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0] 디 임팩트 19권 20화
보초를 서던 그들은 칼라치를 알아보고는 슬그머니 발밑에 던져 놓았던 술병을 집어 들어 건넸다.
근무 중에 술을 마시는 건 안 되는 일이라 숨겨 놓은 것인데, 칼라치가 알아채고 달라니 안 줄 수도 없었다.
“이건 술값.”
은화 한 개를 던져 준 그는 먼저 술 한 모금을 한 후, 옆에 도현에게 술병을 넘겼다.
갈증이 있었던 도현은 사양하지 않고 술을 마셨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칼라치는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물었다.
“다크캐슬의 스므차가 죽었다. 알고 있겠지?”
“헬구스에게 들었어. 갑작스러운 일이지.”
“범인은 가면을 쓴 검사라던데…… 우연인지 몰라도 사자 동맹군 중에 철가면을 쓴 강한 검사가 나타났다. 내가 누굴 말하는 건지 알고 있겠지?”
“휴반트를 말하는 거군.”
도현의 머릿속에 철가면 휴반트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어땠나? 너와 싸우기도 했다던데.”
“강한 자야. 검술의 깊이는 내가 감탄할 정도고.”
“스므차를 죽인 범인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칼라치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도현은 그의 눈빛을 받아 내며 담담히 대꾸했다.
“흠, 실력만으로 보면 스므차 성주도 그의 상대가 되긴 어려웠을 거야.”
“그자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겠군.”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어.”
“스므차 같은 자를 검으로 죽일 검사가 대륙에 몇이나 있겠나? 그리고 그중에 특이한 가면을 착용한 자는 또 몇이나 되겠고?”
칼라치의 지적은 옳았다. 도현 역시 그 점을 생각하면서 휴반트가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계속 품고 있긴 했었다.
“그가 스므차를 죽였다면?”
“놈은 내 손에 죽는다.”
칼라치의 목소리에 살기가 진득하게 묻어 나왔고, 도현은 살짝 놀라며 의아해했다.
‘스므차와 사이가 좋진 않았을 텐데. 다크캐슬 전쟁에서 스므차에게 크게 부상당해 죽을 뻔했고. 그런데 왜 마치 복수를 하려는 사람처럼 보이는 거지?’
도현은 자신이 착각을 했나 싶어 칼라치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봤다. 그는 걸음을 옮기며 술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스므차를 죽인 자를 왜 죽이려는 거지?”
“얼음탑주에게 죽을 위기에 처한 너를 내가 왜 구해 준 줄 아나? 내 손으로 널 직접 꺾고 싶어서야. 스므차도 마찬가지다. 내가 직접 꺾고 싶었던 적수야. 한데, 놈이 내 먹이를 가로챘어. 배를 갈라 내 먹이를 가로챈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그렇군.”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보였지만 도현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경고했다.
“휴반트는 쉽게 볼 상대가 아니야. 전장에서 만나면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칼라치는 도현의 경고에 피식 웃으며 걸음을 멈췄다.
저만치 밀튼 영주의 진영이 보였고, 그 위로 밤하늘의 별들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아름다운 밤이야.”
들판을 휘몰아치는 찬 바람이 길게 기른 칼라치의 적발을 휘날렸고, 도현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린 자세로 칼라치가 바라보는 밤하늘을 같이 올려다봤다.
“당신 눈을 하나 빼앗은 게 지금 와서 후회가 되는군.”
“사내가 후회를 해서야 쓰나. 그리고 난 널 죽이려고 했는데. 전쟁이 끝난 후 보자고, 둘 중에 한 명은 저 밤하늘을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으니까.”
칼라치는 그 자리에서 도현과 헤어졌고 도현만이 홀로 남게 됐다.
“어딘지 좀 변했어.”
한동안 칼라치와 만난 여운 속에 서 있던 그는 율리비어스의 숙소로 향했다.
그는 침상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도현은 조용히 촛불을 끄고 바닥에 좌정을 했다.
“가서 잠을 자거라,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잠을 자는 줄 알았던 율리비어스가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밀튼 영주가 따로 숙소를 내주지 않더군요. 어쩔 수 없이 여기서 같이 밤을 보내야 합니다.”
