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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461화 (461/575)

[461] 디 임팩트 19권 11화

압할라는 샤르비티를 욕하며 곧 숨이 끊어졌고, 폴허먼은 허탈한 눈빛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도현은 개운치 않은 압할라의 죽음에 마음이 조금 무거웠다.

“그가 죽었군요.”

“그를 위해 1백여 명 가까운 호위대들이 목숨을 바쳤네. 비굴하게 죽었다면 죽은 그들이 지하에서 탄식을 했을 거네.”

에이저는 냉정하게 말하며 폴허먼을 응시했다.

“폴허먼, 20년 전, 당신이 날 구해 준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아 미안하오. 원한다면 내 팔을 하나 떼 줄 수도 있소.”

궁수인 그가 팔을 하나 잘라 주겠다는 것은 목숨을 주겠다는 말과 같은 의미였다.

뒤에서 그의 발언을 들은 도현과 리타는 그래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에이저 경.”

도현이 나서려 하자 에이저는 손을 들어 올려 도현의 말을 막았다.

“나서지 말게, 이건 그와 나 사이의 일이네.”

허탈한 눈빛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폴허먼은 당장이라도 팔을 자르려는 에이저를 향해 말했다.

“그럴 필요 없소, 생색을 내고자 당신을 구해 준 건 아니었으니까.”

“음.”

“다만 압할라의 아들까지 죽이라는 명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은 그를 살려 주시오. 부탁드리겠소.”

검을 거두고 물러난 폴허먼이 간곡하게 에이저와 도현을 향해 말했다.

고민을 하던 에이저가 무겁게 말했다.

“부친의 죽음을 목격했소. 여기서 살아간다면 그는 오늘 일을 잊지 않고 대공에 대한 복수를 맹세할 거요.”

“그렇지 않소. 압할라는 대공에 대한 배신의 대가로 이 자리에서 자기 목숨을 끊어 버렸으니까. 안 그런가?”

폴허먼은 압할라의 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투명한 폴허먼의 시선과 마주친 압할라의 아들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한 마음이 없지 않아 있지만…… 잊겠습니다.”

“내 눈을 다시 보거라. 만약 네가 약속을 어긴다면 내가 제일 먼저 너를 찾아갈 것이다. 알겠느냐?”

폴허먼의 서늘한 경고에 압할라의 아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맹세를 했으니, 그만 보내 주시오.”

“흐음.”

압할라의 아들은 후환거리였다. 평소의 에이저 성격이었다면 과감하게 화살 한 방으로 끝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폴허먼이 이렇게까지 굽히며 부탁을 하니, 그로서도 참 난감했다.

여기서 압할라의 아들을 죽이겠다고 하면 그땐 정말 폴허먼과 끝을 봐야 될 게 분명했다.

“부모의 원수를 잊는다는 자식의 말을 난 믿지 않는다. 하나, 오늘은 살려 주겠다. 그만 가라.”

에이저의 허락이 떨어지자 압할라의 아들은 지체 없이 마차를 끌었던 말 한 마리를 타고서 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부친의 죽음은 애통했지만 한편으론 그가 늙은 나이가 되도록 상단을 넘겨주지 않고 있던 터라, 부친의 죽음이 일면 반갑기도 했다. 그 자신이 이제 상단주가 된 것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는군, 망할 녀석.”

폴허먼은 나직이 혀를 찬 뒤, 두 눈을 뜨고 죽은 친구의 눈을 감겨 주었다.

“우리와 함께 붉은 성으로 갑시다. 아까 말한 독한 술을 대접하겠소.”

에이저의 제안에 그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마음이 가지 않는구려. 난 그만 가 보겠소.”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도현을 한번 쳐다보더니 길이 아닌 숲으로 사라져 버렸다.

“저렇게 보낼 사람이 아닌데.”

안타까웠지만 에이저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둘 다 수고했네. 그만 돌아가세.”

압할라의 목을 잘라 가죽 주머니에 담은 에이저는 씁쓸한 얼굴로 발걸음을 먼저 옮겼다.

“도현, 이것 좀 봐. 땅에 이런 게 떨어져 있었어.”

리타는 에이저가 압할라의 목을 자르는 동안 땅에서 주운 오래된 작은 책자를 도현에게 내밀었다.

“뭔데?”

