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 디 임팩트 19권 22화
“일이라면 어떤 일을?”
“난 전쟁에서 이겨야 석판을 볼 수 있다. 그것을 위해 난 내 일을 하려는 거야. 일단, 대공에게 한 약속대로 붉은 성에 방어를 강화할 수 있는 마법진을 설치할 것이다.”
“그것을 지금 한다는 겁니까?”
“왜, 지금 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
율리비어스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그러자 그곳에서 환하게 빛나는 작은 나비가 나타나 율리비어스의 주위를 맴돌다 그가 펼친 지도 위에 앉았다.
달빛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던 지도의 모습이 나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의해 잘 보였다.
“넓은 붉은 성에 방어 마법진을 설치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지. 난 그 시간을 아끼려는 것뿐이야.”
“붉은 성엔 다른 마법사들도 꽤 있습니다. 시간을 절약하려면 그들과 함께 작업하는 게 훨씬 낫지 않습니까?”
“그놈들이 감히 내 수준 높은 마법진을 이해나 할 수 있다고 보느냐?”
율리비어스는 지도의 한 지점을 펜으로 표시하고는 그곳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 * *
고대의 마법 망토를 이용해 경비가 삼엄한 대공의 공관을 빠져나온 벨라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이동하다 전방에 순찰병들이 나타나자 재빨리 어두운 골목 벽에 붙었다.
“누가 있었던 것 같은데?”
눈빛이 날카로운 병사가 골목을 쏘아보며 걸음을 멈췄다.
“수색해 봐.”
순찰조장의 지시에 20여 명의 병사들이 횃불로 어두운 골목을 비추며 샅샅이 조사했다.
그러나 골목은 텅 비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조장. 제가 잘못 봤나 봅니다.”
“이동.”
순찰병들이 골목 앞에서 멀어지자 벽이 흐물흐물해지더니 벨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 망토가 아니었으면 이번 임무는 불가능했을 거야.’
샤르비티는 그녀를 불러 그가 애지중지하던 고대의 마법 망토를 지원해 주며 붉은 성을 파괴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번 임무만 끝나면 이 귀한 망토는 영원히 내 것이야.’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를 지은 그녀는 주변을 살피며 고대 유적터로 빠르게 이동했다.
가는 도중 한차례 더 순찰병들과 마주쳤지만 빠른 대처를 통해 들키지 않고 그들을 무사히 지나칠 수 있었다.
돌기둥과 나무들이 어수선하게 뒤엉킨 고대 유적터에 도착한 그녀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주위를 돌아본 뒤 우물 안으로 쏙 들어갔다.
깊이가 상당한 우물은 고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는 물이 말라 먼지만 날리고 있었다.
우물 벽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온 그녀는 몸을 낮춰 우물과 연결된 좁은 통로를 따라 옆으로 기어 들어갔다.
우물의 물은 지하수가 아닌 이 좁은 통로를 통해 꾸준해 채워지다가 고대인들이 멸망하며 관리가 안 되자 말라 버린 것 같았다.
잠시 후, 좁은 통로가 끝나고 고대인들이 만든 지하 공간이 나타났다.
그녀는 손을 더듬어 벽에 기대어 놓은 횃불에 불을 붙였다.
화르르르.
횃불에 불이 붙자 어둠이 물러가며 주위가 환해졌다.
이 공간의 일부는 지하 수로가 흐르는 곳이었는데, 그곳도 물이 말라서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바닥엔 150년 전 베일 가문의 사람들이 이곳을 조사한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그들이 사용했던 도구와 버려진 여러 목재 등.
아마, 고대에 말라 버린 이 지하 수로에 다시 물이 흐를 가능성이 있는지 확인해 본 것 같았다.
그녀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지하 공간을 걷다가 어느 벽에서 멈춰 섰다.
“이봐! 이봐!”
그녀가 몇 번 외치자 벽이 사라지며 검은 옷을 입은 늙은 노인이 등장했다.
그는 횃불을 들고 서 있는 벨라의 뒤를 살피며 음침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행은 없었나?”
“걱정 말고 당신 일이나 신경 써.”
이곳에 올 때마다 습관적으로 물어보는 노인의 질문에 짜증이 왈칵 밀려온 그녀는 톡 쏘는 억양으로 대꾸했다.
