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8] 디 임팩트 19권 18화
“아니야, 그 또한 실력인 것이지.”
돈조르니는 지그시 눈을 감고 도현이 해 준 흥미진진한 거인의 섬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음미했다.
어려서 가문을 떠나 세상을 떠돌았던 모험가인 그도 이런 경험은 해 보지 못했다.
천천히 눈을 뜬 그는 포도즙을 따르며 말했다.
“축하하네. 후대의 역사서에 자네 이름이 씨드의 영웅으로 기록될지도 모르겠어.”
“영웅이라뇨…….”
도현은 괜히 낯이 뜨거워졌다.
“자네의 강함이 이제야 비로소 조금 이해가 되는군. 대단한 검술에, 씨드의 힘까지 얻었으니 말이야. 솔직히 조금 질투가 나.”
돈조르니는 농담을 하며 놀라운 마음을 해소시켰다.
“그나저나 자네 말을 듣고 보니 나도 율리비어스를 만난 적이 있었군, 내가 몰랐을 뿐이지.”
돈조르니는 브링틱에서 얼음탑주 일행과 싸울 뻔한 일이 있었다.
친구인 에이저와 커크가 쌍둥이 검객 세티앙과 루시앙을, 마법사 로제로는 얼음탑주를, 그리고 그는 당시 처음 보는 노인과 대치했었다.
“싸움 직전에 대공의 위기 상황을 전해 듣고 브링틱에서 철수를 했었지.”
“그런 일도 있었군요.”
“어쩐지 범상치 않은 노인네라고 생각은 했는데 말이야, 그가 악명 높은 율리비어스였다니.”
도현은 반쯤 남은 포도즙을 비우고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왜 저와 같이 가자고 하신 겁니까?”
“이유는 단 하나네. 그가 헛소리를 하러 왔다면 그 자리에서 자네의 검으로 그를 베어 버리라고 자네를 데려가는 걸세.”
심장
밀튼 영주는 자식들에게 영지를 맡겨 놓고 대공을 돕기 위해 직접 전쟁에 참전했다.
대공이 좋아서가 아니라 샤르비티가 싫어서였다.
8년 전, 샤르비티의 두 번째 부인으로 들어간 그의 딸이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 죽는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품위를 지키지 못한 그녀의 문란한 사생활이 화근이었지만, 아버지로서 그것을 지켜본 밀튼의 마음은 수치심과 분노로 들끓었었다.
-샤르비티가 대공이 되는 건 두고 볼 수 없다.
베일 가문의 내분 소식을 들었을 때, 그가 대공의 편에 선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율리비어스가 진영에 있으니, 신경이 쓰이는군.”
흰머리 가득한 밀튼 영주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그는 율리비어스와는 전혀 왕래가 없던 사이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 붉은 성의 대공을 만날 수 있게 연락을 넣어 달라고 요구를 한 것이다.
“건방진 자 같으니, 내가 심부름꾼으로 보였나?”
불쾌해하는 그의 모습에 의자에 앉아 있던 윌벤슨이 넌지시 물었다.
“칼라치라면 그를 죽일 수 있습니다. 그리하라고 할까요?”
잠시 고민을 하던 밀튼 영주는 손을 저었다.
“그냥 두게. 이미 붉은 성에 연락을 취했는데, 그럴 수는 없지.”
“갑자기 말썽을 일으켜 어쩔 수 없이 죽였다고 하면 됩니다.”
윌벤슨의 대답에 밀튼 영주는 낮게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그만하게. 내 기분을 맞추려고 일부러 그럴 필요까진 없어. 그보다 그자의 목적이 궁금해. 왜 대공을 만나려고 하는지 말이야.”
“지금 대공을 찾아오는 자는 딱 두 부류일 겁니다.”
“두 부류?”
“대공을 돕는 자와 죽이려는 자. 그가 어느 쪽일지 모르겠군요.”
윌벤슨은 탁자 위에 놓인 자신의 술잔을 들어 한 모금했다. 밀튼 영주와 한 탁자에서 술을 나눌 만큼 그는 신분을 뛰어넘어 밀튼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 만큼 그들의 대화는 허물이 없었다.
“설마 대공을 죽이러 왔겠는가? 그러고 싶어도 저 혼자는 불가능할 것인데.”
