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6] 디 임팩트 19권 16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떤 느낌과 함께 그는 철가면 휴반트가 스므차를 죽인 범인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그가 범인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단 하나밖에 없다.
‘직접 찾아가 싸워 보면 알겠지.’
스므차를 위해 복수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자신이 목표로 한 대상을 먼저 가로챈 그자에게 응징을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굳은 얼굴로 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칼라치에게 헬구스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자는 왜 관심을 갖는 건가?”
“가면을 썼으니까.”
* * *
촛대에 고정된 촛불 몇 개가 은은한 불빛을 만들며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땀으로 얼룩지고 먼지가 쌓인 가죽 갑옷을 손질한 도현은 탁자 위에 놓아둔 세타이움 장검도 손본 후, 검집에 넣었다.
매끄럽게 들어간 검은 언제 어디서든 도현의 의지에 따라 금방이라도 뽑힐 수 있게 잘 관리가 된 모습이다.
브링틱에서 붉은 성까지, 쉴 새 없이 달려온 시간이었다.
압할라를 죽이고 돌아온 도현은 깊은 밤 모처럼 독립된 자신만의 시간 속에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도장 식구들은 잘 지내고 있겠지?’
장비 점검을 끝낸 도현은 딱딱한 나무 침상에 등을 기대고 앉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으로 홍영과 용주, 철호 형, 그 외 관원들이 한 명씩 떠올랐다.
‘검은 용을 실제로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면 매우 놀랄 거야.’
그들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생각해서 즐겁고 기분 좋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바로 도장 식구들이다.
반면에 그의 얼굴을 굳어지게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태선군.’
등선궁의 비밀 통로를 통해 도주한 그는 더 이상 도현의 상대가 아니었다. 까마득히 높은 하늘 같던 존재가 어느새 그의 눈높이로 내려온 것이다.
제대로 끝까지 싸워 보지도 않고 도주한 그의 뒷모습에 도현은 당시 적잖이 실망을 했었다. 아버지의 원수지만 일대 종사의 기품을 지닌 노검객이라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번엔 당신과 나 사이의 악연을 반드시 끝내겠어.’
태선군은 약초 때문이라도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때 모든 걸 정리할 생각이다.
‘그런데 그는 왜 제자들에게 세 가지 약초들을 구해 오라고 한 것일까?’
구지선엽초, 화룡선초, 천지일란초.
오래된 책에서나 언급된 구하기 어려운 희귀한 것들이라고 들었다. 전설의 약초들이라고 불리는 그것들을 통해 태선군이 무엇을 만들려 하는지 그 의중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침대 옆에 등을 기대고 집 생각을 하던 도현은 두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 딸린 2층 창문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니 높은 담으로 가려진 뜰이 보였다.
밤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에드는 그곳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검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총명하다. 게다가 게으르지 않고 의지가 깊다. 지구인인 나와 체질이 달라서인지 몰라도, 호심공을 통한 내공 상승 속도가 눈에 띄게 빠르다. 홍영이나 용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제자의 성장은 도현을 기쁘게 하고 있었다.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그래서 더욱 들었다.
창가에서 훌쩍 뛰어내린 도현은 나비처럼 사뿐히 뜰에 착지했다. 스승이 등장한지도 모르고 에드는 검에 빠져 진중한 자세로 호검술을 펼치고 있었다.
도현은 바닥의 풀잎 하나를 뽑아 내공을 담았다. 그러자 하늘거리던 풀잎이 빳빳해지며 창처럼 날카로워졌다.
검이 아닌 여러 사물에 기를 주입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도현은 그것을 가볍게 날렸다.
피이잉!
모기가 우는 소리를 내며 암기로 변한 풀잎이 에드의 허벅지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차아앙!
놀랍게도 풀잎과 에드의 검이 부딪치자 짧고 맑은 금속성이 뜰에 울려 퍼졌다.
“아! 스승님!”
스승이 날린 풀잎을 본능적으로 막아 낸 에드는 검을 거두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안 주무셨어요?”
“네 검 소리가 날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스승님. 그만하겠습니다.”
