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 디 임팩트 19권 23화
제단
리타는 수프를 접시에 담다가 화가 난 얼굴로 투덜거렸다.
“누굴 종으로 아나. 배고프면 내려와서 먹든가. 누구에게 가져오라 마라야.”
아침을 준비한 리타는 수프를 담은 접시를 식탁에 소리 나게 내려놨다.
“제가 보기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짐브리오 아저씨하고 리타 아줌마가 하도 눈치를 주니까 안 내려오는 것 같던데요?”
뜰에서 아침 수련을 하고 돌아온 에드는 눈치 없게 율리비어스를 두둔하고 나섰다.
“너, 내가 아줌마란 소리 하지 말랬지! 누나라고 누나!”
“네…… 죄송합니다.”
머리를 긁적인 에드는 수프와 빵 한 조각을 들고 2층에 있는 율리비어스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고 조심스럽게 들어간 에드는 인기척을 내며 말했다.
“아침 식사 가지고 왔습니다.”
“…….”
“아침 식사 가지고 왔다구요.”
“놓고 나가거라.”
책상 앞에 앉아 붉은 성에 설치할 마법 구조물을 설계하던 율리비어스가 조용히 말했다.
에드는 깔끔하게 정리된 침상 옆 탁자 위에 수프와 빵을 올려놨다.
“맛있는 수프니까 식기 전에 드십시오.”
에드의 예의 있는 말에 펜으로 마법 구조물을 그리던 율리비어스가 손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에드라고 했지?”
“네.”
“도현의 제자고.”
“그렇습니다. 자랑스러운 스승님의 제자입니다.”
목에 힘을 준 에드가 당당하게 답했다.
“지난 이틀간 밤늦게까지 뜰에서 수련을 하더군.”
“예, 열심히 해야 스승님의 검술을 하나라도 더 배울 수 있으니까요.”
에드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시끄럽다.”
“네? 뭐가 시끄럽단 말씀입니까?”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앞으로 밤늦게까지 뜰에서 검을 휘두르지 마라. 그만 나가 봐.”
율리비어스는 표정 없는 얼굴로 말을 하고는 다시 펜을 움직여 마법 구조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뭐야, 이 사람. 하도 욕먹는 것 같아서 기껏 잘해 줬더니, 씨이.’
다크캐슬에서 자란 에드도 필요할 땐 화끈해지는 성격이었다. 한마디 하려다가 입을 굳게 다물고 뒤돌아섰다.
‘참자, 내 힘으로 이기면 모를까. 어차피 싸워도 지금은 내가 저 사람의 상대도 안 될 테고.’
돈조르니를 만나기 위해 대공의 공관으로 가려던 도현은 에드가 입이 부어서 내려오자 웃으며 물었다.
“또 무슨 일이냐?”
“시끄럽다고 밤에 뜰에서 수련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스승님?”
도현은 위층을 바라봤다.
이틀간 그는 율리비어스와 함께 붉은 성 내부를 함께 돌아다녔다.
수상한 점은 없었고, 지금은 붉은 성 방어를 위한 마법 구조물을 설계하는 것 같았다.
“이삼일이면 그의 집이 마련될 거다. 불편하더라도 네가 그때까지 참도록 해. 전쟁에 많은 도움을 줄 사람이니까.”
“예, 스승님.”
도현은 집을 나와 대공의 공관을 향해 걸었다. 도중에 에이저의 집이 나왔지만 그곳은 굳게 닫혀 있었다.
‘커딩햄 요새의 전투 상황이 길어지나 보네.’
에이저의 집을 지나쳐 한동안 걷던 그는 광장을 돌아 성의 중심부에 위치한 대공의 공관에 발을 디뎠다.
‘샤르비티의 부친 기념일에 암살 작전을 펼치는 걸 돈조르니 경과 상의해 봐야겠어.’
기념일에 그의 생각처럼 샤르비티와 열세 명의 사촌들이 한자리에 모일지는 확실치 않다.
그와 관련해 돈조르니의 의견도 들어 봐야 한다. 암살 작전의 실행 여부까지도.
무기를 꺼내 친위대에게 맡기던 도현은 그보다 한발 먼저 온 사람이 투구를 옆에 끼고 뚜벅뚜벅 복도를 걸어가는 뒷모습을 응시했다.
