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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474화 (474/575)

[474] 디 임팩트 19권 24화

말없이 캐서린의 얼굴을 바라보던 노드빌 경은 투구를 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작전을 시행하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잠깐만요.”

그녀는 밖으로 나가는 노드빌의 팔을 붙잡았다.

“왜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말을 하는 거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담담히 미소를 지은 그는 젊은 시절 아름다웠던 그녀의 옛 모습을 회상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가 보겠습니다.”

* * *

“샤르비티의 부친 기념일에 그들 모두를 제거하자는 말이지?”

돈조르니 경은 흰 수염을 훑어 내리며 조금 전 도현이 한 말을 다시 반복했다.

“그렇습니다. 무모해 보일 수도 있지만,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성공하면 전쟁의 승기는 단번에 우리에게로 기울어질 것입니다. 실패해도 기념일을 망쳐 놔 그들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효과를 줄 수도 있고요. 단, 그때는 샤르비티만은 반드시 없애야 합니다. 어쨌든 그가 가장 위험한 적이 아니겠습니까?”

샤르비티가 부친의 기념일을 통해 휘하에 있는 10만 병사들의 사기를 높인 후, 사자 동맹군과 연합해 붉은 성을 총공격할 것이라는 게 대공과 돈조르니의 예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분위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최소한 샤르비티는 없애야 한다는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최선은 샤르비티와 열세 명의 수장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겠지만요.”

돈조르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거대한 지도를 옆으로 옮겼다.

그러자 지도 뒤에 가려진 벽의 모습이 도현의 눈에 들어왔다.

‘저건…….’

열네 명의 초상화가 3열로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자가 바로 샤르비티네. 그리고 나머지 열세 명의 반역자들이고. 나와 같은 피가 흐르는 혈육들이지. 나는 이놈들을 잊지 않기 위해 초상화를 붙여 놓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보며 전의를 다져 왔네.”

쿠웅.

샤르비티의 초상화에 주먹질을 한 돈조르니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천천히 뒤돌아섰다.

의자에서 일어난 도현은 벽에 걸린 열네명의 초상화를 눈에 담아 두고 있었다.

“사실, 자네가 이 얘기를 꺼내기 전에 이미 나와 대공은 샤르비티와 열세 명의 사촌들을 암살하는 일에 대해 고민을 해 오고 있었네. 샤르비티를 죽이면 전쟁이 끝나는 거냐고 자네가 일전에 물어 오기 전부터 말이야.”

“그러셨군요.”

“그러나 성공 없이 아까운 희생만 따를 것 같아서 쉽게 결정을 못 짓고 있었네. 전력을 기울여 암살을 시도할 수도 없었고. 어찌 됐건 우린 40만에 달하는 사자 동맹군과 마주하고 있는 입장이니까.”

돈조르니는 벽에 걸린 초상화들을 다시 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 말대로 기념일에 이 반역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일 가능성이 매우 높네. 아마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함께 있겠지.”

샤르비티의 부친 기념일은 6일 동안 지속된다.

“자네는 대공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람이 됐네. 나와 에이저, 전선에 나가 있는 내 친구 로제로와 커크, 그 외에 대공의 충신 중 실력 있는 강자들이 제법 되지만, 어떤 사람도 자네만큼 강한 이는 없어.”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도현을 바라보며 돈조르니는 한 걸음 다가왔다.

“자넨 우리에게 소중한 인재네. 그런 만큼 자네가 자청해서 적의 심장부에 들어가 기념일에 거사를 치르겠다고는 하지만 쉽게 동의할 수가 없네. 대공도 선뜻 허락하시지 않을 거야.”

성공하면 얻는 게 크지만 너무 위험하고 불확실한 암살 작전이었다. 그런 곳에서 도현처럼 강한 사람을 만약 잃게 된다면 대공에겐 큰 타격이었다.

“많은 병사들이 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습니다. 전쟁이 길어지면 베일 가문의 피해는 갈수록 커지겠죠. 이겨도 이긴 게 아닌.”

“음…….”

“대공과 돈조르니 경이 저를 아껴 주시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제 역할은 전쟁을 이기도록 돕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빠른 시일 내에요.”

