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3] 디 임팩트 19권 13화
캐서린의 젊은 두 시녀, 도리스와 벨라는 청동 상자와 기름병을 각각 나눠 들고 계단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녀들의 목적지는 공관 뒤편의 공터.
그곳에서 청동 상자 안에 든 압할라의 목을 불태울 예정이다.
청동 상자를 가슴 쪽으로 끌어안은 도리스는 힘든 기색으로 말했다.
“이거 생각보다 너무 무거운데. 계단 내려가다 지쳐서 쓰러지겠어.”
“이것도 만만치 않게 무거워.”
기름병을 든 또 다른 시녀 벨라가 새침하게 대꾸했다. 그녀는 얼굴만큼 목소리도 쌀쌀맞았다.
“그래? 그거 가벼워 보이는데?”
가냘픈 도리스는 숨을 헐떡이며 벨라의 기름병을 부러운 듯 쳐다봤다.
“우리 바꿔 들까?”
“싫어.”
단호한 그녀의 대답에 도리스는 실망을 하다 그만 계단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상자와 함께 계단을 구른 그녀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상자에서 빠져나온 압할라의 목이 계단을 구르며 길게 핏자국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짜증 나 진짜.”
계단에서 넘어진 도리스를 한심하게 쳐다본 벨라는 기름병을 내려놓고 치맛자락을 과감히 찢었다.
“걸레를 가지고 와서 닦으면 되는데, 왜 옷을 찢어?”
도리스는 치마 조각으로 계단의 피를 닦아 내고 있는 벨라를 보며 미안해했다.
“시끄럽고, 넌 그 머리통이나 상자 안에 얼른 넣어.”
“알았어. 미안해.”
도리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피투성이 압할라의 얼굴을 들어 올려 상자 안에 간신히 넣었다.
“내가 상자를 들고 갈 테니까, 넌 기름병 들어.”
“정말? 고마워.”
그녀들은 잠시 후, 공관 뒷문을 지키는 친위대 병사를 거쳐 건물 밖으로 나왔다.
나무들이 만드는 길을 지나 커다란 바위 앞에 도착한 그녀들은 상자와 기름병을 내려놓고 숨을 돌렸다.
“이런 일을 왜 우리에게 시키는 거야? 병사들에게나 시키시지.”
도리스는 손에 묻은 피를 보며 코에 주름을 잔뜩 만들었다.
그녀는 원래 캐서린의 시녀가 아니었다. 바위에 기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쌀쌀맞은 벨라도 마찬가지다.
원래 있던 캐서린의 시녀들은 샤르비티가 반란을 일으키는 날, 죽거나 성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지금 캐서린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들은 모두 다 새로운 시녀들이었고, 도리스와 벨라도 붉은 성에 와서 처음 만난 사이다.
“예전 캐서린 님은 천사 같다고 하셨는데, 난 못 믿겠어. 무서워. 너도 그렇게 느끼지?”
“모르겠어.”
벨라는 도리스의 말을 무시하며 청동 상자 안에 끈적끈적한 검은 기름을 부었다.
압할라의 얼굴은 기름 범벅이 되었고, 그 위에 불을 붙이자 청동 상자 안이 용광로처럼 끓어오르며 불길이 확 치솟았다.
“냄새가 너무 고약해.”
도리스는 코를 막으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벨라는 가까운 바위에 등을 기댄 채 불에 타고 있는 압할라의 얼굴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마치 즐기고 있는 것처럼.
“벨라, 넌 이 모습이 혐오스럽지 않아?”
“혐오스럽긴, 이미 죽은 자의 얼굴을 태우는 것뿐인데.”
웃으며 말하는 벨라의 눈빛에 도리스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 그렇긴 한데……. 맞아, 죽은 사람이지.”
“너 요즘 이상한 얘기하고 다닌다던데.”
“응? 무슨 얘기?”
“주방 일꾼들에게 이야기 들었어. 나랑 같은 방을 썼던 메디의 죽음이 이상하다고 말했다지? 자살을 할 얘가 아닌데 자살을 했다고.”
그녀의 말에 도리스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건 맞는 말이잖아. 웃으며 잘 지내던 애가 어느 날 갑자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다는 게 말이 돼?”
“붉은 성이 싫었나 보지. 사람 속을 네가 어떻게 알겠어?”
벨라는 도리스를 향해 한 발 한 발 걸어갔다. 웃으며 다가오는데, 도리스는 숨이 턱 막히는 두려움이 왈칵 밀려왔다.
“왜, 왜 그래, 무섭게.”
“잘 지내자, 우리. 단, 쓸데없는 말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 방금 전에도 넌 대공 부인을 뒤에서 욕했잖아. 불경스럽게도.”
