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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476화 (476/575)

[476] 디 임팩트 20권 1화

검은 비늘

호화로운 침대에서 잠을 자던 바크 드라모스는 조용히 두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는 검은색과 붉은색이 혼재되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이 기운은?’

그가 싫어하는 익숙한 기운이 세상으로 강림하려 하고 있었다.

콰앙!

천장을 뚫고 지붕 위로 올라온 그는 구름이 쉬어 가는 숲 너머 어둠 저편을 응시했다.

그를 자극하는 불쾌한 기운이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어느 녀석이 그를 불러내려는 거지?’

타오르는 눈빛으로 뭔가를 생각하던 그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지붕이 부서지는 소리에 놀라 잠을 자던 그의 시종들이 뛰쳐나와 있었다.

“다녀올 데가 있다. 지붕 고쳐 놔.”

흑발을 길게 기른 중년인의 모습을 한 바크 드라모스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 * *

‘동굴이 얼마 안 있어 붕괴할 거야.’

천장과 벽에 균열이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어깨 위로 쏟아지는 돌 조각을 맞으며 도현은 동굴 안쪽에 있는 제단을 응시했다.

놀랍게도 제단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들썩이는 제단을 노려보던 도현은 검집에 넣었던 장검을 다시 뽑으며 강하게 말했다.

“널 죽이려 했으면 벌써 죽였을 거야.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마. 제단을 멈춰.”

“이거 어쩌나? 나도 그 방법을 모르는데.”

“파괴신의 파편은 뭘 말하는 거지?”

“글쎄, 재주껏 찾아보시지, 호호호!”

도현을 비웃던 벨라의 몸이 도현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강력한 허공섭물의 힘으로 그녀를 끌어당긴 것이다.

“커헉!”

도현의 강철 같은 손에 목이 잡힌 벨라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차가운 눈빛을 흘리며 도현은 벨라의 두 눈을 노려봤다.

“잘 들어. 대공이 이 일을 알게 되면 넌 처참한 고문을 받고 죽게 될 거야. 그냥 죽는 게 아니라.”

“고, 고문 따윈…… 상관없어. 어차피, 여기서 모두가 죽을 테니까, 크크크.”

입에서 피를 흘리며 웃는 벨라의 모습은 소름이 돋도록 독해 보였다.

“너라도 살려면 지금이라도 도망가시지. 이 붉은 성은 포기하시고 말이야.”

목이 조여 오는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벨라는 끝까지 도현을 비웃었다.

“실컷 웃어 둬, 나중에 통곡을 하게 될 테니까.”

벨라의 협조는 기대할 수가 없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그의 힘으로 지금 당장 이 제단을 멈추지 않으면 붉은 성에 큰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빠깍.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벨라의 몸이 동굴 입구 쪽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양쪽 발목을 부러트려 버린 것이다.

“반드시 널 대공과 대면시켜 주겠다.”

검을 든 도현은 파괴신의 파편을 직접 찾아내기 위해 제단으로 다가갔다.

제단을 보호하는 황금색 막을 향해 도현이 검을 날렸다.

까앙!

불꽃이 튀며 도현의 몸이 검과 함께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바위도 잘라 버릴 그의 검에도 황금색 막은 끄떡없었고, 도리어 강한 반탄력으로 도현의 몸까지 밀쳐 낸 것이다.

내공을 더욱 주입한 도현은 푸른색으로 이글거리는 검을 일도양단 자세로 내리쳤다.

콰앙!

굉음과 함께 도현과 황금색 막 사이의 지반 암석이 모래처럼 부서지며 주저앉았다.

수 미터 깊이로 주저앉은 땅속에도 제단을 보호하는 황금색 막이 보였다. 제단을 완벽히 휘감은 모양이다.

‘끄덕도 안하는군. 내 호신강기가 발전하면 이와 같을까?’

몇 차례 더 강한 힘으로 황금색 막을 두드려 보던 도현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이제는 제대로 서 있기 힘들 정도로 동굴 바닥이 진동했다. 천장과 벽이 갈라지며 떨어지는 돌의 양도 늘어만 갔다.

제단은 어느새 동굴 바닥과 떨어져 공중으로 약간 떠오른 상태다.

“내가 말했지! 붉은 성은 끝난 거야!”

동굴 밖에서 벨라가 비아냥거리듯 외쳤다.

“끝은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

검 손잡이를 가슴 어름까지 올린 도현은 찌르기 자세를 취했다. 순식간에 검과 하나가 된 그는 그 상태로 제단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조급한 마음은 버리자. 평정심이 중요하다. 한 점이야. 저 한 점.’

