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 디 임팩트 20권 3화
답답하게 느껴지는 짙은 흰 안개가 숲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안개의 영향으로 인해 시야는 한정되어 있었고, 기습을 받기에 딱 좋았다.
나무 뒤에 몸을 감춘 세 명의 사자 동맹군 병사들은 석궁을 들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연이어 터지고 있었다.
“아군의 비명 소리 같지?”
“적일 수도 있어.”
“아니야, 우리 편이야. 귀에 익은 목소리였어, 젠장.”
세 명의 병사들 중 제일 키가 큰 사내는 장갑 낀 손으로 눈에 흘러 들어가는 땀을 재빨리 닦아 냈다. 그러곤 다시 석궁의 방아쇠에 손을 걸쳤다.
“후우, 후우.”
긴장감에 거친 숨이 절로 나왔고, 그건 다른 두 명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린 다 죽을 거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놈을 먼저 보고 우리가 죽이면 돼.”
“들리는 소문으론 악마를 다루는 자가 있다던데? 그자가 온 게 틀림없어.”
“악마가 어디 있어, 이 미친 자식아! 자꾸 헛소리할 거면 옆으로 꺼져.”
근처 나무 뒤에도 그들처럼 3인 1조의 석궁 부대가 가득했다.
그들의 임무는 안개가 자주 끼는 이 숲을 지키는 것이다.
“알리언의 언덕 전투에서 살아남은 밀림의 야만인들이 내게 그렇게 말했다니까. 악마가 불러낸 병사들이 자신들을 공격했다고 말이야.”
“마법을 보고 놀란 거겠지.”
“아니래도!”
“쉿! 앞에서 소리가 들렸어!”
키 큰 사내의 말에 말다툼을 벌이던 병사들은 서둘러 나무 뒤에서 석궁을 겨눴다.
근처에서 들리던 비명 소리가 뚝 끊긴 후 갑자기 찾아온 무거운 정적에 석궁을 든 병사들의 얼굴은 긴장으로 폭발할 것만 같았다.
“뭐가 좀 보여?”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그들의 긴장이 조금 풀어질 때 안개를 뚫고 별안간 날아온 거대한 방패가 나무와 함께 그들의 몸통을 동시에 잘라 버렸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즉사한 병사들의 시신이 피를 뿌렸고, 잘린 나무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대각선으로 넘어갔다.
“피해!”
또 다른 나무 뒤에 은신하고 있던 석궁 부대원들은 그들을 덮치는 나무를 피하기 위해 자리를 이탈했다.
그 순간 바람처럼 나타난 칼라치가 표정 없는 얼굴로 거대한 방패를 휘둘렀다.
살과 뼈가 짓이겨지는 소리가 나며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변한 사자 동맹군 병사들이 안개 속으로 먼지처럼 날아갔다.
“저쪽이다! 쏴!”
우뚝 서 있는 칼라치를 향해 주변에서 수많은 화살들이 날아왔다.
방패로 화살을 쳐 내던 칼라치는 낮은 목소리로 주변의 적들에게 말했다.
“살고 싶은 자들은 지금 떠나라.”
그의 경고에도 숲을 지키는 사자 동맹군 수비병들은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아니, 갈수록 칼라치를 노리는 적들은 증가했다.
석궁수가 아닌 갑주를 걸친 검사들과 마법사들까지 등장해 밀물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칼라치! 뭐 하는가! 어서 고대 병사들을 불러내게!”
헬구스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칼라치는 방패를 든 상태로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무거운 분위기에 눌린 헬구스는 코앞까지 다가온 적의 검을 막아 내며 그의 눈치만 살폈다.
알리언의 언덕 전투처럼 밀튼 영주는 강변 근처에 있는 이 숲에 칼라치를 보냈다. 이번에도 그들 둘뿐이었다.
“이봐 칼라치!”
“알았으니까, 조용하게.”
땅에서 시선을 거둔 칼라치는 겁도 없이 그를 노리고 달려드는 사자 동맹군 검사의 목을 방패로 찍어 버린 후, 고대 병사들을 불러냈다.
안개 속에 유령처럼 등장한 수십의 고대 병사들은 붉은 눈빛을 흘리며 사자 동맹군들을 폭풍처럼 밀어붙였다.
“목이 잘려도 움직이고 있어!”
겁에 질린 사자 동맹군 병사의 가슴에 고대 병사의 창이 꽂혔다.
가슴이 관통된 사자 동맹군 병사는 입을 벌린 채 급속도로 얼어 가다 유리처럼 부서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숲을 지키는 사자 동맹군 병사들이 앞다투어 도망쳤고, 그 뒤를 쫓으며 고대 병사들은 마음껏 그들을 죽여 나갔다.
