소.”
“정녕 그리 나오면 이 몸 또한 어쩔 수 없겠소이다.”
고요한 자세로 검을 들고 있는 폴허먼을 향해 에이저는 은색 활을 들어 활시위를 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위의 강철 화살이 곧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았다.
숨 막히는 긴장감에 뒤에서 지켜보던 리타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도현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에이저는 이미 마음이 떠났어, 싸울 의지가 사라졌어.’
은색 활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눈썹을 부르르 떨며 활시위를 당기고 있던 에이저는 낮게 욕설을 내뱉으며 폴허먼이 아닌 엉뚱한 곳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콰앙!
큰 소리와 함께 숲의 나무들이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그 모습에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마차 안에 앉아 있던 압할라와 그의 아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버지, 에이저가 결국 물러나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착각이었다.
“자네가 맡게. 난 그와 싸울 수가 없네, 그는 나를 구해 준 적이 있어.”
에이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도현에게 자신의 처지를 설명했다.
“알겠습니다. 곤란하시다면 제가 맡지요.”
도현은 뒤로 물러나는 에이저를 대신해 천천히 폴허먼과 마주 섰다.
‘작은 거인이군.’
폴허먼은 허름한 옷에 평범해 보이는 검 한 자루를 들고 서 있었지만 도현의 눈에 비친 그는 세상을 호령할 만큼 큰 힘을 가진 검객이었다.
“다른 자리에서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도현의 솔직한 심정이 제대로 전달됐는지 폴허먼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도 마찬가지라네. 젊은 사람이 대단한 수련을 쌓았더군.”
폴허먼은 도현이 싸우는 모습을 마차 안에서 눈여겨보았었다. 사람을 죽이는 검이 그토록 아름답게 보인 건, 그가 처음이었다.
“가겠습니다.”
도현은 긴말을 하지 않았다.
“오게.”
도현이 달려오자 폴허먼도 마주 달려갔다.
마차 앞에서 둘의 검이 충돌한 순간, 거대한 충격파가 생겨 마차가 옆으로 밀려나며 뒤집어졌다. 마차 안에서 압할라와 그의 아들이 지르는 비명 소리가 들렸지만 장내의 누구도 그 소리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채채채채챙채챙!
어둠을 밝히는 불꽃이 도현과 폴허먼의 검이 부딪칠 때마다 작렬했고, 숲의 공기는 요동쳐 큰 바람을 만들어 냈다.
휘이이잉!
싸움을 관전하는 리타의 보라색 머리카락이 그들이 만드는 검풍에 휘날렸다.
“저 노인, 만만치 않은데요?”
“당연하지. 그는 그 정도 되는 인물이야.”
에이저는 착잡한 시선으로 점점 가열되는 도현과 폴허먼의 싸움을 지켜봤다.
콰앙!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땅거죽이 뒤집어지며 흙과 돌이 수십 미터나 허공으로 솟구쳤다. 폴허먼의 검이 땅을 내려치며 만든 놀라운 광경이었다.
옆으로 피한 도현을 향해 폴허먼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환한 빛깔의 은색 검기가 그의 검에서 10여 개나 폭사되고 있었다.
도현은 엄청난 압력을 동반하고 날아오는 검기를 검을 회전시켜 만든 검막으로 모조리 막아 냈다.
“실로 대단하군! 그것을 피하지 않고 막아 내다니!”
진심으로 감탄하는 폴허먼을 향해 도현이 좌우로 길게 검을 휘둘렀다.
세타이움 장검이 길쭉하게 늘어난다 싶더니 푸른색 빛이 반월 형태로 날아갔다.
폴허먼이 날린 은색 검기를 모두 합해도 도현이 날린 푸른색 반월형 검기 하나를 당해 내지 못할 것 같았다.
흠칫한 폴허먼은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도현처럼 검막을 만들어 검기를 막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쿠쿠쿠쿵쿵.
도현이 날린 검기는 폴허먼 뒤에 있던 숲 일대를 초토화시키며 사라졌다.
수십 그루의 나무가 쓰러졌고, 땅은 여전히 은은하게 진동을 했다.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이제 그만 물러나십시오.”
“그렇게는 못하네.”
자욱하게 올라온 숲의 먼지를 들이마시며 폴허먼이 나직하게 말했다.
“안 되는 걸 아시잖습니까?”
도현은 막강한 내공이 실린 강력한 검기를 일부러 보란 듯이 날려 그에게 마지막 경고를 한 셈이다.
폴허먼의 검술은 매우 뛰어났지만 도현에게는 아직 미치지 못했다. 도현이 죽이겠다고 모질게 작정을 하면 순식간에 결판이 날 것이다.
“자네 같은 검객과 싸우다 죽는다면 오히려 내게는 영광스러운 일이지.”
그는 말을 하며 마차 앞을 다시 가로막았다.
에이저가 활로 마차 안의 압할라를 죽이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압할라, 듣고 있는가?”
“그, 그래, 듣고 있네.”
압할라는 뒤집어진 마차 안에서 불편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굶어 죽어 가던 내게 자네가 던져 준 빵은 세상의 그 어떤 빵보다도 맛있었어.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뛰며 눈물이 흐르네.”
“부끄럽군. 그저 한 조각 빵이었는데…….”
“압할라,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네. 힘에 부치는 자를 만났어.”
“그래 보이는군.”
“미리 작별 인사를 하는 거네.”
친구의 작별 인사에 평생 부자로 살아온 압할라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피도 눈물도 없이 살아왔고,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단 생각을 가져 본 적도 없다. 어차피 세상은 서로의 이득에 따라 주고받는 계산이 지배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한데, 이 바보 같은 멍청한 작자는 어릴 때 받은 알량한 빵 한 조각에 목숨을 내던지려 하고 있다.
“나와라.”
“아, 아버지.”
“품위 있게 죽자.”
압할라는 마차를 기어 나와 폴허먼의 옆에 섰다.
“수고했네, 이제 자넨 빠지게.”
“무슨 말인가 그게?”
“난 장사치야, 셈이 빠른 사람이지. 손해 보는 장사는 아주 질색이야.”
압할라는 도현과 에이저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둘만 죽으면 되는 일, 괜히 자네까지 죽을 필요 없지. 그것은 나에게는 굉장한 손해라고.”
“난 죽음 따윈 두렵지 않네.”
“난 두려워. 그러니까 자네의 죽음이 매우 아까운 거라고, 이 멍청한 인간아!”
소리를 버럭 지른 압할라는 양팔을 펼치며 고개를 뒤로 약간 젖혔다.
“어쩐지 붉은 성과 가까워지면서 느끼는 이 전장의 공기가 불안했어, 머리가 아플 만큼.”
잠시 세상의 기운을 느껴 보던 그는 양팔을 내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폴허먼, 내가 죽기 전에 양심에 찔리는 일을 하나 고백하겠네. 사실 자네에게 준 그 빵, 맛없어서 버리려 했던 거야.”
압할라는 그 말을 남기고 소매 속에 감춰 둔 단검으로 자신 목을 찔렀다.
“압할라!”
“아버지!”
폴허먼과 압할라의 아들은 깜짝 놀라며 땅에 쓰러진 압할라를 끌어안았다. 쩍 벌어진 목에서 피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아, 아들아, 너도…… 너도 죽어라. 그래야…… 이 친구가 산다.”
“아버지!”
압할라의 아들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샤르비티…… 병신 같은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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