동굴이 흔들리고 천장에서 돌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졌지만 도현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황금색 막의 한 지점만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도현의 검이 느리게 황금색 막과 충돌했다.

그 순간, 황금색 막이 쩌엉 소리를 내며 거미줄 같은 균열을 일으켰다.

팔을 뒤로 뺀 도현은 다시 한 번 같은 지점에 검 끝을 밀어 넣었다.

파지지직.

황금색 막 전체에서 푸른 불꽃이 일어나 사방으로 튀었다. 푸른 불꽃을 뒤집어쓴 도현의 머리카락 일부가 타올랐다.

그러나 도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정신을 집중해 재차 검을 느리게 찔러 넣었다.

같은 지점에 도현의 세 번째 검이 충돌하자, 황금색 막이 유리 깨지는 소리를 내며 박살이 나 버렸다.

‘해냈다!’

평범해 보이는 찌르기였지만, 그 속에는 도현이 그동안 깨달은 검의와 극도로 끌어올린 내공의 힘이 담겨 있었다.

만약 이번에도 황금색 막이 반탄력을 발휘해 도현을 밀어 냈다면, 도현은 큰 내상을 입을 위험한 상황이었다.

잠깐 사이에 온몸이 축축해질 정도로 땀을 배출한 도현은 서둘러 제단에 접근하다 얼굴이 굳어졌다.

‘제단이 변화를 일으킨다.’

공중으로 떠오른 제단이 양파 껍질처럼 한 겹 한 겹 벗겨지며 부서지더니 안에서 성스러운 기운을 뿜어내는 빛의 구체가 나타났다.

‘보는 것만 해도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다. 더 이상 쳐다봐선 안 돼.’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람 몸통만 한 빛의 구체가 발산하는 성스러운 기운은 수면제처럼 도현을 몽롱하게 만들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은 도현은 몸을 띄워 동굴 공중에 떠 있는 빛의 구체를 향해 검을 횡으로 그었다.

죽어 가던 노인이 말한 파괴신의 파편을 찾기엔 늦은 것 같았고, 기이한 마력을 발휘하는 빛의 구체를 파괴하는 길만이 현재로선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그의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눈을 감은 상태였지만 그의 검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빛의 구체 중심부를 뚫고 들어가 반대편으로 나왔다.

척.

땅에 착지한 도현은 눈을 감은 상태에서 뒤를 돌아봤다.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빛의 구체가 멀쩡하게 떠 있는 게 느껴졌다.

‘마치 공기를 벤 것 같다.’

도현은 손에 든 검을 비검술로 날렸다.

쉬이이이익.

바람 소리를 내며 경쾌하게 날아간 검은, 빛의 구체를 관통하고 선회해 도현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허상을 친 기분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동안 많은 싸움을 경험했고 얼음탑주나 율리비어스 같은 강한 마법사와도 전투를 해 봤지만, 그의 검에 영향을 받지 않는 상대나 마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낯선 경험에 도현은 한층 긴장감이 더해 갔다.

“네놈이 아무리 강해도, 절대 못 막을 거야! 붉은 성과 이 안의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는 거라고!”

웅크린 상태에서 저주를 퍼붓던 벨라는 고개를 들어 빛의 구체가 발산하는 빛을 바라보았다.

극심한 두통과 함께 그녀의 의식이 현실과 점점 멀어져 갔다.

“다…… 죽어.”

정신을 잃는 가운데서도 그녀는 끝까지 악의에 찬 저주를 내뱉었다.

도현은 손에 든 검을 검집에 꽂았다. 양손에 내공을 가득 모은 도현은 태풍과 같은 기세로 장풍을 여러 차례 날려 보냈다.

콰콰쾅!

빛의 구체를 통과한 장풍이 애꿎은 동굴 벽만 부숴 버리고 있었다.

도현은 포기하지 않고 전략을 바꿔 강한 흡입력으로 빛의 구체를 끌어당겨 봤다.

그러나 동굴 천장에서 떨어지는 돌 조각들만 그의 앞에 수북이 쌓일 뿐 빛의 구체는 전혀 영항을 받지 않았다.

‘방법이 없는 건가?’

눈을 감고 있던 도현의 표정이 무거워질 때, 동굴 천장 부근에 떠 있던 빛의 구체가 폭발적으로 회전하며 동굴을 뚫고 지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쿵쿵. 쿵쿵.

도현은 빛의 구체가 만든 길을 따라 지상으로 몸을 솟구쳤다.

