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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469화 (469/575)

[469] 디 임팩트 19권 19화

“물론, 대공의 숙부가 아니시오, 돈조르니 경.”

“브링틱에서 나와 싸울 뻔한 일은 기억하시오?”

“기억하다마다. 돌이켜 보면 그때 싸우지 않은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서로를 위해서.”

율리비어스는 도현에게서 시선을 떼며 대꾸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왜 대공을 만나고 싶어 하는 거요?”

“그건 대공과 직접 만나서 할 이야기 같은데.”

“대공이 나를 보내셨소. 그러니 내게 말하시오.”

“흠.”

율리비어스는 들고 있던 펜을 책자 사이에 내려놓고 돈조르니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 내가 대공을 만나고자 한 이유는 거래를 하기 위함이오.”

“거래?”

“샤르비티와 싸우는 데 내가 도움을 주겠소. 대신 ‘테르논의 석판’을 보고 싶소.”

“테르논의 석판을?”

돈조르니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율리비어스를 쳐다봤다.

테르논의 석판은 수백 년간 그의 가문에 내려오는 물건 중 하나로, 대대로 대공만이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

테르논 지역에서 발견되어 테르논의 석판이라고 이름 붙은 그 고대의 석판엔 해석이 불가능한 고대의 마법 이론이 기록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수백 년 전, 많은 마법사들이 그 석판을 해석하려다가 실패했고, 시간이 흐르며 잊혀 가는 물건이 됐다.

돈조르니도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지나가는 말로 가볍게 들었을 정도로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나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그도 테르논의 석판은 실물로 본 적이 없었다.

“테르논의 석판은 왜 보고 싶어 하는 거요?”

“세상 사람들이 날 악마처럼 보며 손가락질하지만, 난 마법을 탐구하는 사람이오. 그것에 일생을 보낸 사람이지. 수백 년 전, 베일 가문이 발견해서 보관해 온 테르논의 석판은 나의 이런 탐구심을 자극하는 물건 중 하나요. 그래서 오래전부터 꼭 보고 싶었지.”

“오래전부터?”

“그렇소. 그러고 보니 30년이 넘었군. 현 대공의 부친이 베일 가문을 다스리던 시기였지.”

율리비어스는 과거 일을 떠올리는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난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소. 내가 당시 대공께 테르논의 석판을 보고 싶다고 했더니, 꺼지라고 하더군.”

“형님 성격에 당신을 살려 보낸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겼어야 할 거요.”

돈조르니는 전대 대공인 큰형을 생각하며 대꾸했다. 그는 성격이 급하고 화를 잘 내는 편이었다.

“아무튼 그 이후로 알아봤더니 테르논의 석판은 대공만이 그 위치를 알고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됐지. 그래서 조용히 물러났소.”

“그럼 30년이 흘러 다시 찾아온 이유는 뭐요?”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율리비어스의 눈이 웃고 있었다.

“30년 전에는 대공이 아쉬울 게 없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잖소? 적어도 대공과 나 사이에 타협을 볼 지점이 생겼다고 보았지.”

악명이 높은 자지만 그만큼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다. 마법에 대한 지식과 마법진에 있어서만큼은 대륙 제일일지도 모른다.

아군이 되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불안한 자였다.

“테르논의 석판 때문에 대공을 돕겠다는 당신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군.”

“쓸데없는 의심은 시간을 낭비하고 서로를 지치게 할 뿐이지. 난 땅이니 권력이니, 이딴 건 관심 없소. 오로지 마법만 관심의 대상일 뿐.”

차가운 미소를 지은 율리비어스는 돈조르니의 뒤에 말없이 서 있는 도현을 한번 쳐다본 후 말을 이었다.

“이것이 내가 대공께 하고 싶었던 말이오. 당신은 돌아가서 내 말을 대공께 전해 주시오.”

* * *

돈조르니는 수십의 기병을 이끌고 붉은 성으로 돌아갔다. 율리비어스의 일을 대공과 상의하기 위해서다.