도현의 대답에 그는 포기했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 * *
“도현과 싸우지 않은 건 잘한 일이에요. 밀튼 영주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이디언이 칼라치의 탄탄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도현은 대공의 숙부와 붉은 성에서 온 사람이었다. 칼라치가 그를 공격하면 문제가 커질 수도 있었다.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그를 없애요.”
차가운 그녀의 말에 침상에 누워 있던 칼라치가 상체를 반쯤 일으켜 세웠다.
“이디언, 당신은 도현이 고맙지 않소? 당신을 구해 줬는데?”
“그가 나를 구해 준 건 물론 고마운 일이죠. 하지만 그는 당신의 한쪽 눈을 이렇게 만들었잖아요. 내가 어떻게 그를 좋아할 수가 있겠어요. 게다가 얄밉게도 씨드까지 차지했다는데.”
그녀는 분한 눈빛으로 칼라치의 다친 눈을 어루만졌다.
“우린 과거 서로를 죽이기 위해 싸운 사이요. 내 눈은 그러다 다친 것이고. 그러니 너무 그 일로 그를 미워하지 마시오. 어찌 됐건 그는 당신을 구해 준 사람이니까.”
칼라치는 침상에서 내려와 옷을 걸쳐 입었다.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거예요?”
“헬구스를 만나고 오겠소.”
“지금요?”
“곧 돌아오겠소.”
숙소를 나선 칼라치는 작은 천막을 혼자 사용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 헬구스의 천막을 젖히고 들어갔다.
홀로 있으리란 예상을 깨고 헬구스는 대여섯 명의 용병들을 모아 놓고 도박을 벌이고 있었다.
“어? 이 시간에 웬일인가?”
술이 거하게 들어간 헬구스는 돈을 따서 기분이 좋았는지 불그스레해진 얼굴로 웃으며 물었다.
“적당히 하게.”
“어, 자네도 와서 한판 하지그래? 재밌는데.”
“내일 보세.”
칼라치는 눈치를 보는 용병들을 한차례 훑어본 후, 천막을 다시 나왔다.
그의 손에는 헬구스의 천막에서 가지고 나온 술병이 들려 있었다.
헬구스와 얘기를 좀 나누려고 했는데 오늘은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씁쓸한 눈빛으로 그는 밀튼 영주의 진영을 발이 가는 대로 걸으며 술을 마셨다.
낮에 율리비어스가 한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죽음으로만 끝나는 게 아닐 거야……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겠지.
심장에 손을 얹어 봤다.
확실히 평소에 비해 심장의 움직임이 느려져 있었다.
사실, 율리비어스가 오늘 불길한 말을 해 주기 전부터 그는 자신의 심장에 이상이 있다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이디언, 불쌍한 이디언.’
그는 이 순간에도 자신이 아닌 그녀가 먼저 생각났다.
푸베지토
친위대가 지키는 대공의 집무실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서서히 열렸다.
그 안으로 돈조르니와 도현, 율리비어스가 들어섰다.
그들은 붉은 융단이 깔린 통로를 통해 대공이 앉아 있는 단 근처까지 다가갔다.
“대공을 뵈옵니다.”
머리에 쓴 후드를 벗은 율리비어스는 정중한 자세로 예를 취했다. 오만한 그였지만 대공의 지위를 인정 안 할 수가 없었다.
‘대공은 그에게 무슨 말을 할까?’
밀튼 영주의 진영에서 율리비어스와 함께 말을 타고 온 도현은 한쪽으로 비켜서서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지켜봤다.
“그대가 율리비어스인가?”
얼음처럼 차가움이 묻어나는 냉정한 시선으로 율리비어스를 바라보던 대공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숙부를 통해 그대의 제안은 잘 들었다. 날 돕는 대신 테르논의 석판을 보고 싶다고 했다지?”
고개를 반쯤 숙이고 있던 율리비어스는 고개를 들어 대공을 응시했다.
“그리 말한 게 맞습니다.”
“테르논의 석판은 수백 년간 잠들어 있었다. 비록 해석하지 못한 것이지만, 가문의 선조들은 우리 가문이 첫 성을 지을 때 발견한 그 석판에 무한한 가치를 부여했다. 그것은 신성한 물건이고, 함부로 외인에게 보여 줄 게 아니다.”
