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 디 임팩트 19권 21화
대공의 사람이 된 율리비어스는 돈조르니의 방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그가 해야 할 일을 지시받았다.
누구에게 명령받는 게 익숙하지 않았지만 율리비어스는 돈조르니에게 명목상으로라도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도현, 그를 자네 집에 며칠만 머물도록 하게. 그의 거처를 정할 동안만.”
“예? 저희 집에 말입니까?”
도현은 일곱 명의 인원이 북적거리는 자신의 집을 떠올렸다. 그들은 율리비어스를 그리 반기지 않을 것 같았다.
특히나 짐브리오는 율리비어스의 마법에 부상당하기도 한 과거가 있어서 그를 아주 안 좋게 보고 있었다.
“왜, 안 되는가?”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만…….”
도현은 고개를 돌려 뒤편 탁자 앞에 앉아 있는 율리비어스를 응시했다. 그는 붉은 성 내부 모습이 그려진 지도를 훑어보고 있었다.
“저자를 맡길 사람이 자네밖에 없군. 당분간 가까이서 지켜보게.”
의미심장한 돈조르니의 말에 도현은 별수 없이 그를 집으로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율리비어스, 며칠만 도현의 집에서 같이 생활하시오. 당신이 지낼 곳을 찾아볼 테니.”
“알겠소.”
그는 지도를 접어 품속에 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도현은 돈조르니에게 인사를 한 후, 율리비어스와 함께 돈조르니의 방을 나섰다.
아치형 복도를 걷던 도현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율리비어스에게 물었다.
“기분이 좋으십니까?”
“한심한 전쟁에 끼어든 게 마음에 들진 않지만, 테르논의 석판을 볼 기회는 생겼으니까.”
“좋은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말해 봐.”
“배신하면 끝까지 쫓아가 당신을 죽일 겁니다. 그러니 다른 생각 하지 마십시오.”
율리비어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건방진.”
“하지만 당신이 진심으로 대공을 돕는 거라면 그땐 내가 누구보다 든든한 조력자로 당신을 지지할 겁니다.”
“걱정 마라, 나도 명예가 있는 사람이니까.”
“기대하겠습니다.”
서먹서먹해진 분위기 속에서 대공의 공관을 빠져나온 둘은 밤거리를 걸었다.
묵묵히 앞서 걷던 도현에게 율리비어스가 물었다.
“집은 조용한가? 난 시끄러운 게 딱 질색인 사람이야.”
“이런, 말을 안 했군요. 저 혼자 사는 게 아닙니다.”
“시종이라도 두고 있는 거냐?”
율리비어스는 대공이 도현을 특별히 여기는 것을 눈치챘다. 씨드를 먹은 최고의 검사이니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시종은 아니고 친구이자 동료들입니다. 아마 보면 기억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몇 명이나 있는 거지?”
불안한 시선으로 율리비어스가 물었다.
“일곱 명입니다. 다들 시끄럽고 활발한 사람들이죠.”
도현의 대답에 율리비어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저녁을 배불리 먹고 마법 공부를 하던 리타는 어느 순간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책상에는 락제프가 말해 준 마법 이론을 정리한 책이 펼쳐져 있었는데, 고개를 숙이고 잠을 자는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침이 그 책을 더럽히고 있었다.
락제프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일어나.
“…….”
-일어나!
락제프의 고함 소리에 놀라 퍼뜩 깬 그녀는 손등으로 침을 닦아 냈다.
“왜요, 스승님?”
그녀는 마치 졸지 않은 것처럼 천역덕스럽게 말을 하며 자수정을 응시했다.
-졸았지?
“아니요. 안 잤는데요.”
-책을 보거라.
리타의 시선이 침이 고인 책으로 향했다. 그녀는 얼른 옷소매로 침을 닦았다.
“이게 왜 여기 묻어 있지?”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스승의 눈치를 봤다.
-졸리면 누워서 편하게 자라, 앉아 졸지 말고.
스승의 따뜻한 말에 리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진심으로 하신 말씀이세요?”
-그래.
“헤헤,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녀는 얼른 침상에 누워 눈을 감았다. 잠자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어제 새벽까지 마법 공부를 하느라 오늘은 좀 피곤했다.