“아냐, 난 그저 대공 부인이…….”
“쉿!”
벨라는 가냘픈 인상의 도리스를 살며시 끌어안으며 귓속말을 했다.
“난 말이야, 네가 같은 방을 쓰는 시녀와 밤마다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도리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그러니까, 네년의 그 더러운 주둥아리는 닥치고 있는 게 좋을 거야. 알겠어?”
“아, 알았어, 알겠다고. 다시는 네 이야기 하고 다니지 않을게. 맹세해!”
겁에 질린 도리스는 감히 벨라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며 급히 답했다.
“망치를 가지고 와, 압할라의 머리뼈를 부숴야 하니까.”
“다녀올게.”
뒷걸음질 치며 벨라와 거리를 둔 그녀는 허겁지겁 건물을 향해 뛰어갔다.
홀로 남은 벨라는 나뭇가지로 불타고 있는 압할라의 머리를 뒤적거렸다.
“멍청한 인간, 괜히 이곳까지 와서 죽음을 자초했어.”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입으로 내뱉었다. 그녀의 입김은 강한 바람이 되어 청동 상자까지 큰 불길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하아, 하아. 벨라, 망치 가지고 왔어.”
무거운 망치를 들고 얼마나 급하게 달려 왔는지 도리스의 얼굴엔 땀이 홍건했다.
“오늘 밤엔 내가 좀 몸이 아플 것 같아. 네가 내 대신 캐서린 님의 방을 지켜 줘야겠어.”
“어? 어, 그래. 알았어, 걱정 말고 푹 자.”
병사들이 불침번을 서는 것처럼 시녀들도 야간에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캐서린의 침실 밖에서 대기해야 한다. 잠을 자던 캐서린이 언제 무슨 지시를 내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저어, 그런데 말이야. 괜찮을지 모르겠네.”
“뭐가?”
평소의 새침한 표정으로 돌아온 벨라는 녹아내린 청동 상자 안에서 두개골을 꺼내며 물었다.
“생각해 보니까 시녀장님의 허락 없이 우리 마음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되잖아. 나중에 아시면 혼이 날 텐데.”
“한번 혼나면 되잖아.”
대수롭지 않게 답하는 벨라의 태도에 기가 죽은 그녀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 한번 혼나면 되지…… 엉덩이에 매 좀 맞으면 되니까.”
시녀들에게 시녀장은 엄격한 존재였다. 잘못하면 꾸지람에서 끝나지 않고 매를 맞기도 한다.
퍼석!
가는 허리와 팔을 가진 벨라는 무거운 망치를 휙 내리쳐 뼈만 남은 압할라의 두개골을 박살 내 버렸다.
시녀답지 않은 그녀의 박력에 도리스는 감탄을 하면서도 그녀가 더욱 두려워졌다.
캐서린의 지시대로 두개골이 가루가 될 때까지 망치질을 한 벨라는 허리를 펴며 도리스를 돌아봤다.
“쓸데없이 나서면 다 이렇게 되는 거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거지.”
망치를 도리스에게 건넨 그녀는 찢어진 치맛자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공관을 향해 걸어갔다.
‘옷을 갈아입어야겠어.’
붉은 성에 오기 전에 그녀는 치마 대신 바지를 주로 입고 다녔다. 그래서 이런 치마가 거추장스러웠다.
‘대사를 위해선 어쩔 수 없어. 내가 참는 수밖에.’
시녀로 위장해 붉은 성에 잠입한 지 어느덧 두 달여가 지났다. 그동안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머리 숙여 캐서린을 주인처럼 모셨다.
가까이서 본 캐서린은 자식들 때문에 심적 고통이 커 거의 폐인처럼 지내다 요즘 들어 술도 끊고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 하는 것 같았다.
‘곧 고통 없는 세상으로 너와 이곳의 사람들을 전부 보내 주지, 후훗’
차가운 미소를 입에 건 그녀는 복도와 접해 있는 그녀의 방문 앞에 섰다.
좌우를 한번 살핀 그녀는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캐서린을 가까이서 모시는 시녀들의 방은 캐서린의 방이 있는 3층에 거의 몰려 있었다. 그녀 역시 그런 방 중에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메디와 함께 이 방을 사용했지만 지금은 그녀 혼자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자살을 했다고 알려진 메디의 침상을 힐끔 쳐다본 그녀는 아무런 감정 없는 눈빛으로 옷상자를 뒤적였다.
치마를 하나 꺼낸 그녀는 옷을 갈아입다 문득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뭐지?’
