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7] 디 임팩트 19권 17화
리타의 음식은 사람의 혀를 자극하는 묘한 마력이 있다. 그래서 에이저는 리타가 만든 음식을 먹기 위해 일부러 도현의 집을 찾아오곤 했다.
잘 웃지 않는 에이저도 리타의 음식을 먹고 나면 순한 할아버지처럼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잘 먹고 간다.”
리타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그는 뜰에서 수련하는 도현의 제자 에드를 잠시 눈여겨보다가 대문을 거쳐 밖으로 나왔다.
집 밖에는 그의 말이 있었는데, 도현이 그 곁에 서서 멀리 시선을 두고 서 있었다.
에이저는 그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붉은 성의 성벽이었다. 성벽이 워낙 높아 성 내부에서는 바깥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참 높은 성벽이지, 견고하고. 적에겐 두려운 성벽이야.”
“그렇습니다. 절벽 같은 바위산을 기어오르는 것도 어렵지만, 거기에 더해 저런 성벽까지 버티고 있으니, 쉽지 않겠죠.”
바위산 위의 붉은 성은 공중 도시나 다름없었다. 보이지만 손에 닿지 않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
“어떻게 하면 전쟁에서 승리를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적극적이군.”
“도우러 왔으니까요.”
도현은 빙그레 웃으며 성벽에서 시선을 뗐다.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나?”
“별로요. 그저 돈조르니 경이 시키는 일이나 잘하자 그런 생각만 들더군요.”
“뭐야? 하하하!”
에이저는 껄껄 웃으며 말고삐를 손에 쥐었다.
“당분간 못 볼 것 같군.”
“어디 가십니까?”
“커딩햄 요새로 지원을 가네. 붉은 성을 보호하는 외곽 방어막의 중심축 중 한 곳인데, 어제부터 사자 동맹군의 공세가 격렬해졌다고 하더군.”
“저도 가야 되는 게 아닙니까?”
“그럴 필요 없네. 자넨 또 자네가 해야 할 일이 있겠지.”
말에 올라탄 에이저의 앞 머리카락이 쌀쌀한 바람에 좌우로 흔들렸다.
“그럼 또 보세.”
은색 활을 등에 멘 그는 말을 몰아 거리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도현은 품속에서 지도를 한 장 꺼냈다.
붉은 성에서 샤르비티가 머물고 있는 본성으로 향하는 길이 검은 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샤르비티가 있는 성.’
적의 수장을 죽여서 전쟁이 바로 종식된다면 도현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과감히 그렇게라도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샤르비티뿐만 아니라 열세 명의 사촌들을 전부 죽여야 한다는 돈조르니의 말에 그 마음을 내려놨었다. 단순히 샤르비티 한 명을 죽여서는 답이 안 나왔기 때문이다.
떨어져 있는 사촌들을 어떻게 한꺼번에 제거한단 말인가?
‘하지만 만약 반란의 주역인 이 열네 명의 수장들을 한자리에서 동시에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는 게 아닐까?’
머리가 열네 개인 괴물이 머리를 모두 잃고 허둥대다 제풀에 쓰러질 것이다.
전쟁의 승기는 확실히 대공에게 넘어오고 반란군을 지원하는 사자 동맹군의 기세는 확연히 떨어질 것이다.
‘대공이 전쟁에서 승리한다.’
지도를 보는 도현의 눈빛이 강해졌다.
붉은 성에서 지낸 지 여러 날이 흘러가고 있었다. 대공과 돈조르니 경은 적이 총공격을 감행하면 그때 반격을 가해 전쟁의 승기를 가져오려는 계획을 짜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될 수도 있지만 예상 밖으로 전쟁이 길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6개월, 1년, 2년, 아니 그 이상.
그것은 도현이 원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도현이 멀리 성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그것에 대한 고민이었다.
‘문제는 내가 생각한 것처럼 그날 그들이 모두 모일 것인가인데…….’
샤르비티 부친의 기념일.
도현이 노리는 건 바로 그때였다.
반란군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샤르비티의 부친 기일을 열세 명의 사촌들은 감히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됐다.
‘이날이 아니면 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는 것을 미리 예상하기 어렵다.’
지도를 접어 품에 다시 넣은 도현은 동료들이 머물고 있는 집을 응시했다.