도현은 생동감 있게 그려진 샤르비티의 초상화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쉽게도 제겐 많은 시간이 없습니다. 전쟁을 빨리 종식시킬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저는 움직여야 합니다.”

진지한 도현의 태도에 돈조르니는 의자로 돌아와 술잔을 기울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길어야 반년입니다, 제가 대공을 도울 수 있는 시간이.”

도현의 대답에 돈조르니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반년이라고?”

“네. 제라이즈가 절 보내긴 했지만 그 시간이 제가 도울 수 있는 한계입니다. 저는 그 전에 이 전쟁을 끝내고 싶습니다. 대공을 위해서도, 그리고 저를 위해서도요.”

“왜 반년인가?”

도현은 의자에 앉으며 미안한 얼굴로 답했다.

“죄송하지만 그건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잠시 말없이 술을 마시던 돈조르니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도현을 응시했다.

“자네를 아껴도 결국 반년 뒤엔 붉은 성에 없을 거라는 얘기로군.”

“그러니 저를 너무 아끼시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하지 말게, 난 자네를 이용할 생각을 수십 가지나 마음에 품고 다니는 나쁜 사람이니까.”

낮게 소리 내어 웃은 돈조르니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의 의사가 그렇게 확고하다면…… 좋네, 대공과 이 문제를 깊이 상의해 보겠네. 전쟁의 승기를 우리에게 가지고 올수 있는 좋은 기회인 건 사실이니까.”

“감사합니다.”

“내가 감사해야지, 위험을 무릅쓰고 적지에 가겠다는데. 그나저나 자네가 반년 뒤에 떠난다는 사실을 아시면 대공이 굉장히 실망하시겠군. 대공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자넬 곁에 두고 싶어 하셨는데 말이야.”

도현처럼 강한 검사를 곁에 두고 있으면 누구든 든든할 것이다.

* * *

“스승님, 미완성 마법진을 완성시키려면 율리비어스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저녁을 먹던 에드가 물었다. 그의 말에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같이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도현을 응시했다.

율리비어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리타나 짐브리오도 그가 가진 능력은 인정하고 있었다.

“필요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도 모르는 게 있는 법이니까 너무 그에게 의지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이계를 넘나드는 비밀스러운 힘을, 그가 마법진을 연구하면서 깨닫게 되기를 나는 원치 않는다.”

“생각하실 게 많군요.”

에드는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구운 감자를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비어스의 도움을 받아 스승이 이곳에 계속 있었으면 했지만, 그건 그의 작은 바람일 뿐 스승은 다른 측면도 고려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베인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도현의 생각을 존중했기 때문에 미완성 마법진 얘기를 더는 하지 않았다.

밤 깊은 시각, 에드는 침대에서 뒤척이다 벌떡 일어났다.

“아, 도저히 못 참겠다. 몸이 근질근질해.”

그는 검을 챙겨 뜰로 나갔다.

‘나도 스승님과 함께 샤르비티와 그 사촌들을 죽이러 갈 수도 있어. 실력을 더욱 높여야만 해, 스승님을 돕기 위해선.’

뜰에서 막 검을 휘두르려던 그의 눈동자가 2층의 창가로 향했다.

율리비어스가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아침에 한 말, 잊은 거냐?”

“…….”

검을 도로 검집에 넣은 에드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안 잊었습니다.”

물끄러미 에드를 내려다보던 율리비어스는 말없이 창문을 닫고 들어갔다.

“내가 참아야지, 스승님도 참으라고 하셨으니까.”

혼잣말을 하던 에드는 뜰에 앉아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로나에게 다가갔다.

하도 조용히 앉아 있어서 처음엔 그곳에 그녀가 있는지도 몰랐다.

“뭐 하세요?”

“별들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있어.”

“예? 별이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귀를 기울이면 들을 수 있지.”

로나는 빙그레 웃으며 검을 들고 서 있는 에드를 쳐다봤다.

“정말요?”

에드는 그녀 옆에 앉아 같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바보야, 별이 어떻게 말을 하니?”