“조심하자는 것이다.”
“충분히 조심하고 있어.”
벨라는 푸베지토를 지나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벽으로 위장된 공간엔 파괴신의 사제인 푸베지토가 만든 작은 제단이 거의 완성 직전에 이르러 있었다.
“얼마나 더 있어야 돼?”
파괴신의 언어가 빼곡하게 새겨진 제단을 보며 그녀가 물었다.
입구를 다시 벽으로 위장한 푸베지토는 느릿느릿 걸어오며 답했다.
“예정대로 이틀 후엔 제단을 사용할 수 있다.”
“잘됐어.”
벨라의 입가에 미소가 진해졌다.
“오늘은 신선한 과일도 가지고 왔어. 주방에서 빼 왔지.”
허리에 찬 작은 가방에서 몇 가지 음식과 과일을 꺼낸 그녀는 한쪽에 내려놨다.
푸베지토는 지난 두 달 가까이 고대 유적터 지하에 있는 이 공간에서만 생활했다.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오로지 제단을 만드는 일에만 몰두한 것이다.
그녀의 역할은 그를 감독하고 외부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일이다.
와사싹.
치아가 몇 개 빠진 푸베지토는 바닥에 앉아 그녀가 가지고 온 사과를 묵묵히 씹어 먹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벨라는 그녀를 이곳에 보낼 때 샤르비티가 한 지시 사항을 떠올렸다.
-푸베지토는 일이 끝나면 그곳에서 죽여라.
‘이 늙은이를 보는 것도 이제 며칠 안 남았군.’
그녀는 속으로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푸베지토는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파괴신의 사제다.
이번 일을 충실히 이행하면 그가 믿는 신이 베일 가문의 종교가 될 수도 있다는 샤르비티의 말을 믿고 정성을 다해 제단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멍청한 늙은이.’
속으로 차가운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 푸베지토가 물었다.
“제단도 거의 다 완성됐는데 이제 그만 파괴신의 파편을 내게 보여 주는 건 어떤가?”
“안 돼. 파괴신의 파편은 제단이 완성되면 그때 가져올 거야.”
바위산 위의 거대한 붉은 성을 흔적도 없이 파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했다.
고대 파괴신의 제단과 그곳에 꽂을 파괴신의 파편.
파괴신의 파편은 샤르비티가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지금은 이번 임무의 책임자인 벨라의 수중에 있었다.
“파괴신의 파편은 신의 종인 나도 구경을 못 해 본 것이다. 어쩌면 네가 가지고 있는 게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파괴신의 파편일지도 모르고.”
사과를 먹고 일어선 그는 제단 옆에 서 있는 벨라를 향해 한 발 한 발 걸어갔다.
“파편은 제단에 꽂혀 사라질 물건. 하루라도 좋으니 내가 그것을 보며 기도를 했으면 좋겠어.”
“웃기지 마, 파편을 가지고 도망가려고?”
의심을 품은 그녀의 눈초리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제단까지 만들었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나?
“그럼 의심받을 행동을 하지 마. 난 받은 지시대로 움직이는 거니까.”
그녀는 코앞까지 다가온 음산한 인상의 푸베지토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이틀 뒤에 제단이 완성된다고 했지? 그때 다시 오겠어, 파편을 가지고. 하지만 그때도 당신에겐 그것을 주지 않을 거야, 내 손으로 직접 제단에 꽂을 거니까.”
“우린 한편이다.”
“안 된다고 했잖아.”
매몰차게 말한 그녀는 마법 망토를 펄럭이며 벽으로 위장된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밖으로 막 나가기 전 푸베지토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틀 뒤에 보자고. 그땐 이 지겨운 곳도 끝이야. 같이 떠나는 거야.”
* * *
캐서린의 시녀 도리스는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시녀장의 방문 앞까지 왔다.
손을 들어 방문을 두드리려던 도리스는 멈칫했다. 시녀장을 만나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녀도 큰 화를 당할 수 있었다.
‘그래도 말해야 돼, 너무 고통스러워.’
벨라의 차가운 눈빛과 심장을 옭죄는 그녀의 협박 때문에 피가 말라 죽을 것만 같았다.
하루하루가 너무 무섭다. 어쩌면 이러다 그녀도 벨라와 한 방을 사용했던 메디처럼 죽게 될지도 모른다.