그녀는 한번 공부를 하면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했는데, 그럴 때는 세상의 모든 지식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오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 나면 며칠은 또 공부하기 싫어하는 어린아이처럼 변한다.
그것은 리타의 특성이었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던 리타는 눈을 감은 상태로 락제프에게 말을 걸었다.
“스승님, 그거 아세요?”
-뭘 말이냐.
“며칠 전에 도현에게 들었는데요. 도현이 태어난 지구에는요 새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는 거대한 기계라는 게 있대요. 이름이 뭐라더라…… 아, 비행기라고 하던데. 아무튼 사람들이 그것을 타고 먼 곳으로 이동한다네요.”
-말 타고 다니면 되지, 그쪽 세계의 인간들은 쓸데없는 걸 만들었군.
“바다 밑으로 다니는 거대한 배도 있대요.”
-바다 밑으로 왜 다녀, 배 타고 바다 위로 다니면 되지.
“음, 그것도 그렇겠네요. 아무튼 도현이 사는 지구라는 곳은 여러 신기한 물건들이 많은 것 같아요. 아…… 가서 구경하고 싶다, 지구라는 곳.”
지구에 대한 환상을 품은 그녀는 조금씩 잠의 세계로 빠져 들어 갔다.
“율리비어스를 만나러 간 도현이 돌아오면 지구에 대해 더 물어봐야지…….”
그녀가 막 깊이 잠이 들려는 순간, 짐브리오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야, 자냐?”
“왜, 졸리다구.”
침대에서 뒤척이며 리타가 대꾸하자 가까이 다가온 짐브리오는 그녀를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왜 그래? 졸려 죽겠다니까. 주방에 저녁 해 놓은 것 많잖아. 배고프면 가서 또 먹어.”
“정신 좀 차려라. 아래층에 그 인간이 왔다.”
“그 인간이라니?”
졸린 눈을 억지로 뜨며 리타는 짐브리오를 쳐다봤다.
“율리비어스. 오늘부터 우리 집에서 함께 생활한데.”
“뭐?”
눈을 번쩍 뜬 그녀는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거실 의자에 후드를 뒤집어쓴 창백한 노인이 앉아 있었고, 그 주위로 도현과 어베인, 로나, 딘, 리드만 사제, 에드가 서 있었다.
도현을 제외한 사람들은 율리비어스의 등장이 반갑지 않은지 경계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뭐, 뭐야, 당신. 당신이 왜 우리 집에 와서 산다는 거야?”
“음, 그 소녀 흑마법사로군.”
율리비어스는 의자에서 일어나 보라색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리타의 앞에 섰다.
“이름이 무엇이지?”
“리타.”
“그래, 리타. 나도 여기에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다. 돈조르니가 있으라고 해서 온 것이지.”
“도현, 이 사람 말 사실이야?”
“어, 며칠 동안만 같이 있기로 했어. 그는 앞으로 대공을 위해 싸우기로 했거든. 같은 편인 셈이지.”
도현은 대공과의 거래로 율리비어스가 한편이 됐다는 짤막한 설명을 해 줬다.
“내가 보기엔 첩자 같은데?”
리타는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율리비어스를 노려봤다.
“그건 네가 판단할 게 아니다, 대공이 판단할 일이지.”
율리비어스는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을 무시하며 집 안을 둘러봤다.
“대충 인사는 나눈 것 같고, 내가 지낼 방은 어디지?”
“2층에 빈방이 있습니다. 안내해 드리죠.”
도현은 그를 2층의 빈방으로 안내했다. 방을 살펴본 율리비어스는 낡은 침대에 겉옷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동료들이 무척 개성 있고 인상적이군.”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럼 쉬시죠.”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에게 율리비어스가 말했다.
“어제부터 날 지켜보느라 수고했다.”
“별말씀을.”
도현은 문을 닫고 뒤돌아섰다.
아래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그의 동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다들 걱정하는 눈빛이군. 하긴 얼음탑주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거물이니까, 그것도 악명이 자자한.’
도현은 계단을 내려가며 동료들에게 말했다.
“율리비어스는 조용한 게 좋답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짐브리오와 리타는 온갖 소음을 만들어 집 안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잠시 후. 주방 식탁에 둘러앉은 그들은 율리비어스와 대공의 거래에 대해 도현으로부터 좀 더 자세히 듣게 되었다.