“제목을 보면 침묵의 기사단과 관련된 책자 같은데?”

“침묵의 기사단?”

도현은 호기심 짙은 눈빛으로 오래된 책자를 내려다봤다.

‘침묵의 기사단은 신비로운 단체로 알려진 곳인데……. 쌍둥이 검객인 세티앙과 루시앙도 그곳 출신이라고 들었고.’

도현도 그곳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진 않았다.

“이게 왜 여기에 떨어져 있지?”

“모르지 나야.”

리타와 도현은 폴허먼이 침묵의 기사단 출신이라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에이저가 미처 그 부분까진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안 오고 뭐 하나?”

저만치서 에이저가 그들을 불렀다.

도현은 길게 생각할 틈 없이 품속에 그 책자를 넣었다.

“리타, 오늘 고생했어. 까마귀 마법이 아니었다면 일이 조금 복잡해질 뻔했어.”

“헤헤, 뭘. 어서 가자.”

흑거미를 소환한 그녀는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벨라

대공 알조베티는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놓인 청동 상자를 향해 다가갔다.

상자 주변엔 돈조르니와 에이저, 도현, 리타가 서 있었다. 리타는 말로만 듣던 대공을 직접 보게 돼서 흥분이 되었는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짐브리오보다 내가 먼저 대공을 만났네? 헤헤.’

속으로 짐브리오에게 자랑할 생각을 하던 그녀는 상자로 다가오던 대공이 자신을 쳐다보자 슬쩍 고개를 숙였다.

‘난 그의 신하도 아니니 긴장할 것 없어.’

하지만 왠지 대공의 몸에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기세 같은 게 흘러나와 그녀를 위축시켰다.

“이 소녀는 누구인가?”

대공의 물음에 도현이 대답했다.

“동료인 리타라고 합니다. 흑마법사입니다.”

“흑마법사?”

날카로운 시선으로 대공이 리타를 응시할 때, 돈조르니가 그녀를 칭찬했다.

“그녀는 뛰어난 흑마법을 이용해 압할라가 은밀히 지휘부를 떠나려는 것을 사전에 발견했습니다. 이번 일에 상당한 공이 있습니다.”

“그래요…….”

고개를 끄덕인 대공은 리타의 얼굴을 지그시 들여다봤다

“어려 보이는데, 그 괴이하다는 흑마법을 익혔단 말인가?”

“외모만 그렇게 보일 뿐, 실제 나이는 훨씬 많습니다.”

“불행하다 말해야 할지, 아니면 축복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군.”

대공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서 있던 리타가 고개를 들며 대꾸했다.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닫혀 있는 청동 상자를 내려다보며 대공이 물었다.

“얼마 전에 이마에 주름이 하나 생겼습니다. 소녀의 외모지만 저도 늙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10년 뒤에 제 모습이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뭐라? 하하하!”

대공의 웃음소리가 천장이 높은 집무실을 가득 메웠다.

“겨우 주름 하나를 두고 10년 뒤를 걱정하다니.”

“저는 심각합니다.”

“자넨 재밌는 동료들과 함께 다니고 있군.”

도현을 보며 서서히 웃음을 거둔 대공은 발끝으로 상자를 열어젖혔다.

압할라의 잘린 목이 나타났다. 막대한 부를 소유한 대상인의 최후치고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래, 압할라, 날 배신하더니 결국 이 꼴이 되었군.”

차가운 눈빛으로 압할라의 얼굴을 노려보던 대공은 에이저와 도현, 리타에게 말했다.

“세 사람 모두 수고했소. 후에 압할라를 죽인 공에 대한 포상을 할 테니, 그리 알고 계시오.”

“감사합니다, 대공!”

리타는 신이나 대답을 했다.

“한데, 내가 받은 정보로는 압할라의 아들도 이번에 같이 방문했다던데…… 어찌 된 겁니까, 숙부님? 그의 목이 없군요.”

돈조르니는 에이저를 잠시 바라보다가 담담히 대꾸했다.

“큰 물고기를 잡는 대신 작은 물고기를 놓아주었습니다. 상황이 그리되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약간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에이저를 힐끔 쳐다본 대공은 더 깊게 묻지는 않았다.

에이저 같은 강자가 곁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싸워 주는 것은 큰 힘이 된다. 숙부가 아니면 전쟁터에 있을 사람도 아니었다.