‘노드빌 경이라고 했지?’
압할라의 목이 담긴 청동 상자를 들고 대공 부인을 만나러 가는 날, 복도에서 마주친 사람이었다.
당시 돈조르니는 대공 부인을 만나러 온 그의 방문이 그리 반갑지 않았는지 근심 섞인 얼굴로 복도에서 한참을 서 있기도 했었다.
‘오늘도 대공 부인이 불러서 온 걸까?’
도현은 샤르비티에게 인질로 잡혀 있는 대공의 자녀들 문제로 대공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려운 문제야…….’
할 수만 있다면 대공의 자녀들을 자신이 나서서 구해 주고 싶었지만, 자신이 함부로 나설 상황이 아니었다.
전쟁은 어디까지나 대공의 의지와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것. 도현은 설사 대공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전쟁 승리를 위해 묵묵히 따라갈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 * *
캐서린은 그녀의 방 안에 서른 명이 넘는 시녀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그녀는 이틀 전 발생한 시녀 자살 사건을 뒤늦게 듣고서 분노하고 있었다.
“내가 본성에 있을 때는 이런 일이 단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다! 어떻게 한 달 사이에 두 명이나 자살을 한단 말이냐!”
인질로 잡힌 자식들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한 그녀였지만 단 한 번도 시녀들을 매질하거나 함부로 대한 적은 없었다.
그런 그녀였기 때문에 시녀들의 연이은 자살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너희들 중에 이번 일과 관련된 자들이 있을 것이다!”
서슬 퍼런 눈빛으로 캐서린은 고개를 숙인 시녀들 사이를 오갔다.
“고개를 들어라!”
살얼음 같은 분위기 속에서 시녀장을 비롯한 서른 명의 시녀들이 얼굴을 들어 앞을 응시했다.
“무엇이 그녀들을 자살로 내몰았는지 내가 반드시 알아낼 것이다. 너희들을 고문해서라도 말이야.”
캐서린의 말에 시녀들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실제로 3층 복도밖엔 병사 수십 명이 대기 중이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면 그녀들은 모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때 시녀장이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닥쳐라!”
캐서린은 무릎 꿇은 시녀장의 뺨을 호되게 때렸다. 입술이 터질 만큼 사정없는 손 속이었다.
“대체 시녀장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시녀들을 방치하고 있었다니!”
싸늘히 외친 그녀는 창백하게 변한 시녀들의 얼굴을 한 명씩 뚫어지게 응시했다.
“기회를 주겠다. 지금이라도 그녀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자들은 앞으로 나서서 고하라.”
시녀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누구라도 얼른 나서서 분노한 캐서린을 진정시켜 줬으면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도리스의 자살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것이냐? 흥!”
캐서린은 차가운 눈빛으로 문 앞에 대기 중인 병사들의 지휘관에게 손짓을 했다.
“모두 끌고 가세요!”
“예!”
지휘관은 복도에 대기 중인 부하들을 움직였다.
우락부락한 병사들은 대공 부인에게 살려 달라며 울고 매달리는 시녀들을 거칠게 끌어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오늘만 버티면 되는데.’
벨라는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시녀장을 힐끔 쳐다봤다. 그녀도 난처해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벨라는 병사들이 그녀를 끌어내려 하기 직전에 가냘픈 목소리로 외쳤다.
“제가 압니다! 제가 알아요!”
“멈춰라!”
시녀들을 끌어내던 병사들의 움직임이 캐서린의 말 한마디에 모두 멈췄다.
“네가 안다고?”
무릎 꿇은 벨라를 내려다보며 캐서린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제가 압니다. 메디와 도리스가 왜 자살을 했는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말해 보거라.”
“그녀들의 죽음은 모두 저 여자 때문입니다.”
벨라의 손가락이 도리스와 한 방을 사용한 시녀에게로 향했다.
“저 여자는 밤마다 도리스를 학대하고 괴롭혔습니다. 자신이 마치 남자인 척하면서요. 저와 한 방을 사용하다 자살을 한 메디 역시 그녀에게 피해를 당해서 수치스러움에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아, 아니야. 난 아니야.”
지목을 받은 키 큰 시녀는 두려움에 떨다가 캐서린이 다가오자 엎드리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말도 안 됩니다! 저는 도리스와 메디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저 때문에 자살했다는 건 벨라의 억지 주장입니다!”