“테르논의 석판이라면 율리비어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하지. 수백 년 전, 아무도 풀지 못한 비밀의 석판이니까.”
어베인도 그 석판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도둑들의 세계에는 대륙의 귀중한 물품에 대한 정보들이 오래전부터 누적되어 왔으니까.
테르논의 석판도 그중 하나였다.
“나쁘지 않군.”
영주 딘은 율리비어스의 합류를 긍정적으로 봤다. 누가 뭐래도 그는 마법진에 있어서는 최고로 알려진 마법의 천재였다. 전쟁에 도움이 될 굵직한 강자였다.
“브링틱에서는 씨드 때문에 적으로 만난 사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지. 그가 씨드 일을 잊었다면 우리도 그의 합류를 기뻐해야 하네. 그가 샤르비티 쪽에 가담했다고 상상해 보게. 그의 마법진은 우리를 힘들게 만들었을 거야.”
딘의 지적에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수긍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설계한 마법 구조물은 거인의 섬을 붕괴시켜 가라앉게 했고, 호수의 물을 해일처럼 일어나게 만들어 망각의 숲 일부를 폐허로 만들어 버릴 정도였다.
그의 마법진은 자연의 힘도 거스를 정도로 무서운 것이다.
“붉은 성에 빈집은 많아요. 그럼에도 돈조르니 경이 그를 이곳으로 보낸 건, 아직 신뢰하지 못해서인 것 같아요. 당분간 우리가 그를 지켜보라는 의미겠죠.”
로나는 말을 하며 도현을 응시했다.
“그렇죠?”
“맞아요.”
도현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인정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어제오늘 그와 같이 있으면서 받은 느낌은, 뭐랄까 자신만의 신념에 꽉 차 있는 사람이라고 할까? 다른 속셈은 없어 보였거든요.”
“진짜 무서운 자가 누군지 알아?”
옆에 앉아 있던 짐브리오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여기, 자신의 가슴까지 속이는 자야. 결정적일 때까지는 마음속에 다른 뜻을 품지 않지. 그러다 기회가 오면 숨겨 왔던 목적을 드러내는 거라고. 그러면 다 속아 넘어가는 거야.”
“나도 저자에 대한 경계를 풀어서는 안 된다고 봐.”
리타는 짐브리오의 말을 거들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예전에 도시를 파괴했다면서. 그런 사람이라면 붉은 성도 파괴할 수 있잖아. 어쩌면 샤르비티가 보낸 첩자일지도 모른다니까, 붉은 성을 파괴하려고 온.”
“글쎄, 내가 보기엔 단순히 석판 때문에 온 것 같은데. 아닌가?”
도현은 술잔에 술을 따르며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
“참, 밀튼의 진영에서 칼라치는 만나지 않은 거야?”
“아니, 만났어.”
“어떻게 됐어?”
“전쟁이 끝나고 만나기로 했어.”
칼라치와의 만남을 설명하던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단을 통해 율리비어스가 걸어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던 말을 멈추고 모두 그를 응시했다.
“신경 쓸 것 없다, 붉은 성을 둘러보고 올 생각이니까.”
그의 말에 리타가 작게 속삭였다.
“저것 보라고, 수상하잖아. 이 밤중에 갑자기 붉은 성을 둘러본다고 하다니.”
도현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집 밖으로 나선 율리비어스의 옆을 나란히 걸었다.
“따라오려고?”
“같이 가시죠. 하루라도 먼저 온 제가 이쪽 지리는 더 잘 알 테니까요.”
“그럴 필요 없다, 여기 지도가 있으니까.”
율리비어스는 돈조르니의 방에서 얻은 붉은 성 내부가 그려진 지도를 꺼내 보였다.
“밤이지 않습니까? 낯선 곳이고. 지도보다는 제가 나을 겁니다.”
“속이 뻔히 보인다.”
“그렇습니까?”
도현은 빙그레 웃으며 어두운 붉은 성 거리를 돌아봤다.
“이 시간에 왜 갑자기 붉은 성을 파악하려고 하는 겁니까?”
“내 일을 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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