“그럼 대공을 도우려 왔겠군요.”
“너무 간단한 대답이 아닌가?”
밀튼 영주는 유쾌한 웃음을 흘리며 지그시 윌벤슨을 응시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는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이보게, 윌벤슨, 칼라치 말일세. 그를 계속 데리고 있어도 안전할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몇몇 신하들이 우려를 표하고 있어, 인간이 아닌 악마와 같다고 말이야.”
“멍청한 작자들의 말이니 귀담아듣지 마십시오.”
윌벤슨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뒤에서 병사들이나 호령하는 신하들이 칼라치의 능력에 질투를 하는 것이다.
“나도 사실 조금은 두렵네.”
“영주님.”
“칼라치의 능력은 존중하네. 하지만 죽은 자들의 힘을 몸속에 가지고 다닌다는 게 불안해. 그의 영혼이 타락할까 봐서 말이야.”
칼라치와 함께 있을 때면 마치 죽은 자와 같이 있는 섬뜩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밀튼이 칼라치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도 있었다.
“칼라치의 능력은 마법사들의 소환술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내 생각은 다르네. 칼라치는 마법을 펼치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죽은 자들의 기운을 품고 있어.”
윌벤슨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져 갔다. 칼라치를 간신히 설득해 데려왔더니 영주와 영주의 신하들은 그를 경계하며 자신들을 해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신중히 생각하셔야 합니다. 칼라치를 떠나보내면 크게 후회하실 테니까요.”
“그렇겠지…… 흐음.”
밀튼 영주의 주름이 더 깊어졌다.
칼라치의 가공할 힘은 알리언의 언덕 전투에서도 드러난 바가 있었다. 놓치기엔 아까운 자였다.
그때 영주의 화려한 군막 안으로 병사 한 명이 들어와 절도 있게 보고를 했다.
“영주님, 붉은 성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누가 왔느냐?”
“대공의 숙부 돈조르니 경입니다!”
* * *
율리비어스는 늘 품속에 작은 펜과 빈 종이로 채워진 책자를 가지고 다녔다. 언제 어디서든 창조적인 마법진이 떠오를 때면 그 자리에서 기록을 해 나중에 깊이 연구하기 위해서다.
몇 시간 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책자를 펼쳐 놓고 묵묵히 펜만 움직이던 율리비어스는 목이 탔는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물 좀 가져다주게. 물병이 비었어.”
“네가 가서 직접 마셔.”
칼라치의 거친 대답에 율리비어스는 펜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손님에게 예의가 없군.”
“네가 손님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게 아니야. 그 해골 지팡이의 출처나 말해 봐.”
율리비어스의 허리에는 검은 해골 지팡이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윌벤슨의 친구인 베르노프가 애지중지하던 지팡이였다.
그것을 왜 그가 가지고 있는지 칼라치는 궁금했다.
“물을 가지고 오면 알려 주지.”
“사람들은 너를 두려워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널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행이군. 가서 물이나 떠 오게 목이 타니까.”
율리비어스의 표정 없는 눈을 들여다보던 칼라치는 밖으로 나가 물병에 물을 채워 왔다.
“이제 말해 봐, 더 이상 내 인내심을 확인하지 말고.”
물로 목을 축인 율리비어스는 약속대로 지팡이의 출처에 관해 말했다.
“베르노프는 죽었네. 그래서 내가 이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답이 되었나?”
“당신이 죽였나?”
“맞아, 내가 죽였지.”
“왜 죽였나?”
칼라치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는 오래전 내 집을 불사르고 마법서를 훔쳐 가려고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한 대답이 되었겠지?”
창백한 얼굴에 깊은 주름이 나무껍질처럼 많은 율리비어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한동안 그를 응시하던 칼라치는 더 이상 물어볼 게 없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묘지기인 베르노프의 스승은 소환술과 관련해 막히는 게 있으면 내게 자문을 구했다. 덕분에 나는 소환술과 관련해 몇 가지 지식을 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지.”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갑옷을 벗고 네 심장에 손을 얹어 봐라.”
“뭐?”
“심장에 손을 얹어 보거라.”
칼라치는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상체의 갑옷을 벗은 후, 가슴에 손을 올렸다. 느리게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 심장은 더욱 느려져 결국 멈출 것이다.”