몸을 숙인 그녀는 짐승의 뼈를 다듬어 만든 정육면체의 물건을 집어 들었다.
‘이건 주사위인데? 이게 왜 여기에?’
눈빛이 날카로워진 그녀는 치마를 서둘러 갈아입고 방 안을 면밀히 살폈다.
누가 다녀간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덩그러니 주사위 하나만 놓여 있던 것이다.
‘바닥을 통해 들어온 거야.’
주사위를 바닥과 문의 틈 사이에 대어 본 그녀는 숙였던 몸을 세우며 침상에 걸터앉았다.
‘누구 짓일까? 무슨 의도로?’
주사위를 손안에서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방문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살짝 긴장을 하며 천천히 몸을 세웠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주사위를 등 뒤로 감춘 그녀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며 문을 두드린 사람을 쳐다봤다.
눈이 깊고 키가 큰 수려한 외모를 갖춘 남자였다.
‘이 사람은 돈조르니와 같이 온 남자?’
압할라를 죽인 공로로 캐서린에게 팔찌와 반지를 받은 남자였다. 그 방에 같이 있었기 때문에 벨라는 도현을 모를 수가 없었다.
도현 역시 문을 열고 나타난 시녀를 단번에 알아봤다. 캐서린의 방 안에 있던 세 명의 시녀 중 한 명이었다.
“안에 사람이 있었군요. 다행입니다.”
“무슨 일로…….”
벨라는 고개를 숙여 도현에게 인사를 한 뒤, 부드러운 얼굴로 물었다.
“혹시 방 안에 주사위가 없던가요?”
“주사위요?”
“네, 제가 실수로 주사위를 떨어트렸는데, 그게 그만 이 방으로 들어가서요.”
“그러셨군요. 저도 지금 들어와서요. 찾아보겠습니다.”
문을 닫고 뒤돌아선 그녀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이걸 내 방에 넣은 게 아니었어. 괜한 걱정을 했네.’
그녀는 잠시 후 문을 열고 태연히 주사위를 내밀었다.
“찾아보니 있었습니다, 여기.”
“고맙습니다.”
리타의 주사위를 되찾은 도현은 기쁜 얼굴로 벨라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뒤돌아섰다.
리타는 아래층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캐서린과의 만남 이후 그들은 바로 대공의 공관을 떠나지 않고 점심을 이곳에서 함께했다.
그것도 대공과 함께.
다른 사람이라면 대공이 신경 쓰여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았겠지만, 도현과 리타는 달랐다. 마치 대공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배고픔을 달랬다.
대공은 기분 나빠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입가에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한번 와 보길 잘했어.’
기분 좋은 얼굴로 복도를 따라 걷던 도현은 슬며시 고개를 뒤로 돌렸다.
등 뒤에서 시녀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뒤를 돌아보니,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잠시 벨라의 방 쪽을 바라보던 도현은 계단을 통해 아래층에서 기다리던 리타와 만났다.
“어떻게 됐어?”
“찾았어. 방주인이 아까 본 캐서린의 시녀 중 한 명이었어.”
“그래? 잘됐네.”
리타는 도현이 내민 주사위를 받으며 기뻐했다.
“이제 집에 가서 주사위 하자.”
-도대체 마법 공부는 언제 할 거냐?
그동안 리타의 호주머니 안에서 숨죽이며 꾹 참고 있던 락제프가 목소리를 높였다.
“스승님, 여긴 대공의 공관이라구요! 누가 들으면 어쩌시려고.”
주변을 살핀 리타가 당황한 얼굴로 대꾸했다.
-도현을 도왔으면 이제 그만 가서 공부해.
“밤을 새웠더니 졸려요. 이제 가서 자려구요.”
뻔뻔한 그녀의 대답에 락제프는 기가 차다는 듯 말문을 잇지 못했다.
-못된 것.
* * *
붉은 성에서 지내게 된 도현과 일행에게는 뜰이 딸린 2층 집이 제공됐다.
뜰은 제법 넓어서 붉은 성에 머무는 동안 그들이 수련을 하기에 공간이 부족하진 않았다.
압할라를 제거하러 간 도현과 리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에드는 그곳에서 영주 딘으로부터 검을 배우고 있었다.
“도현이 워낙 잘 가르쳐서 내가 가르칠 게 없군. 이거 망신을 당하겠어.”
마나 없이 순수한 검술의 기량만으로 에드를 상대하던 딘은 가슴으로 들어오는 에드의 검을 옆으로 빠르게 밀쳐내며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던 왼손으로 단검을 뽑아 에드의 턱 밑에 들이댔다.
턱 밑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단검의 기운에 에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게 왼손도 있다는 걸 간과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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