도현이 그들을 죽이러 간다고 하면 동료들도 분명 같이 가려고 할 것이다.
샤르비티의 10만 대군과 셀 수 없이 많은 강자들 그리고 열세 명의 사촌들을 호위하는 무장들까지.
그날 그 의식이 벌어지는 장소는 용담호혈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만한 장소가 될 것이다.
‘동료들과 가기엔 너무 위험한 곳이다. 하지만 나 혼자서 그들 모두를 상대하기엔 벅차.’
아직 도현은 이 계획에 대해 다른 사람과 상의를 하지 않았다. 샤르비티의 부친 기념일에 샤르비티와 그의 사촌들을 제거하자는 생각은 어제 밤늦게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도현이 고민 깊은 눈빛으로 서 있을 때, 돈조르니가 보낸 병사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돈조르니 경께서 찾으십니다.”
* * *
대공 공관에 도착한 도현은 허리의 검을 빼 친위대에게 넘긴 후, 돈조르니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혼자 이곳에 와도 될 만큼 익숙해져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 아치형의 긴 복도를 걷던 그는 갑자기 위층과 연결된 계단 쪽에서 우당탕탕하는 소리와 함께 시녀 한 명이 굴러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녀는 캐서린의 시녀 중 한명인 도리스였다.
“괜찮습니까?”
도현이 다가와 묻자 도리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일어나 서둘러 대꾸했다.
“괘, 괜찮습니다. 발을 헛디뎌서.”
“다행입니다.”
도현은 빨갛게 부어오른 그녀의 왼쪽 뺨을 보며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이건 손자국 같은데, 계단에서 굴러서 그런 게 아니라.’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그녀는 도현의 시선이 느껴지자 더욱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그의 시선을 피하려 했다.
도현은 자꾸 쳐다보는 것도 실례인 것 같아서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고맙습니다.”
도현은 걸음을 옮기기 전 고개를 들어 계단 쪽을 올려다봤다. 눈에 익은 여자가 계단 중간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녀 벨라였다.
‘캐서린의 시녀…….’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도현은 벨라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시늉을 하자 마주 인사를 하곤 곧 그 자리를 벗어났다.
도현이 복도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벨라는 몸을 떨고 있는 도리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내가 그랬지,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고.”
“미, 미안해. 다시는 안 물어볼게. 난 네가 밤에 어디 갔다 왔는지 사실 전혀 안 궁금해.”
계단에서 물어봤다가 호되게 뺨을 얻어맞고 계단을 구른 도리스는 눈물을 글썽였다.
차가운 눈빛으로 도리스를 노려보던 벨라는 사람들이 근처에 나타나자 도리스를 끌어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울지 마. 나도 널 때려서 미안해. 하지만 다음번엔 때리는 것에서 끝나지 않을 거야.”
“아, 알았어.”
“일하러 가자.”
* * *
‘둘이 싸웠나?’
도현은 두 시녀 사이에 뭔가 있다고 느꼈다.
뺨에 손자국 흔적을 남긴 주인공은 새침한 표정으로 서 있던 계단 위의 시녀일 가능성이 높았다.
‘눈빛이 보통이 아니던데.’
주사위를 찾기 위해 그녀 방을 찾아갔을 때도 얼굴은 부드러웠지만 눈빛 깊은 곳은 굉장히 차가웠었다.
그녀에 대해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돈조르니의 방이었다.
전선에서 올라온 정보원들의 여러 보고서를 읽던 돈조르니는 도현이 들어오자 자리를 권했다.
“에이저는 오늘도 자네 집을 찾아갔나, 리타의 음식을 맛보기 위해?”
“예.”
“그 친구 섭섭하겠어, 내가 다른 데로 보냈거든.”
돈조르니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도현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들었습니다, 커딩햄으로 지원을 가신다고 하던데요.”
“붉은 성에 있는 병력 3천도 그와 같이 보냈다네.”
“상당히 위태로운가 보군요.”
도현이 알기론 붉은 성에 있는 대공의 직속부대는 지난 몇 개월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붉은 성 외곽에 방어막을 친 20만의 베일 연합군으로도 그동안 충분히 버티며 잘 싸워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붉은 성에서 병력이 급파됐다는 것은 이런 상황에 변화가 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붉은 성엔 3만이 넘는 대공의 직속 병력이 있네. 정예병들이지. 이들은 몇 개월간 싸움 없이 훈련에만 열중하고 있었어. 덕분에 실전 감각이 많이 무뎌진 상태지.”