다만 도현은 밀튼 영주의 진영에 남았다.

율리비어스와 단둘이 남게 된 도현은 말없이 의자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고, 율리비어스는 그대로 종이에 뭔가를 적으며 자기만의 일에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이대로 둘을 놔둬도 하루 종일 말 한마디 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약간의 냉랭한 분위기가 유지되는 가운데, 밀튼의 사람들이 들어와 탁자 위에 저녁 음식과 술을 차려 놓고 나갔다.

하지만 둘 다 음식엔 손을 대지 않았고, 어두운 밤은 깊어만 갔다.

도현을 없는 사람 취급하던 율리비어스는 펜을 놓고 고개를 들었다.

“좋겠구나, 씨드를 차지해서.”

오랜만에 입을 연 그는 독설에 가까운 이야기를 도현에게 날렸다. 그날의 일에 대한 마음속 앙금이 여전히 그에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왜 여기에 앉아 있는 거지?”

“돈조르니 경으로부터 지시를 받았습니다.”

“무슨 지시를?”

“당신이 수상한 행동을 하면 그 즉시 베어 버리라고 하더군요.”

섬뜩한 얘기를 하며 도현은 두 눈을 떴다. 그 눈빛이 얼마나 차가웠던지 율리비어스의 마음 한쪽이 서늘해졌다.

‘진짜 날 죽일 생각으로 앉아 있구나.’

다른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면 그 자리에서 코웃음을 치며 말한 상대를 죽여 버렸겠지만 상대는 다름 아닌 도현이었다.

씨드를 먹기 전에도 그는 강했고, 씨드를 먹은 후에는 더욱 강해졌다.

실제로 그를 향해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사내였다.

“대공을 돕고 있나?”

율리비어스는 술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바쁘게 움직이는군. 브링틱에 있더니 얼마 후엔 여기까지. 대가로 무엇을 받기로 했지?”

“굳이 알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담담한 도현의 대답에 율리비어스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은 운이 좋군, 네 도움을 받고 있다니.”

“진짜 의도가 뭡니까? 정말 그 석판 때문입니까?”

“그렇다.”

“대공이 당신의 제안을 거부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율리비어스는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도현을 봤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그는 전쟁에서 이기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이다. 그는 내 힘을 필요로 할 것이야.”

자부심 강한 대답이었다.

“그렇군요. 내일이면 알 수 있겠습니다.”

도현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른 후 길게 들이켰다. 악명이 자자한 율리비어스 앞이었지만 그의 행동은 조금의 위축도 두려움도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엔 내색하지 않은 고민이 깊어만 가고 있었다.

‘타투는 미완성 마법진의 한 부분. 락제프는 이것을 완성시킬 수 있는 마법사로 율리비어스를 지목했다. 물론, 가능성이긴 하지만.’

마법 구조물을 만들 때 보여 준 그의 창의적이고 천재적인 마법 실력은 고대의 마법사인 락제프조차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도현은 술을 한 잔 더 따라 마시며 눈앞에 율리비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속을 잘 보이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과 눈빛,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

동정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게 생긴 냉정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그가 내 타투를 통해 완성된 마법진을 만들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설사 만들 수 있다 해도 지구의 스톤과 같은 것을 만들어 낼지 불확실하고.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이것을 통해 차원의 비밀을 밝혀낼지도 모른다는 거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도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율리비어스는 바크 드라모스가 눈여겨볼 정도로 뛰어난 마법적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설마 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없었다.

‘차원의 비밀을 이 사람이 알아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미완성 마법진을 완성시키기 위해 타투를 그에게 보여 줄까 말까 고민하던 감정이 일순간에 싹 사라졌다.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왜 그렇게 빤히 날 보는 거지?”

도현의 시선을 느꼈는지 술을 마시며 펜을 움직이던 율리비어스가 고개를 들어 도현을 응시했다.

“오래전 마법진을 실험하다 작은 도시를 파괴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지.”