‘말해야 돼.’
마음을 정한 그녀는 시녀장의 방문을 조용히 두드렸다.
잠시 후, 엄한 인상의 중년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을 자다 막 일어난 듯 그녀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다.
“무슨 일이냐, 도리스?”
“시, 시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들어와.”
시녀장의 방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벨라에 대해 두서없이 떠들기 시작했다.
“벨라가 메디를 죽이고 자살로 위장한 게 틀림없어요. 밤에도 몰래 돌아다니고요, 제게는 협박도 하고 그랬어요. 입 다물고 있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요.”
“천천히 얘기해. 흥분하지 말고.”
차분한 시녀장의 눈빛과 목소리에 진정이 된 도리스는 침을 삼키며 알고 있는 것들을 정리해 다시 말했고, 시녀장의 표정은 점점 싸늘해졌다.
“네 말이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시녀장님. 제가 감히 거짓말을 하러 왔겠습니까? 심지어 전 저의 잘못도 고백했잖아요.”
같은 방을 사용하는 동료 시녀와 사랑을 나눈 것에 대해 그녀는 시녀장에게 사실대로 고백을 한 상태다.
“벨라는 수상한 여자예요, 조사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죄가 있다면 엄하게 벌을 내려 주세요, 시녀장님.”
“믿기 어려운 얘기야.”
“벨라가 아까 창문을 통해 방을 나가는 걸 제가 봤어요. 지금 가 보시면 그녀 방은 비어 있을 거예요. 그럼 제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게 증명이 되겠죠.”
그녀의 방과 벨라의 방은 서로 마주 보는 위치였다. 그래서 그녀는 벨라가 창문을 통해 건물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할 수가 있었다.
“음.”
시녀장은 눈물을 글썽이는 도리스를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겉옷을 챙겨 입었다.
“벨라의 방으로 가 보자.”
“제 말을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녀장님.”
손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친 그녀는 시녀장과 함께 벨라의 방으로 갔다.
어두운 복도를 걸은 그녀들은 잠시 후, 벨라의 방에 도착했다.
열쇠 꾸러미에서 벨라의 방 열쇠를 찾아낸 시녀장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는 텅 비어 있었고, 반쯤 열린 창문을 통해 찬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보셨죠, 시녀장님. 벨라가 없잖아요.”
“네 말이 맞구나.”
“병사들을 불러 이곳에서 벨라를 잡아야 합니다. 3층이나 되는 높은 창문을 통해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면 평범한 시녀가 아닐 수도 있어요.”
“똑똑하구나.”
시녀장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열려 있던 벨라의 방문을 닫고, 안에서 걸어 잠갔다.
“착한 아이가 못 볼 것을 봤어.”
시녀장의 손엔 작은 단검이 들려 있었다.
“시, 시녀장님, 왜, 왜 이러세요.”
“조용히 입 다물고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왜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냐.”
시녀장이 단검을 휘두르자 겁에 질린 도리스는 반사적으로 피하며 뒷걸음질 쳤다.
“살려 주세요, 시녀장님. 제가 잘못했어요.”
“너의 입을 믿을 수가 없다.”
시녀장은 단검을 들고 점점 가까이 왔고, 궁지에 몰린 도리스는 열려 있는 3층 창문을 통해 뛰어내리려고 했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곤란하지, 내가 의심받잖아.”
언제 나타났는지 창턱에 앉아 있던 벨라가 차가운 미소를 흘리며 도리스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아 내동댕이쳤다.
벽에 처박힌 그녀를 강제로 일으켜 세운 벨라는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입술이 터진 도리스는 공포에 질려 애처롭게 몸을 떨고 있었다.
“내가 경고했지, 쓸데없는 말 하고 다니지 말라고.”
“베, 벨라, 용서해 줘. 내가 잘못했어.”
“쉬이, 조용.”
도리스의 입술에 흐르는 피를 손가락을 이용해 닦아 준 벨라는 서서히 고개를 숙여 도리스의 입에 키스를 했다.
부드러운 그녀의 키스에 도리스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우두두둑.
목뼈가 부러진 도리스의 몸이 힘없이 벨라의 품에 안겼다.
“또 한 명의 자살자가 나타났군.”
벨라는 시체가 된 도리스의 몸을 어깨에 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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