“그럼 실전 훈련을 시키기 위해 일부러 보내셨다는 겁니까?”
“그런 셈이지. 물론, 커딩햄 요새가 격전지기도 해서 지원을 간 것도 맞고. 앞으로 샤르비티의 총공격이 있기 전까지 붉은 성의 군사들은 이런 식으로 실전을 경험하고 돌아올 걸 세.”
돈조르니는 과일즙을 한 잔 따라 도현에게 내밀었다.
“마셔 보게, 대공에게만 가는 것을 내가 한 병 가지고 왔지.”
도현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가는 돈조르니의 말에 가볍게 웃으며 포도 과일즙을 조금 마셔 봤다. 산뜻한 포도 향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대공께서는 자네와 함께 온 리드만 사제가 붉은 성에 일곱 신의 신전을 여는 걸 허락하셨네.”
“잘됐군요. 감사합니다.”
리드만 사제는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비록 전쟁 중이었지만 붉은 성에 작은 신전을 만들어 단 며칠만이라도 신의 말씀을 전파하고 싶어 했다.
“참고로 말하면 대공은 일곱 신을 믿지 않네. 오로지 자네 때문에 신전을 허락한 거야.”
베일 가문은 대대로 특정한 종교를 믿지 않았다. 지금의 대공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가 일곱 신의 신전을 붉은 성에 허락한 것은 확실히 특별한 일이긴 했다.
대공이 도현을 생각하는 마음이 잘 드러난 부분이다.
“리드만 사제님의 신전은 붉은 성 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
빙그레 웃은 돈조르니는 손에 든 과일즙 잔을 내려놓았다.
“내가 자넬 보자고 한 건, 자네와 같이 밀튼 영주의 진영에 가기 위해서네.”
“밀튼 영주 말입니까?”
도현의 머릿속으로 칼라치가 스쳐 지나갔다.
“그곳에 가시는데 왜 저를?”
“자네 혹시 마법학의 대가 율리비어스라고 들어 봤나?”
“율리비어스요?”
도현은 내심 깜짝 놀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누군지.”
브링틱에서 직접 싸우기까지 한 사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가 밀튼 영주의 진영에 와 있네.”
“율리비어스가…… 왔단 말입니까?”
“그렇다네. 대공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밀튼 영주를 통해서 붉은 성으로 보내왔더군. 하지만 시기가 시기인지라 섣불리 그자를 붉은 성으로 불러들일 수는 없지. 워낙 악명 높은 자니까.”
포도즙을 조금 마신 그는 도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를 먼저 만나려고 하네. 무슨 의도로 왔는지 말이야. 한데, 자네 표정을 보니 그를 잘 아는 눈치인데, 만나기라도 한 사이인가?”
도현은 순간 갈등을 했다. 율리비어스 얘기를 하려면 브링틱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도 밝혀야 한다.
“내가 어려운 질문을 한 건가?”
도현의 침묵이 길어지자 돈조르니는 수염을 한번 훑으며 물었다.
“아닙니다.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 중이었습니다.”
“간단한 사이가 아니었나 보군.”
“조금 그렇습니다.”
도현은 율리비어스와 브링틱에서 어떻게 엮이게 됐는지 차분한 목소리로 간략하게 설명해 줬다.
그 안에는 얼음탑주 이야기와 씨드 이야기가 빠질 수가 없었다. 감추고 싶어도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율리비어스가 그를 보게 되면 알은체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과 지금 도현이 하는 말이 다르면 돈조르니와의 관계는 껄끄럽게 될 것이다.
“허허, 이거 참 뜻밖에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군. 그러니까 자네가 얼음탑주를 죽이고 전설의 씨드를 차지했단 말인가? 율리비어스와는 그것 때문에 싸우기도 했고?”
별생각 없이 물어본 것인데, 도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너무 놀랍고 충격을 받으면 헛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세상 경험이 풍부한 돈조르니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대단하군. 그 지독한 얼음탑주와 쌍둥이 검객, 게다가 율리비어스까지 뒤엉킨 그 사이에서 씨드를 차지하다니.”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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