“에이, 저도 알죠. 그냥 속아 드린 거예요.”

에드는 순박하게 웃었다. 그는 로나가 친누나처럼 편하고 좋았다.

“스승님도 별을 자주 보세요. 제가 왜 그러시냐고 물어봤더니, 이유가 있으시대요.”

“무슨 이유?”

“지구에 있는 홍영이라는 분이 생각나실 때마다 보시곤 한대요. 정말 사랑하시는 사이인가 봐요.”

“……그래? 몰랐네, 그런 이유로 별을 자주 보는 걸.”

로나는 어딘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로나 옆에서 같이 별을 구경하던 에드는 검을 들고 일어섰다.

“저는 그만 가 볼게요.”

“가다니, 어딜?”

“저녁 먹고 검을 수련하지 못해서 그런지 잠이 안 와요. 조금 전에 보셨겠지만, 율리비어스는 시끄럽다고 난리구요. 그래서 다른 곳에서라도 검 수련을 하려고요.”

“어디에서?”

“고대 유적터요. 지난번에 스승님과 같이 갔더니 사람도 없고 조용하더라고요. 거기 가서 검이나 마음껏 휘두르고 와야겠어요.”

에드는 이대로 들어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녀와.”

“네!”

에드는 신법을 발휘해 고대 유적터를 향해 달려갔다.

순식간에 도착한 그는 온몸에 땀이 넘칠 정도로 마음껏 검을 휘둘렀다.

쉬쉬쉬쉭.

바닥의 마른 나뭇잎들과 흙들이 그의 검풍에 휘말려 허공으로 높게 치솟았고, 근처의 나무줄기들은 검이 내뿜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좌우로 흔들렸다.

내공을 주입해 검을 사용하던 에드는 서서히 검의 속도를 늦추며 호심공을 발휘해 호검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느리게 반복했다.

맑은 기운들이 그의 전신을 통해 흡수되며 단전에 들어가 단단한 내공이 되어 갔다.

한동안 호심공 수련을 통해 축기를 한 에드는 호흡을 낮게 유지하며 검을 서서히 멈췄다.

스르릉.

검집에 검을 넣은 그는 부서진 고대 돌기둥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아 땀이 식을 동안 명상에 잠겼다.

그가 검을 휘두르자 소란스러웠던 고대 유적터는 금세 고요해지며 정적에 휩싸였다.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고 명상을 유지하던 에드는 귓전에 들리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조용히 눈을 떴다.

‘발소리 같은데?’

그는 누군가 싶어서 고대 돌기둥 위로 고개를 내밀어 봤다. 어둠 속에서 주위를 둘러보던 자가 우물로 보이는 곳으로 쓱 들어가는 게 보였다.

‘뭐지?’

호기심이 생긴 에드는 우물을 향해 다가갔다.

* * *

‘이 짓도 오늘로 마지막이야.’

횃불을 든 벨라는 흥분한 눈빛으로 지하 공간을 걸었다.

‘샤르비티 님은 내게 영지를 준다고 했어. 최초로 여자 영주가 되는 거야, 호호호.’

부푼 꿈을 가득 안은 그녀는 발에 걸리는 150년 전의 목재를 시원하게 걷어찼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그녀의 실제 나이는 마흔 살에 가까웠다.

‘넓은 영지를 달라고 해야겠어, 이번 전쟁에 내가 가장 큰 공을 세우게 되는 거니까.’

얼마 후면 붉은 성은 전설로 남으며 바위산 위에서 처참하게 파괴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벽으로 위장된 곳에 도착한 그녀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봐! 나야!”

위장된 벽이 스르륵 사라지며 푸베지토가 나타났다.

“미행은 없었나?”

음침한 목소리로, 그는 변함없이 똑같은 질문을 했다.

“끝까지 그 소리군! 미친 거야! 몇 번을 말해!”

노인의 어깨를 밀치며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정사각형 모양으로 만들어진 허리 높이의 제단 앞에 섰다.

화로의 불빛에 비친 제단은 3층으로 이뤄져 있었고, 빈 공간 없이 파괴신의 언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완성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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