“헛소리를 하는군.”
칼라치는 코웃음을 치며 갑옷을 다시 걸치기 시작했다.
“베르노프에게 들었다, 네가 브링틱에서 수백의 고대 병사들을 흡수한 사실을.”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산 자가 어떻게 죽은 자와 공존할 수 있겠느냐? 수백의 고대 병사들은 네 심장을 조금씩 죽은 자의 심장으로 바꾸어 버릴 것이다.”
“내가 죽는다는 건가?”
갑옷을 입던 칼라치의 손길이 뚝 멈췄다.
“죽음으로만 끝나는 게 아닐 거야……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겠지.”
그의 불길한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칼라치의 방패 끝이 율리비어스의 목울대에 도달했다.
“늙은이! 무슨 꿍꿍이로 그런 헛소리를 늘어놓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런 말에 속아 넘어갈 것 같은가? 베르노프는 나를 부러워했다, 그런 부작용은 말하지 않았어.”
“믿지 않아도 돼. 믿든 안 믿든 그건 너의 자유니까.”
방패를 옆으로 밀어 낸 율리비어스는 펜을 들어 다시 빈 종이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눈빛이 살짝 흔들린 칼라치는 상체의 갑옷을 마저 입은 후 자리에 다시 앉았다.
상대는 마법의 천재로 불리던 마법학의 대가 율리비어스다. 솔직히 믿기지 않지만 그의 말을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정말인가?”
무거운 얼굴로 칼라치가 물었다.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말과 달리 그의 표정은 전혀 안타까워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저 무덤덤했다.
“구체적으로 말해 봐. 내가 언제 죽고, 어떻게 변하는지.”
“나야 알 수 없지. 1년 뒤가 될지, 10년 뒤가 될지, 혹은 몇 개월 뒤가 될지. 자네 심장 아닌가, 매일 확인해 보게. 심장이 느려지는 게 감지될 거야. 그리고 자네가 어떻게 변화될지는 나도 모르겠군. 베르노프의 스승이 내게 알려 준 지식은 그렇게 자세하지 않았으니까.”
“왜 내게 이런 사실을 말해 주는 거지,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인데.”
“말해 줘서 불만인가? 그럼 못 들은 걸로 해.”
그는 의자에 앉은 채 발로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진에서 생성된 바람에 의해 천막이 거칠게 흔들렸다.
“이건 아니군.”
발로 마법진을 없앤 그는 조금 전의 일을 책자에 꼼꼼히 기록했다.
“해결 방법은 없나?”
“없다.”
단호한 그의 대답에 칼라치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앉아 있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봤다. 율리비어스의 숙소를 포위한 채 지키고 있던 경비대장이었다.
“붉은 성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알았소, 곧 나가겠소.”
칼라치는 의자에 앉아 있는 율리비어스를 힐끔 쳐다본 뒤 밖으로 나왔다.
그곳엔 붉은 성에서 온 일단의 사람들이 서 있었는데, 그중에는 도현도 껴 있었다.
‘백도현.’
‘칼라치.’
도현과 칼라치의 시선이 짧은 시간 교차했다.
“들어가지.”
돈조르니의 말에 정신을 차린 도현은 칼라치를 지나쳐 율리비어스의 숙소로 걸어 들어갔다.
등 뒤로 칼라치의 시선이 뜨겁게 느껴졌다.
* * *
도현을 알아본 율리비어스의 눈에 당혹스러움과 놀람이 스쳐 지나갔다.
거인의 섬에서 씨드를 차지한 도현을 설마 이 자리에서 다시 보게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듯했다.
‘이 녀석의 손에 얼음탑주가 죽었지.’
쌍둥이 검객처럼 그 역시 호수를 바로 떠나지 않고 도현과 얼음탑주의 싸움을 멀리서 지켜봤었다.
얼음탑주에게 냉정한 최후를 선사하던 도현의 그 강렬한 모습이 그의 뇌리에는 여전히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또 보는군.”
“그렇군요.”
짧은 인사를 나눈 둘은 그렇게 한동안 서로를 응시하기만 했다.
그 모습을 잠시 옆에서 지켜보던 돈조르니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문을 열었다.
“내가 누군지는 알 거라고 생각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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