“농담이다. 같이 좀 걸을까?”
도현은 에드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한밤의 거리는 조용했고, 달빛만이 수로를 비추고 있었다.
순찰을 도는 병사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기도 했지만 허가증이 있어서 별문제가 되진 않았다.
‘아무말씀도 없으시고, 괜히 긴장되는데?’
에드는 스승이 말없이 걷기만 하자 자신이 오늘 실수한 게 있는지 곰곰이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에드.”
갑작스레 들리는 스승의 목소리에 에드는 숙였던 고개를 들며 스승의 등을 바라봤다.
스승은 그보다 한 걸음 앞서서 걷고 있었다.
“네, 스승님.”
“가족이 보고 싶지 않냐?”
“괜찮습니다, 스승님.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요, 뭘.”
“가족이란 하루만 안 봐도 그리운 사람들이다. 그게 가족이야.”
도현의 조용한 말에 에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어린 동생 토밀이 말썽부리지 않고 잘 지내는지 궁금했다. 도적단에 파괴된 마을이 잘 재건되고 있는지도 궁금했고.
“내겐 네 마음을 굳이 숨기지 않아도 된다.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은 게 가족인데, 오히려 보고 싶지 않다고 하는 게 정상이 아니지.”
“그렇죠, 스승님? 사실 무지 보고 싶습니다.”
에드는 자신이 나약해 보일까 봐 일부러 강한 척했지만 도현의 말 한마디에 허세가 와르르 무너졌다.
‘순진한 녀석.’
도현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앞을 응시했다. 길 왼쪽으로 작은 계단이 보였다.
저 계단으로 내려가면 낮에 로나와 함께 가 본 고대 유적 터가 나온다.
그곳은 축구장 반 정도의 크기로, 부서진 돌기둥과 나무들이 뒤엉켜진 한적한 곳이었다.
도현은 발걸음을 그곳으로 옮기며 말했다.
“싸움을 하다 보면 내 손에 검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할 거냐?”
“적의 검을 빼앗아서 사용하겠습니다.”
“어떻게 빼앗을 거지?”
“그야…… 잘 싸워서…….”
에드는 계단을 내려가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딱히 답이 없는 질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돌연 그의 검이 저절로 뽑혀서 계단 아래에 서 있는 스승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
깜짝 놀란 에드는 돌계단을 미처 다 내려오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적이 방심한 틈을 노려 이런 수법을 사용하면 검을 쉽게 얻을 수가 있겠지. 검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도 말이야.”
허공섭물의 수법으로 에드의 검을 끌어당긴 도현은 가까이 다가온 에드에게 검을 되돌려주며 앞에 펼쳐진 고대 유적터로 들어갔다.
조각난 돌기둥이 나무 사이로 여기저기 보였다.
“스승님, 이것은 비검술의 일종입니까?”
조금 전 수법이 신기했는지 에드는 뒤를 따르며 물었다.
“비슷해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비검술이 아니다. 비검술은 검의 깨달음과 네 몸속에 있는 마나, 그러니까 내공의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보여 준 이 수법은 검의 경지와는 무관하다.”
“그럼 저도 사용할 수 있는 겁니까?”
“배우기만 하면.”
“우와!”
“좋아하긴 아직 일러.”
쓰러진 고대의 돌기둥 앞에 선 도현은 주위를 한번 살폈다. 달빛과 정적만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비검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몸속 기의 흐름을 일정 부분 이해해야 하고, 그것을 손을 통해 발산해서 멀리 떨어진 사물에게까지 영향을 미쳐야 하니까. 무겁고 그 거리가 멀수록 소모되는 내공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기의 깨달음도 더 많이 요구되지.”
스승의 설명에 에드의 들뜬 마음이 점차 가라앉았다.
“이 수법을 알려 주겠다. 하나, 지금 네 수준으로는 작은 돌 하나도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다. 적의 검을 빼앗고 싶다면 호심공을 꾸준히 수련하고 기에 대한 연구도 스스로 많이 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다른 걸 보여 주겠다.”