칼라치는 숲의 서쪽으로 이동해 강변에 설치된 선착장에 베일 연합군의 깃발을 꽂았다.
강변에서 올라온 물안개와 숲의 안개는 점점 옅어졌고, 강바람은 깃발과 그 옆에 선 칼라치의 머리칼을 휘날렸다.
“자네, 왜 그랬나? 조금 더 지체했으면 위험했다고.”
헬구스는 어깨에 흐르는 피를 지혈하며 말했다. 말없이 흘러가는 깊은 강물을 응시하던 칼라치는 옷을 모두 벗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저 사람이 점점. 아니, 왜 저러는 거야?”
안 하던 행동을 하는 칼라치의 모습에 헬구스는 미간을 찌푸리다가 자신도 갑옷을 벗어 버린 후 나신으로 강에 뛰어들었다. 뚱뚱한 그가 뛰어들자 강물이 넓게 퍼졌다.
근처의 적들은 모두 도망갔으니 지금은 강에서 여유를 부려도 될 상황이긴 했다.
“시원하니 좋군. 상처가 쓰라리긴 하지만 말이야.”
생각보다 깊은 수심에 놀란 헬구스는 두 다리를 물속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며 칼라치의 표정을 살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이 조금 무거워 보였다.
‘율리비어스가 다녀간 후에 부쩍 저런 표정을 자주 보인단 말야. 그 인간하고 무슨 일이 있었나?’
눈치 빠른 헬구스는 입안으로 들어오는 강물을 푸우 하고 뱉어 내며 소리치듯 말했다.
“샤르비티는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니야, 붉은 성 자체를 노리다니. 성공했으면 난감할 뻔했어.”
이틀 전 붉은 성 일부가 파괴된 일은 워낙 큰 사건이라 그들의 귀에까지 소문이 퍼진 상태였다.
그렇다고 자세한 내막까진 알 수 없었다. 붉은 성 내부에서 정보를 철저히 통제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일이 샤르비티의 공작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은 베일 연합군 전체에 퍼져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샤르비티의 속이 부글부글 끓을 거야. 붉은 성이 피해를 봤다는 건, 거의 성공 직전까지 갔다는 게 아닌가? 누가 막은 걸까? 혹시 백도현이?”
“…….”
“자네, 내 말 듣고 있는 건가?”
“듣고 있네.”
무덤덤하게 말을 한 칼라치는 물속으로 잠수를 해 강바닥까지 도달했다.
물이 맑아 햇빛을 고스란히 흡수한 강바닥은 선명하고 환했다.
‘그자는 어디서 싸우고 있는 걸까?’
철가면을 쓴 검사가 전장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소식은 어디서도 들려오고 있지 않았다.
그를 생각할 때면 도현과는 다른 의미에서 그의 혈관 속 피가 빨리 돈다.
‘네가 정말 스므차를 죽인 자인가?’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서서히 숨이 막혀 온 칼라치는 손으로 강바닥을 가볍게 밀어 내며 물개처럼 수면 위로 솟구쳤다.
벗은 몸 그대로 강변의 풀밭에 누운 그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디언과 다퉜나?”
헬구스는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털어 내며 슬쩍 물었다.
“그런 일 없네.”
“그럼 무슨 일인가? 자네가 싸우는 도중에 오늘처럼 딴생각을 하는 건 본 적이 없다고.”
“햇볕이 따뜻하군.”
물에 젖은 몸을 말리며 칼라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고민이 있으면 내게 털어놔. 친구 좋다는 게 뭔가?”
“이대로 좀 조용히 있었으면 좋겠군. 부탁하네.”
머쓱해진 헬구스는 그를 내버려 뒀다.
칼라치는 차가운 강바람을 뚫고 들어오는 따뜻한 햇볕이 마음에 들었다. 날이 갈수록 조금씩 느려지고 있는 심장이 힘을 얻어 다시 야생마처럼 맹렬히 날뛸 것만 같았다.
그는 심장이 있는 가슴 부위에 손을 올려놨다.
어젯밤에도 이디언과 사랑을 나누며 이 가슴에 그녀의 얼굴을 올려놨다.
그녀의 온기와 입김은 그가 살아 있다는 걸 되새겨 주었다.
그러나 얼마나 갈지 모르겠다.
율리비어스는 고대 병사들이 그의 심장을 죽은 자의 심장으로 바꿔 놓을 거라고 했다.
그 미래에 대한 예언을 들은 후, 그의 강철 같은 마음은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른 존재로 변할 수도 있다고?’