빛의 구체를 따라 고대 유적터로 나온 도현은 우물가 근처에 서 있는 일단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에드가 불러온 동료들로, 공중에 떠 있는 빛의 구체를 응시하고 있었다.

“직접 봐선 안 됩니다! 눈을 감으세요!”

도현의 경고가 채 끝나기 전에 어베인과 짐브리오, 로나, 영주 딘, 리드만 사제, 에드, 리타가 비틀거리며 그 자리에서 일제히 주저앉았다.

그들의 눈에는 놀람과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제, 젠장. 이거 뭐야, 왜 이렇게 몸이 무기력해지는 거야?”

짐브리오는 달려오는 도현을 향해 손을 뻗은 자세로 허우적대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끝없는 수렁으로 내 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 도현.”

리타는 이미 정신을 잃은 로나와 어베인 사이에 몸을 뉘였다.

“스승님.”

끝까지 정신력으로 버티던 에드도 영주 딘의 배 위에 쓰러졌다.

‘빌어먹을.’

에드와 동료들의 상태를 빠르게 살핀 도현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깊은 잠에 빠져든 사람들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게 됐다.

‘붉은 성에서 저걸 보는 사람들은 정신을 잃고 있을 거야.’

그의 예상대로였다.

갑자기 허공에 나타난 빛의 구체를 바라보던 붉은 성의 순찰병들이나 멀리 성벽 위의 병사들은 허수아비처럼 그 자리에서 픽픽 쓰러지고 있었다.

항거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이었다.

‘이건 전조일 가능성이 높아. 죽어 가던 동굴 속의 노인이나 그 시녀의 말대로라면 곧 이곳은…… 상상하기 싫은 일이 벌어질 거야.’

두 눈을 감은 상태지만 수십 미터 허공에 떠 있는 빛의 구체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성스러운 빛의 기운이 이렇게 차갑고 어두운 면을 갖고 있을 줄이야.

‘더 늦기 전에 선택을 해야 한다. 정신을 잃은 동료들을 데리고 붉은 성을 빠져나가든지, 아니면 끝까지 해 보든지.’

도현의 얼굴이 붉은 성의 중심부에 위치한 대공의 공관 방향으로 향했다.

그의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가능성이 보인다면 목숨을 걸고라도 붉은 성을 보호해 보겠지만, 답이 보이지 않았다.

‘일단 동료들과 대공만이라도 구해서 나가야 한다. 그래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어.’

냉정히 상황 판단을 내린 도현은 굳은 얼굴로 마법 주머니 안에서 긴 밧줄을 꺼내 들었다.

빠른 손동작으로 쓰러진 동료들을 짚단처럼 한데 묶은 그는 그들을 어깨에 짊어졌다.

일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무게는 만만치 않았지만 내공을 발휘한 도현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는 길에 집에 들러 락제프의 영혼이 담긴 자수정도 챙겨야만 했다. 하필 리타의 호주머니엔 그가 없었던 것이다.

‘락제프나 율리비어스는 해결책을 가지고 있을까?’

신법을 발휘해 빛의 구체를 등지고 고대 유적터를 빠르게 벗어나던 도현의 몸이 굳어졌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붉은 성 전체가 대낮처럼 갑자기 환해졌기 때문이다.

걸음을 늦춘 그의 시선이 천천히 하늘로 향했다.

태양과는 다른 밝고 신비스러운 빛이 달빛을 압도하며 붉은 성을 직사광선처럼 비추고 있었다.

그 광경은 마치 먹구름 뚫고 나온 한 줄기 빛이 망망대해에 떠 있는 난파선을 비추며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러나 그 빛은 희망의 빛이 아닌 죽음과 파괴의 빛이었다.

빛에 쏘인 붉은 성의 견고한 첨탑과 성벽 들은 금이 가며 무너지기 시작했고, 성 내부에 있던 수많은 건물들은 지진이라도 난 듯 들썩거리며 흔들렸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솟구치는 화염은 붉은 성이 전쟁의 한복판에 있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붉은 성이…… 무너지고 있다. 하늘의 빛에 의해.’

그 자신의 힘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이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한 마음이 도현의 전신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멀리 첨탑이 두 동강 나며 성벽을 부수고 바위산 아래로 떨어지는 비참한 모습도 보였다.

‘뭘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는 거냐. 나와 한 약속을 잊은 것이냐?’

도현의 머릿속으로 바크 드라모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흠칫한 도현은 정신을 차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목소리의 주인공인 바크 드라모스는 보이지 않았다.

‘돌아가 빛의 구체를 없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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