“죽은 아이들과 추잡한 짓을 한 적이 있느냐?”
캐서린의 질문에 그녀는 머뭇거렸다.
“그, 그건…….”
“있느냐, 없느냐!”
서릿발 같은 캐서린의 기세에 키 큰 시녀는 감히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런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서로가 좋아해서입니다. 그녀들은 그 일로 결코 자살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못된 것을 봤나! 벨라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억울합니다. 그녀들이 죽은 이유를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닥쳐라! 이 사악한 것을 당장 감옥에 가둬라! 대공께 청해 정식으로 재판을 열겠다!”
“저는 아닙니다! 정말 억울합니다!”
병사들에 의해 끌려 나간 그녀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복도에서 계속 들려왔지만 캐서린은 무심한 표정으로 방 안에 남아 있는 서른 명의 시녀들을 둘러봤다.
“한 번만 더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다면, 그땐 너희들 모두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알겠느냐!”
“예! 대공 부인!”
죽다 살아난 그녀들의 온몸은 땀으로 홍건했다.
“시녀장은 더욱더 조심하시오.”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대답하던 시녀장은 옆에 서 있는 벨라를 곁눈질했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벨라, 너는 이 일을 알고 있으면서도 미리 시녀장에게 보고하지 않은 죄가 크다.”
벨라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시녀장은 돌아가 그녀에게 적절한 벌을 내리시오.”
“그리하겠습니다.”
더 큰 벌을 예상했던 벨라는 속으로 캐서린을 비웃었다.
‘네년도 오늘 밤이 지나면 끝이다. 붉은 성과 함께 먼지처럼 사라지는 거야.’
포섭된 시녀장도 마찬가지 신세가 될 것이다. 붉은 성에서 살아남을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모두 물러가라!”
시녀들이 나간 후, 엄한 얼굴로 서 있었던 캐서린은 지친 기색으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밖에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아닙니다.”
노드빌은 복도에서 캐서린이 시녀들을 혼내는 동안 기다리고 있다 일이 마무리되자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아이들 때문에 힘든데, 시녀들까지 말썽을 부리네요.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그녀가 맞은편 의자를 권하자 지난번처럼 몇 번 사양하던 노드빌은 결국 그때처럼 그녀와 마주 앉았다.
“지난번 만남 이후 연락이 없어 궁금해서 오시라 했습니다.”
자식들을 구할 방도를 고민해 보겠다는 노드빌의 말에 희망을 품고 지내 온 그녀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는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알아보니 두 군데에 분산돼 갇혀 계시더군요. 한쪽이 탈출하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어느 쪽이든 탈출은 어렵겠지만요.”
“동시에 구할 수 없다는 말씀인가요?”
“현재 제 밑에 있는 수하들의 능력으론 동시에 구할 수 있는 여력이 못 됩니다. 대규모 인원이 갈 수도 없고, 소수 정예가 침투해 구출해 내야 하는데…… 샤르비티의 부하들이 만만치 않습니다.”
갈등하던 캐서린은 주먹을 말아 쥐며 어렵게 말을 내뱉었다.
“그럼 한쪽이라도 구해 주세요.”
“캐서린 님, 시도일 뿐, 결코 성공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시도라서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실패 뒤에 캐서린 님이 껴안을 짐이 너무 큽니다. 다시 한 번 숙고해 보십시오.”
노드빌 자신의 안위도 위험에 빠질 수 있었지만 굳이 강조 하지 않았다.
“대공은 샤르비티가 총공격을 해 오길 기다리고 있어요. 조만간 그날이 오겠죠. 그 전에 시도라도 해 봐야 하는 게 아니겠어요?”
“실패하면 인질로 잡혀 있는 아드님과 따님은 모두 죽는다고 보시면 틀림없습니다. 샤르비티는 실패한 인질 작전을 세상에 떠들어 대며 대공을 자극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럴 것입니다.”
“어차피 총공격이 시작되면 샤르비티는 내 자식들을 붉은 성 앞으로 끌고 와 목을 벨 거예요. 그 꼴은 죽어도 못 보겠습니다.”
캐서린은 강한 어조로 구출 작전을 원했다.
“마지막으로 여쭙겠습니다. 후회하시지 않겠습니까?”
“후회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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