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 디 임팩트 19권 12화
“캐서린 님을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무도 내 편이 없다면 별수 없겠네요. 내가 직접 구하러 가는 수밖에.”
그녀의 말에 노드빌 경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의 눈빛을 보면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강단 있는 여자였나?’
오래전 고향에서 본 그녀는 연약하고 겁이 많았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 하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용병이라도 구해서 내 자식들을 구하겠어요.”
“샤르비티는 그렇게 만만한 자가 아닙니다.”
“세 명 중 단 한 명이라도 구할 거예요.”
결의에 찬 그녀의 말과 눈빛에 노드빌 경은 할 말을 잃고 저도 모르게 방의 천장을 올려다봤다.
‘고약스럽군.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건가? 대공에게 하지 않고?’
한동안 방의 천장을 올려다보던 그는 고개를 바로 하며 캐서린을 응시했다.
그녀는 굶주린 사자처럼 씩씩대고 있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십시오. 어울리지 않습니다.”
“놀리지 마세요.”
“돌아가 고민을 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구할 수 있을지.”
“정말인가요?”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예. 그러니 붉은 성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마십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투구를 챙겨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노드빌 경.”
그녀의 부름에 노드빌은 뒤를 돌아봤다.
“하실 말씀이라도.”
“고마워요, 진심으로.”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가 보겠습니다.”
캐서린의 방에서 나온 그는 차가운 돌이 깔린 복도를 걷다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돈조르니와 마주쳤다.
“아니, 이게 누구시오. 노드빌 경이 아니신가?”
“안녕하셨습니까, 돈조르니 경.”
“대공 부인을 만나고 오시는 길이오?”
“고향 생각이 나셨는지 절 부르시더군요.”
“힘든 시간이니, 누구라도 말동무가 필요하셨던 모양이군.”
돈조르니는 이해한다는 듯 턱수염을 매만지며 턱을 끄덕였다.
“뒤에 있는 상자는 무엇입니까?”
노드빌은 돈조르니의 뒤에서 청동 상자를 들고 서 있는 도현과 리타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왠지 상자 안에서 피 냄새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압할라의 목이오.”
“대상인 압할라 말입니까?”
노드빌 경이 살짝 놀라며 물었다.
“그렇소. 겁 없이 이 주변에 왔기에, 사람을 보내 잡았지.”
“잘됐군요. 한데, 그의 호위대는 만만치 않은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누굴 보내서 죽인 겁니까?”
“에이저와 이 사람들이오. 나와 매우 가까운 용병들이지.”
돈조르니는 도현과 리타를 그에게 소개시켜 줬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다 보면 도현에 대해 알려질 상황이었다.
‘특별한 재주가 있나 보군.’
도현과 리타를 관심 있게 쳐다보던 노드빌은 돈조르니에게 살짝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대공 부인께서 압할라의 목을 보시면 기뻐하실 것 같군요.”
“그러길 바라고 있소.”
“틀림없이 기뻐하실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노드빌은 바람처럼 돈조르니를 스쳐 지나갔다.
“흐음.”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그시 응시하던 돈조르니는 생각 깊은 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말없이 서 있자 도현과 리타도 복도 한편에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상념에 빠진 돈조르니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리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현, 기다리기 심심한데, 우리 주사위 놀이나 할까?”
“짐브리오에게 들었어, 마법으로 상대방을 속인다면서?”
“헤헤, 들었구나. 안 속일게. 한판 할까?”
해맑게 웃는 리타의 모습에 도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주사위 놀음을 하겠어.”
“뭐 어때,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는데. 돈조르니 경은 자기만의 생각에 깊이 빠져 있고. 하자, 응?”
“안 돼.”
“치이.”
입이 나온 그녀는 손바닥 위의 주사위를 허공에 던졌다 받았다를 반복하다가 실수로 복도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데구루루 구른 주사위는 복도와 접해 있는 방문 밑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미처 손을 쓸 틈도 없었다.