“하지만 수백 년 전엔 많은 마법사들이 그 석판을 보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석판의 해석을 위해 일시적으로 그리한 것이었고, 지금은 다르다. 수백 년간 석판은 봉인된 채로 우리 가문을 지키며 그 역사를 유지하고 있다.”
대공은 의자의 팔걸이에 손을 얹으며 율리비어스를 지그시 응시했다.
“해서, 너의 제안은 거절한다.”
“대공.”
율리비어스의 안색이 굳어졌다.
“다른 것을 말하라. 그리하면 내가 듣고 판단하겠다.”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황금이나 땅은 모두 내게 하잘것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테르논의 석판을 보여 주십시오.”
“안타깝군, 그대가 악명이 높지만 중하게 쓰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리 고집을 피우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대공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율리비어스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전쟁에서 지고 나면 샤르비티가 대공이 될 것입니다. 그 뒤에 테르논의 석판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닥쳐라! 감히 누구 앞에서 그런 말을 지껄이는 것이냐!”
노한 돈조르니 경이 크게 그를 꾸짖었다.
그러나 율리비어스는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대공에게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다.
“대공은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핏줄도 외면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희생과 결단을 왜 테르논의 석판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것입니까? 가문은 가문일 뿐, 결코 수백 년 전 그 물건 하나에 좌지우지될 게 아니지 않습니까? 부디 깊게 생각하시고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전쟁에 패하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습니다.”
“이 작자가!”
공관에 무기를 들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친위대와 대공의 숙부 정도에 국한되어 있었다.
번개처럼 검을 뽑은 돈조르니 경은 흰 수염을 휘날리며 율리비어스의 목을 향해 검을 내뻗었다.
“한마디만 더하면 대공에 대한 불경죄로 목을 베겠다.”
“그만!”
대공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만하면 됐습니다, 숙부. 그의 말도 과히 틀린 것은 아니니까요.”
“말을 가려서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율리비어스.”
검을 거둔 돈조르니는 옆으로 물러났다.
“흥!”
율리비어스는 낮게 코웃음을 치며 대공을 똑바로 쳐다봤다.
“테르논의 석판을 해석하면 그 내용을 대공께도 알려 드리지요. 아마 세상에서 그 석판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저밖에 없을 것입니다.”
“대단한 자신감이로군.”
“마법과 관련해서는 저를 따라올 자가 없습니다.”
도현은 율리비어스의 자부심 가득한 표정을 보며 왼팔의 타투에 손이 갔다.
‘대공은 어떤 결정을 내릴까? 가문을 사랑하는 만큼 테르논의 석판도 중요시하는 것 같은데.’
넓고 천장이 높은 집무실이 한동안 정적에 빠질 만큼 조용했다.
대공의 생각이 길어지는 것 같았다. 단 위의 의자에 앉아 물끄러미 율리비어스를 내려다보던 대공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내가 테르논의 석판을 보여 주겠다고 하면 그댄 나를 어떤 식으로 도울 건가? 구체적으로 말해 보게.”
“먼저 붉은 성에 마법진을 설치해 방어를 더욱 공고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대공이 샤르비티군을 공격할 때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마법진을 이용해 적들을 몰살시켜 버리겠습니다.”
“수십 년 전, 그대가 도시 하나를 날린 것처럼 말인가?”
대공의 말에 율리비어스의 눈썹이 꿈틀됐다. 잠시 대답이 없던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신다면…… 그렇게도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수많은 적들이 몰려 있는 곳에 도시를 파괴할 만큼 강력한 마법진이 발동된다면 지옥이 따로 없을 것이다.
“그대는 무서운 사람이로군.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이는 게 대륙의 평화를 위해 좋을지도 모르겠어.”
의자에서 일어난 대공은 단의 계단을 걸어 내려와 율리비어스 앞에 섰다.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내게 필요한 건 전쟁의 승리다. 샤르비티의 군을 괴멸시키더라도.”
얼음처럼 차가운 대공의 눈빛 속엔 한 점 자비도 없었다.
“단, 테르논의 석판은 전쟁에서 승리 후, 그대에게 갈 것이다. 동의하나?”
테르논의 석판은 현재 이곳에 있지도 않았고, 그곳이 어디인지는 대공밖에 모른다.
율리비어스는 잠시 대공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쟁에서 승리 후, 테르논의 석판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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