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7] 디 임팩트 20권 2화
“노력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검이 통하지 않습니다.”
도현은 보이지 않는 그를 향해 빠르게 답했다.
‘발밑을 보아라.’
도현은 고개를 숙여 아래를 봤다. 광택이 나는 검은 물체가 보였다.
‘그것을 이용해라. 그것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손바닥만 한 검은 물체는 두께가 가늘었지만 매우 단단해 보였다.
생김새는 꼭 물고기의 비늘 같았다.
머릿속으로 뭔가가 스쳐 지나갔지만 도현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어깨에 짊어진 동료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도현은 고대 유적터로 달라가며 바크 드라모스가 준 검은 물체에 내공을 가득 주입했다.
산을 관통할 만한 날카로움이 검은 물체에서 줄기줄기 발산됐다.
콰앙!
굉음을 만들며 발돋움을 한 도현의 몸이 수십 미터 높이에 떠 있는 빛의 구체 근처까지 다다랐다.
‘반드시 없앤다!’
눈을 감은 도현은 바크 드라모스가 준 검은 물체를 검처럼 휘둘렀다.
손을 통해 느껴지는 감촉에 도현의 얼굴이 환해졌다.
‘베었다!’
찰나의 순간에 빛의 구체를 수십 조각 낸 도현은 공중제비를 돌며 부서진 고대 돌기둥 위에 착지했다.
콰아아아앙!
귀청을 울리는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수십 미터 높이에 떠 있던 빛의 구체가 폭발을 일으켰고, 그와 동시에 붉은 성을 공격하던 하늘의 빛은 흔적도 없이 소멸되어 버렸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 정상적인 어둠이 내려앉았다.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붉은 성 곳곳이 피해를 당했지만 그나마 이 정도에서 멈춘 건 바크 드라모스의 도움이 컸다.
“어디에 계시는 겁니까?”
“난 여기 있다.”
허공에 둥둥 떠 있던 바크 드라모스는 스르륵 내려와 고대 돌기둥 위에 서 있는 도현의 옆에 섰다.
“감사합니다. 이게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도현은 손에 들고 있던 검은 물체를 바크 드라모스에게 돌려주려 했다.
“필요 없다. 난 한번 준 건 다시 받지 않아. 언제 필요할지 모르니까, 그건 네가 가지고 있어.”
“이건 혹시 바크 드라모스 님의…….”
“그렇다. 내 몸의 비늘이다.”
바람에 머리카락을 휘날리던 바크 드라모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도현을 응시했다.
“신의 파편을 파괴하는 덴 용의 비늘이 최고지.”
“인간들의 전쟁엔 개입하지 않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신의 힘이 등장했다. 고대에 종적을 감췄었는데, 수천 년 만에 다시 등장했어. 나는 명분이 생겼고, 그래서 이곳에 있는 것이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뭘 어떻게 해? 남은 전쟁은 계속 네 몫이지. 간다.”
먼지바람과 함께 바크 드라모스는 종적을 감췄다.
‘나의 비늘을 다른 녀석들에게 주면 널 죽여 버릴 것이다.’
섬뜩한 경고가 도현의 머릿속에 울렸다.
* * *
전쟁 같았던 간밤의 시간이 지나고 날이 밝았다. 아침의 태양과 쌀쌀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붉은 성의 전 병력은 파괴된 성벽에 달라붙어 복구 작업에 매달렸다.
창고에 준비된 석재와 목재 들이 동원됐고, 한쪽에선 매몰된 부상자들을 구해 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도현이 빛의 구체를 파괴하긴 했지만, 하늘의 빛은 짧은 사이에 붉은 성에 상당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혔다.
“잠시만 견디시오.”
무릎 아래가 절단된 부상자의 상처 부위에 손을 올린 리드만 사제는 치료의 권능을 사용해 출혈을 멈추고 무릎 부위를 치료해 줬다.
한순간에 다리 불구가 된 병사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리드만 사제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사제님, 제 동생이 죽었습니다. 샤르비티와 싸우지도 못하고……. 반드시 복수를 할 겁니다!”