작은 일은 따지지 않는 게 숙부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캐서린이 이자의 죽음을 보고 쌓인 화가 조금이나마 풀렸으면 좋겠군.”

* * *

지휘관 노드빌 경은 캐서린의 방 앞에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는 캐서린의 집안에서 보낸 3만 병력의 지휘관으로, 젊은 시절 그녀를 사모하기도 한 남자다.

‘여전히 떨리는군.’

그녀가 베일 가문으로 시집을 간 이후로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운명은 그를 다시 그녀 앞에 서게 만들었다.

베일 가문의 내분으로 인해.

열린 문을 통해 그는 천천히 캐서린의 방으로 들어갔다.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노드빌 경은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는 붉은 성의 동쪽 벌판 군영에서 서신을 받자마자 서둘러 달려오는 길이었다.

“급하게 오신 것 같습니다.”

“기다리실 것 같아서.”

“고맙군요, 그리 생각해 주시다니. 지휘관을 함부로 오라 마라 하는 것 같아서 부담이 되었거든요.”

“영주님이 절 보내신 이유는 캐서린 님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 마십시오.”

굳건한 그의 대답에 아들 때문에 사라졌던 그녀의 미소가 잠시 되살아났다.

“오라버니는 영주가 되셨어도 나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세요. 동생으로서 어떻게 고마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전쟁은 대공의 승리로 막을 내릴 겁니다. 그동안 힘을 내십시오.”

“글쎄요. 내게 이 전쟁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캐서린은 씁쓸한 얼굴로 방 안에서 대기 중인 시녀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그만 나가 있어라.”

“예.”

시녀들이 방 안에서 물러났고, 방 안엔 캐서린과 노드빌 경만이 남게 됐다.

“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 앉으세요.”

“괜찮습니다.”

투구를 옆구리에 낀 노드빌 경은 사양을 했다.

“명령입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그녀와 마주 앉았다.

“경이 지휘관으로 와서 그나마 제가 마음의 의지가 됩니다.”

“별말씀을.”

“빈말로 하는 게 아니에요. 붉은 성엔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는 대공의 사람들만 가득할 뿐, 정작 저를 위해 움직여 줄 사람은 전무합니다.”

그녀의 말에 노드빌 경은 살짝 당황을 했다.

“어찌 대공과 편을 나누는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오죽하면 제가 이런 생각이 들겠습니까?”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샤르비티에게 잡혀 있는 두 아들과 딸 때문입니다. 대공과 그의 사람들은 불쌍한 내 자식들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베일 가문이 중요할지 모르겠지만, 난 그렇지 않아요.”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노드빌 경은 무거운 침음을 터트렸다.

“제게 무엇을 원하시는 겁니까?”

“자식들을 구해 주세요.”

“그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공이 움직이지 않는데, 제가 어떻게 그런 일을 벌이겠습니까? 뒷감당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대공이 자식들 일에 선을 긋고 무관심하게 대처하는 이유를 그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라버니가 당신을 보낸 이유는 나를 위해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이 그것을 보여 줄 때입니다.”

“캐서린 님을 위해서 이러는 것입니다. 만약 구출 작전이 실패하면 그 후폭풍은 저뿐만 아니라 캐서린 님까지 곤경에 빠지게 할 테니까요.”

“그럼 시도조차 하지 말고 이렇게 말라 죽으라는 말씀입니까?”

소리를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는 애원하는 눈빛으로 노드빌 경을 응시했다.

“제발 부탁입니다. 나도 바보가 아니에요. 다 압니다. 대공의 심정도 이해하고, 샤르비티가 자식들을 어설프게 붙잡아 두지 않았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패할 가능성이 높겠지요. 하지만 난! 그 아이들의 어머니입니다! 이대로 모른 체할 수가 없어요.”

노드빌 경은 말없이 그녀와 시선을 교환하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샤르비티의 총공격이 임박해 있습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대공과 척을 지면서까지 대공 부인께서 움직이시는 것은 현명치 못한 판단이라고 봅니다. 고향에 계시는 영주님도 우려하실 일입니다.”

기대와 다른 그의 냉정한 말에 캐서린은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당신도 대공과 똑같군요.”

쌀쌀맞은 그녀의 태도에 노드빌 경은 쓴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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