“일부러 그런 겁니까?”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그 때문에 나도 많은 고생을 했고.”

당시 피해를 입은 도시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처참히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율리비어스는 그 때문에 한동안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었다. 악명이 자자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도 사실 그 때문이었다.

“혼자 있고 싶으니, 그만 나가 줬으면 좋겠군. 내 발로 걸어온 이곳에서 내가 수상한 짓을 할 이유는 없으니까.”

도현은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다시 오죠.”

“그건 내 의도가 아니다. 나도 도시를 파괴하고 싶지 않았어.”

밖으로 나가는 도현의 등을 보며 지나가는 말투로 율리비어스가 말했다.

도현은 고개를 돌려 율리비어스를 잠시 응시하다 천막 밖으로 나왔다.

찬 바람이 들판에 세워진 밀튼 영주의 진영을 훑고 지나가고 있었다.

“백도현.”

깊고 굵은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도현은 옆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적발 거한의 사내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칼라치.’

도현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의 예상대로 칼라치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리를 옮겼으면 좋겠군.”

“좋을 대로.”

도현은 피하지 않았다. 피할 상황도 아니었고.

* * *

밀튼 영주의 진영을 벗어난 두 사람은 작은 숲에서 마주 섰다.

두 사람이 내뿜는 강한 기세에 숲의 나뭇잎들이 요동치며 흔들렸고, 밤에 우는 곤충들은 놀라 두 사람 주위에서 멀찍이 도망쳤다.

“그새 또 성장했군. 씨드를 먹었나?”

칼라치의 물음에 도현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헬구스에게 들었을 거야, 내가 고대 병사의 힘을 흡수한 것을.”

“나를 만난 걸 알고 있었군.”

“느낌이라는 게 있으니까.”

칼라치는 등에 멘 방패를 손에 들며 조용히 대꾸했다.

“하지만 걱정 마, 그는 여전히 내 친구니까.”

“다행이군.”

“괜찮은 싸움이 되겠어. 기대되지 않나, 씨드를 먹은 너와 고대인의 힘을 얻은 내가 싸웠을 때 누가 승리하게 될지?”

“글쎄.”

도현은 허리의 검을 뽑아 손에 쥐었다. 분위기를 보니 칼라치는 이 자리에서 결판을 내려는 것 같았다.

‘그는 전쟁과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사내였던가? 아쉽군.’

그와 싸우게 되더라도 전쟁이 마무리된 후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칼라치의 보라색으로 물든 눈을 보며 서서히 깨졌다.

“너를 꺾고 싶은 승부욕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치고 올라온다. 그러나 오늘은!”

칼라치는 손에 든 두 개의 방패를 땅에 힘껏 박았다.

땅을 두부처럼 가르며 깊이 박힌 두 개의 방패 끝이 부르르 떨렸다.

“오늘은, 그날이 아니다. 싸움을 미루겠다.”

뜻밖의 말이었다.

“왜지?”

도현은 검을 거두며 물었다.

“네가 날 피하지 않을 거라는 걸 오늘 확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넌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날 기다려 줄 거야. 안 그런가?”

“화끈하게 싸워 주지.”

칼라치의 외눈을 보며 도현은 힘주어 답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이군.”

땅에 박힌 방패를 뽑아 등에 다시 찬 칼라치는 진영을 향해 걸어갔고, 도현도 그 옆을 나란히 걸었다.

말없이 걷던 칼라치가 입을 열었다.

“이디언을 구해 줘서 고마웠다.”

“일부러 구한 건 아니야. 때마침 눈에 보여서.”

“폭주 현상은 해결했나?”

“아직.”

“씨드도 효과가 없었나 보군. 나와 싸울 때 폭주를 하게 되면 매우 위험하게 될 거야. 나는 네 폭주의 약점을 알고 있으니까.”

“걱정해 줘서 고맙군.”

도현은 쓴웃음을 흘렸다.

칼라치는 진영 외곽을 경비하는 병사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술 한 병 있으면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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