한쪽 다리가 없는 그는 더 이상 전쟁터에서 활약하기 힘든 형편이었다. 하지만 리드만 사제는 그의 분노 어린 외침을 들어 주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에게 일곱 신의 가호가 있기를.”
뒤돌아선 그는 첨탑과 성벽이 한꺼번에 무너진 장소에서 사람들을 구해 내고 있는 도현과 영주 딘, 에드를 응시했다.
그 옆 조금 떨어진 곳에선 역시 어베인과 로나, 짐브리오, 리타가 힘을 합쳐 붉은 성의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파괴신의 신도는 어찌하여 신의 파편을 이런 일에 사용했단 말인가?’
일곱 신의 사제인 리드만은 고대인들이 섬기던 신들에 대해서도 약간의 지식이 있었다.
빛의 구체가 소멸되며 누구보다 먼저 깨어난 그는 도현에게 전말을 듣고서 한탄을 했었다.
‘그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게 정말 다행이야.’
날이 밝도록 사람들을 구해 내고 있는 도현을 보며 리드만 사제는 일곱 신의 이름으로 그를 축복했다.
* * *
“그에게 큰 신세를 졌군.”
부서진 성벽을 둘러보던 대공은 멀리 도현의 뒷모습을 보며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샤르비티가 붉은 성을 공격했고, 거의 성공할 뻔했다.
도현이 막지 않았다면 붉은 성은 완전히 파괴되었을 것이다.
“샤르비티가 그동안 직접 나서지 않았던 건…… 바로 오늘을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숙부.”
“면목 없습니다, 대공.”
돈조르니는 이 일을 사전에 막지 못한 게 자신의 책임인 듯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리 말하지 마십시오. 숙부의 책임이 아니지 않습니까?”
대공은 몸을 돌려 돈조르니를 잠시 바라보다가 한쪽에 서 있는 율리비어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 선조가 이 성을 짓기 위해 흘린 땀과 피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축성 기간만 20년이 넘게 걸렸지. 그런 만큼, 성벽을 완벽히 복구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해. 하지만 우리에겐 그리 시간이 많지 않지.”
“제게 성안의 마법사들을 부릴 수 있는 지휘권과 2천 명의 병력만 지원해 주십시오. 성벽과 방어 시설에 마법 구조물을 세워 걱정을 덜어 드리겠습니다.”
율리비어스의 대답에 대공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를 믿겠다. 숙부께선 이 사람을 지원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대공.”
돈조르니는 율리비어스와 함께 대공의 곁을 떠났다. 한동안 붉은 성의 피해를 둘러보던 대공은 도현이 돕고 있는 장소로 걸어갔다.
수많은 병사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일제히 허리를 숙였고, 도현과 그 일행도 예를 갖춰 대공을 맞이했다.
“가까이 오게.”
대공의 말에 도현은 땀과 먼지가 묻은 얼굴로 대공에게 다가갔다.
방패를 든 친위대가 대공과 도현을 둥그렇게 포위해 주변인들의 시야에서 차단시켰다.
“병사들에게 맡겨도 될 일을 앞장서서 하는군.”
“같은 편이니까요.”
“같은 편이라…… 좋은 말이로군.”
대공은 도현이 그렇게 믿음직스러울 수가 없었다. 곁에 둘 수만 있다면 어떤 조건이라도 받아들이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숙부를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그는 반년 뒤에 떠날 인물이었다.
아쉽고 아까운 특별한 인재였다. 씨드를 얻은 검사를 또 어디서 구해 휘하에 둘 수 있을까.
욕심이 났다.
한동안 말없이 도현을 응시하던 대공은 도현만 들을 수 있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네. 자네가 날 구하고, 붉은 성을 구했어.”
“과찬이십니다.”
바크 드라모스가 붉은 성에 다녀간 건 동료들만 알고 있었다. 대공이나 돈조르니에게 그의 존재를 알릴 수 없었다.
“겸손할 필요 없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고대 역사서에나 등장했던 파괴신의 힘에 의해 붉은 성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뻔했으니까.”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저의 제자가 그 시녀를 우연히 목격했으니까요.”
“음, 숙부에게 보고를 받긴 했네. 이곳에 자네 제자가 있나?”
“예.”
“공간을 터라.”
“예! 대공!”