“내 주사위.”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방문을 잡아당겼지만 잠겨 있었다. 문을 부수고 들어갈 수도 없어서 그녀는 도현의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으로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하필 그때 돈조르니가 긴 생각에서 깨어났다.
“리타, 거기서 뭐 하는가?”
“저, 저기 말이에요. 제 주, 주사위가…….”
“주사위?”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리타는 근엄한 얼굴로 바라보는 돈조르니의 표정에 짓눌려 문이 잠긴 방으로 주사위가 들어갔단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도현은 그 모습을 보며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웃지 마.”
다시 복도를 걷는 돈조르니의 뒤에서 리타가 작은 주먹을 들어 올리며 도현을 노려봤다.
“조심하지 그랬어.”
“너 다 봤지, 내 주사위가 그 방으로 들어가는 거?”
“봤지.”
“넌 빠르잖아. 막을 수 있었지?”
“내가 봤을 땐 이미 늦었었어. 문틈 밑으로 쏙 들어가던걸. 그걸 내가 어떻게 막겠어?”
도현의 말에도 그녀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까운 내 주사위.”
울상이 된 그녀는 잠시 후, 도현과 함께 캐서린의 방에 도착했다.
“오늘은 안색이 좋아 보이십니다.”
돈조르니는 캐서린의 얼굴을 보며 부드럽게 인사말을 했다.
“그리 보이십니까?”
“오는 길에 노드빌 경을 만났습니다.”
“예, 제가 불렀습니다. 얘기 좀 나누려고요.”
“그러셨군요.”
캐서린은 돈조르니의 표정 없는 얼굴을 경계하듯 살피며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숙부님께선 어인 일이십니까?”
“대공의 심부름차 왔습니다.”
“심부름요?”
“예. 도현, 보여 드리게.”
돈조르니의 뒤에서 리타와 함께 서 있던 도현은 앞으로 걸어 나와 바닥에 청동 상자를 내려놓고 그 뚜껑을 열었다.
무엇이 들어있나 싶어 호기심 짙은 눈빛으로 상자를 바라보던 캐서린의 표정이 딱딱하게 변했다.
얼핏 보니 안에는 사람의 목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곧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상자 곁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내려다보니 누구의 목인지 알 수 있었다.
거대한 귀의 늙은 노인.
자신의 생일 때마다 귀한 보물을 선물로 보내오던 대상인. 그러나 샤르비티가 본성에서 반란을 일으키던 날, 대공을 배신하고 그녀의 자식들을 붙잡은 반역자.
“압할라!”
원한 짙은 눈빛으로 한 자 한 자 그의 이름을 씹어 말한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꽃병을 들어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죽은 압할라의 얼굴이 찢어지며 청동 상자 안으로 피가 튀었다.
순간적인 광기를 보이는 그녀의 행동에 리타는 움찔했다.
‘화날 만도 하지, 그녀의 자식이 저 사람 때문에 붙잡혔으니까. 그래도 좀 무서운걸.’
오늘 대공을 만난 김에 그녀는 대공 부인까지 보고 싶어서 일부러 여기까지 따라왔다.
지체 높은 대공 부인은 어떻게 생겼나 궁금하기도 했고, 나중에 돌아가 짐브리오에게 대공과 대공 부인을 한꺼번에 만났다고 자랑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아, 하아, 이자는 어찌 이 모양이 된 겁니까?”
손에 잡히는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죽은 압할라에게 집어던진 캐서린은 숨이 찼는지 헉헉대며 물었다.
말없이 그녀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던 돈조르니는 담담히 대꾸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본성을 떠나 사자 동맹군 지휘부 중 한 곳을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기회를 보아 죽인 것입니다.”
“잘하셨습니다. 참으로 잘하셨습니다, 숙부님!”
그녀는 막힌 속이 뚫린 표정으로 기뻐했다.