도현은 근처 바위를 향해 장풍을 쐈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바위의 일부분이 부서지며 돌가루가 튀었다.
“장풍이라는 것이다. 앞에 수법이 적의 물건을 끌어당기는 것이라면, 지금 이것은 타격을 입혀 파괴를 하는 것이지.”
“굉장합니다, 스승님.”
에드는 부서진 바위를 보며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적과 싸우다 기습적으로 장풍을 쏘면 큰 효과를 발휘할 것 같았다.
“마찬가지로 이 장풍도 쉬운 게 아니다. 실전에서 사용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할 거다.”
싸우다 보면 함정에 빠지거나 여러 위기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도현은 그때를 대비해 에드에게 숨겨진 한 수가 될 수 있는 장풍과 허공섭물 수법을 알려 주고 싶었다.
“가까이 와서 앉아라.”
“예, 스승님.”
도현은 그의 발치에 좌정을 한 에드에게 들릴락 말락 하는 목소리로 허공섭물과 장풍의 묘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신법을 익히고 검에 내공을 실어 사용할 수 있는 에드는 기본적으로 기의 흐름에 대한 이해도가 어느 정도 있어서 도현의 가르침을 어렵지 않게 따라가며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했어도 몸이 바로 따라가 주지는 않았다.
고대 유적터에서 장풍을 쏴 보던 에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뒤돌아섰다.
도현이 팔짱을 끼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손에서 바람 한 점 나오지 않는데요?”
“그럼 처음부터 바로 될 줄 알았냐?”
도현은 낮게 웃으며 고대 유적터를 길게 둘러봤다. 낮에 왔을 때, 이곳엔 구경하는 어베인과 리드만 사제밖에 없었다. 붉은 성 사람들은 이곳을 아예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150년 전에 성을 지을 때 조사가 끝났을 테니까.’
고대인들이 정성을 기울여 만들었을 거대한 돌기둥의 잔해를 잠시 쓰다듬은 도현은 에드와 함께 고대 유적터를 벗어나 집으로 향했다.
그들이 사라지자 고대 돌기둥의 일부분이 꿈틀거리며 사람의 형체로 바뀌었다.
고대의 마법 망토로 몸을 감싸고 있던 벨라였다.
“하아, 하아. 개자식들, 왜 이렇게 오래 있는 거야.”
마법 망토를 이용해 은신해 있느라 극심한 마나 소모가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착용자의 몸을 주위 사물과 동화되게 만드는 고대의 마법 망토는 놀라운 위력만큼 소모되는 마나양도 상당했다. 많은 마나를 가진 그녀 정도나 됐기 때문에 도현이 사라질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감히 내 몸을 만지다니.”
마법 망토로 은신해 있던 벨라는 그녀의 몸을 도현이 쓰다듬었을 때 너무 놀라 하마터면 은신이 풀릴 뻔했다.
도현은 고대의 돌기둥이라고 생각하며 별생각 없이 만졌지만 그 자리엔 그녀가 은신해 있었던 것이다.
“차라리 숨지 말고 죽여 버릴 걸 그랬나?”
지친 그녀는 고대 돌기둥에 기대 헐떡이며 도현을 원망했다. 그의 출현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저자는 돈조르니가 데리고 온 사람인데,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난 거지?”
고대의 마법 망토는 완벽한 은신을 제공하는 대신, 청력은 상실되고 시력만 약간 남게 된다. 그래서 도현이 에드와 무슨 말을 나눴는지 엿들을 수가 없었고, 행동도 잘 보이지 않았다.
“이 시간에 왜 여길 온 걸까? 한밤중에 여길 오는 자는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는데.”
지난 두 달간 붉은 성에 지내면서 그녀는 야심한 시각을 이용해 틈틈이 이곳을 다녀갔다. 붉은 성을 파괴시킬 준비가 이곳에서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뭔가 눈치채고 온 건 아니겠지?”
그녀는 낮의 일을 떠올렸다.
주사위를 찾으러 저 사내가 그녀 방을 찾아오기도 했었다.
“신경 쓰여.”
벨라는 도현이 사라진 어둠 속을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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