친위대들이 방패를 거두며 좌우로 공간을 넓히자 바깥 광경이 보였다.
“자네 제자를 부르게.”
도현은 동료들 틈에 서 있는 에드를 향해 손짓을 했다. 하지만 에드는 설마 자신을 부른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얼른 가 봐. 널 부르잖아.”
짐브리오는 에드의 등을 슬쩍 떠밀었고, 에드는 살짝 당황한 얼굴로 위압적인 기세를 풍기는 친위대의 벽을 지나 내부로 들어갔다.
에드가 들어가자 다시 친위대들이 공간을 좁히며 방패로 벽을 만들어 외부의 시선을 차단했다.
“대공을 뵈옵니다.”
에드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제법 의젓하게 예를 표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쿵쾅거리며 뛰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왕과 같은 권세를 누리는 대영지의 주인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라.”
땅을 보고 있던 시선을 조심스럽게 든 에드는 대공의 위엄에 약간 기가 죽었다가 스승을 보자 서서히 마음이 진정됐다.
‘스승님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서 계시잖아. 난 그분의 제자야. 당당해지자.’
대공처럼 높은 지위의 사람을 실물로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고, 더구나 이렇게 코앞에서 시선을 교환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이제 막 성인이 되어 가는 에드로서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게 정상이었지만 도현의 존재감에 영향을 받으며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아갔다.
에드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한 곳에 고정되자,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공은 입가에 짧은 미소를 보였다.
“좋은 제자로군.”
“감사합니다, 대공.”
도현이 가볍게 말을 받았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에드라고 합니다.”
“어젯밤 네가 고대 유적터에서 적의 첩자를 발견했다지?”
“그렇습니다.”
“훌륭하다.”
에드는 대공의 치하에 얼굴이 조금 상기되었다.
“앞으로 네 이름을 기억하겠다. 그만 물러가라.”
“예, 대공.”
대공과 짧은 만남을 이룬 에드는 스승을 흘낏 쳐다보다가 친위대가 열어 준 방패 벽을 지나 바깥으로 나갔다.
“숙부에게 들었네. 샤르비티와 열세 명의 반역자들을 기념일에 맞춰 암살하자고 했다지?”
“그렇습니다.”
“좋은 의견이야. 나 역시 공감하는 바도 있고. 하지만 중요한 점은, 성공할 수 있냐는 것이겠지.”
“최선을 다하면 길이 보이지 않겠습니까?”
도현의 깊은 눈매를 응시하던 대공은 허리에 찬 검에 손을 올리며 나직이 말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붉은 성 주변엔 적군 40만이 우리와 전투를 벌이며 대치하고 있네. 그곳에 있는 강자들을 불러들여 자네를 돕게 할 수는 없어. 만일을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돈조르니 경에게 들었습니다.”
“그래도 이 일을 추진할 생각인가? 강자들의 지원 없이는 아무리 자네라 해도 그 많은 적들 속에 있는 샤르비티와 열세 명의 반역자들을 죽이긴 어려워.”
“저도 압니다. 하지만 실패해도 기념일을 망쳐 저들의 사기를 꺾을 수가 있고, 성공한다면 전쟁의 승기는 단번에 우리에게 돌아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나도 아네만, 그 와중에 자네 목숨이 위태로울 수가 있네.”
도현은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친위대를 잠시 둘러보다가 대답했다.
“전장은 늘 목숨을 담보로 싸우는 곳이 아니겠습니까? 어딘들 위험하지 않은 곳이 있겠습니까.”
“마음속에 이미 결심이 섰군. 반년밖에 날 도울 수 없다고 그러던데. 그것 때문에 이렇게 위험한 시도를 하는 건가?”
“그렇기도 하지만, 이 좋은 기회를 놓치기 아까워서 그러는 겁니다. 몇 년이고 길어질지도 모르는 전쟁. 단번에 끝을 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도현은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말을 계속이었다.
“한 사람만 지원해 주십시오. 그럼 다른 자들은 몰라도 샤르비티만은 확실히 죽이고 오겠습니다.”
도현의 대답에 대공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게 누군가?”
“밀튼 영주 진영에 있는 칼라치라는 사람입니다.”
“칼라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