“누가 이자를 죽인 겁니까? 찾아가서 내 목걸이라도 선물로 줘야겠습니다.”
돈조르니는 잠시 생각을 하다 답했다.
“제 친구 에이저와 여기 이 두 사람입니다.”
“그래요?”
캐서린은 청동 상자 뒤에 서 있는 도현과 리타의 얼굴을 차례로 살폈다.
키 큰 사내와 키 작은 소녀.
그중 키 큰 사내는 얼마 전에 본 적이 있었다.
“기억납니다. 그때 이름이…… 백도현이라고 했지요, 아마?”
도현은 그녀가 자신을 기억하며 묻자, 공손하게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그 이름이 맞습니다.”
“숙부님이 당신을 두고 검술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한 말이 그냥 한 말이 아니었어요. 고생했습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자식들의 원수라 할 수 있는 압할라를 죽이는 일은, 그녀가 꿈에도 바라는 일 중에 하나였다. 그것이 이뤄졌으니 그 누구에겐들 고맙다는 소리를 못 하겠는가.
“네 이름은 무엇이냐?”
“리타라고 합니다.”
“검을 들고 싸우기엔 너무 어려 보이는데.”
“전 마법사입니다.”
“마법사?”
캐서린은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열 살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어린애가 눈을 똑바로 뜨고 마법사라고 하니 절로 웃음이 나온 것이다.
“그녀는 어른입니다, 보이기만 소녀로 보일 뿐.”
도현이 옆에서 조용히 말하자 캐서린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다 수고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차고 있는 아름다운 십자형 보석 목걸이를 풀어 리타의 목에 직접 걸어 주려고 했다.
살짝 당황한 리타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리 안 하셔도 됩니다. 대공께서 나중에 상을 내리시기로 했으니까요.”
“숙부님, 제 마음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군요.”
돈조르니가 옆에서 만류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리타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잘 어울리는구나.”
그녀의 말에 리타는 어색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영광입니다, 대공 부인.”
캐서린은 팔찌와 반지를 빼 도현에게 내밀었다.
“받으세요.”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습니다.”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지자 도현은 어쩔 수 없이 사파이어와 에메랄드, 루비 등이 우아하게 장식된 팔찌와 반지를 받았다.
“영광입니다, 대공 부인.”
사실 그의 마법 주머니 안에는 스무 개가 넘는 보물 상자가 있었고, 그 안에는 이런 종류의 팔찌나 반지 등은 수두룩했다.
‘얼마나 기뻤으면 자신의 몸에 차고 있던 걸 빼서 줄까.’
도현은 그녀가 준 팔찌와 반지를 품 안에 넣으며 오히려 기분이 씁쓸해졌다. 그녀의 자식들이 어떤 상황인지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이저 경에겐 제 감사의 말을 전해 주세요, 숙부님.”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샤르비티에게 잡혀 있는 자식들만 구하면 되겠군요.”
밝아진 그녀의 표정을 보며 작게 미소를 짓던 돈조르니는 그 말을 듣고 표정이 굳어졌다.
“구하고자 하면 그들의 목숨이 되레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더 이상 위험해질 상황이 있겠습니까, 숙부님? 아버지가 자식들을 포기했는데.”
대공의 냉정한 결단을 캐서린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대공에겐 베일 가문이 전부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어쨌든 대공과 숙부님이 절 위해 압할라를 죽였다는 것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숙부님.”
돈조르니는 캐서린의 얼굴을 잠시 응시하다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허리를 가볍게 숙였다.
“압할라의 목은 여기에 두고 가겠습니다. 그럼.”
돈조르니가 밖으로 나가자 도현과 리타도 그의 뒤를 따라 캐서린의 방에서 나갔다.
한동안 청동 상자 안의 목을 노려보던 캐서린은 시녀에게 명했다.
“가지고 나가서 불에 태워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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