무엇으로 변하든 죽은 모습으로 떠돌아다닐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 전에 내 스스로 심장을 도려내고 말겠다.’
이디언에게 추한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진 않았다.
마지막 심장 고동 소리가 사라지기 전에, 완벽한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눈을 뜬 칼라치는 풀밭에 던져 놨던 옷과 갑옷을 찾아 하나둘씩 몸 위로 걸쳤다.
“밀튼 영주가 자넬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드네. 거리감을 두고 멀리하는 것 같아.”
헬구스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알고 있네.”
“전쟁에서 승리해도 자넬 대하는 짓을 보면 땅을 주기는커녕 거들떠도 안 볼 것 같아.”
“그럼 그자는 내게 죽게 되겠지. 걱정 말게.”
칼라치는 헬구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돌아가면 윌벤슨에게 확실히 말해 놓는 게 좋을 걸세. 그와 밀튼이 꽤 가까운 사이인 걸 보면, 나중에 자네 편을 안 들 수도 있으니까.”
“그땐 그도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겠지.”
선착장에 휘날리는 베일 연합군의 깃발을 잠시 응시하던 칼라치는 천천히 몸을 돌려 강변을 따라 걷다 눈앞에 서 있는 도현을 발견했다.
“고대 병사들의 활약이 인상적이더군.”
“지켜보고 있었나?”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 좀 할까?”
* * *
“이렇게 셋이 어울려 술을 마시는 건 처음인 것 같아. 술맛이 아주 좋아.”
헬구스는 불룩 나온 배를 두드리며 웃었다.
강변에 자리를 잡은 도현과 칼라치, 헬구스는 술병을 돌려 가며 술을 몇 모금씩 했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술을 같이 나눠 마실 정도로 관계가 진전된 도현과 칼라치였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렇게 지내자고. 왜 목숨을 걸고 서로 싸워야 하나? 누가 강한지 겨뤄서 뭐해? 안 그런가, 도현?”
헬구스의 말에 도현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지만, 칼라치는 심기가 불편한 듯 하나밖에 없는 눈으로 헬구스를 날카롭게 쏘아봤다.
그 눈빛에 움찔한 헬구스는 변명하듯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놨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승부 그 자체가 중요하겠지. 그 심정도 이해해.”
“할 말이라는 게 뭐지?”
칼라치는 헬구스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도현을 응시했다.
술병을 내려놓은 도현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칼라치에게 내밀었다.
칼라치는 종이를 받아 접혀 있는 부분을 펼쳤다.
사람의 이름이 길게 나열되어 있었는데, 제일 윗부분에 적힌 이름은 다름 아닌 샤르비티 베일이었다.
“뭐지?”
종이에서 시선을 뗀 칼라치가 도현을 봤다.
“반군의 수장인 샤르비티와 그를 지지해 함께 반란을 일으킨 열세 명. 모두 대공의 사촌들이야.”
“그래서?”
“이들이 사라지면 이 전쟁은 대공의 주도하에 빠르게 끝날 수가 있어. 소모전도 피하고, 나와 당신은 전쟁에서 낭비할 시간을 줄이는 셈이 되지.”
도현은 잠시 말을 끊고서 칼라치의 눈을 봤다.
“다음 달 말에 있을 샤르비티의 부친 기념일에 이들 모두가 한자리에 모일 거야. 그의 아버지 죽음을 기념한 의식은 6일간 지속되지. 나는 그 자리에서 이들을 죽일 거야. 당신이 도와줬으면 좋겠어.”
“이들 모두를?”
옆에서 듣던 헬구스는 딸꾹질을 하며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칼라치는 도현에게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왜 필요하지?”
“인정사정없이 적을 짓밟아 줄 만큼 강하니까. 수만 명의 적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싸울 전사기도 하고. 그리고 당신은 수백의 고대 병사들을 불러낼 수 있기까지 하지. 당신이 움직이면 거대한 군단이 움직이는 것과 같아. 그 힘을 빌리고 싶어.”
“대공에게도 강자들이 적지 않을 텐데.”
“그들은 요지에서 사자 동맹군들과 싸우는 중이야. 자리를 이탈하는 게 쉽지 않아. 그렇다고 많은 병력이 투입될 수도 없고. 본성까지 가는 동안 바로 적들에게 그 움직임이 포착될 테니까. 그래서 이번 작전은 나와 당신이 두 자루의 비수가 되어 샤르비티와 그 일당들을 노려야 해.”
도현의 거침없는 말속엔 그동안 그가 보여 주지 않았던 강한 살기가 느껴졌다.
“함께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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