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1] 디 임팩트 20권 6화
지하 감옥에서 올라온 캐서린의 원피스는 피로 붉게 물들어 있어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놀라며 황급히 옆으로 물러나기 바빴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서너 명의 시녀들도 겁에 질려 있었다.
지하 감옥 건물을 나와 대공 공관으로 향하던 그녀는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도현을 발견했다.
“잠시 멈추세요.”
돈조르니를 만나고 집으로 향하던 도현은 뒤를 돌아봤다. 피 묻은 원피스를 입은 캐서린이 다가오고 있었다.
‘옷에 웬 피가 저렇게?’
옷차림만 보면 마치 싸우다 온 사람 같았다. 특히, 손목까지 내려오는 소매는 피를 흠뻑 흡수해서 손으로 쥐어짜면 금방이라도 붉은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릴 정도였다.
‘누구의 피일까?’
그녀가 걸어오는 방향은 감옥이 있는 곳이다. 아무래도 그곳에서 뭔가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도현은 코앞으로 다가온 그녀를 향해 정중히 예를 표했다.
“부르셨습니까.”
“그래요.”
캐서린은 도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봤다. 부드러운 인상이었지만 내면에 큰 힘을 감춘 사내였다.
처음 이 남자를 봤을 때만 하더라도 그가 이렇게 큰 역할을 하게 될 줄은 그녀는 짐작하지 못했다. 그저 돈조르니가 솜씨 좋은 검사 한 명을 데리고 온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는 대상인 압할라를 죽이는 데 힘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며칠 전 붉은 성의 위기를 해결하기까지 했다.
이 남자가 새삼 달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잖아도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는군요.”
“저를 말입니까?”
시선을 땅으로 향했던 도현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 캐서린을 응시했다.
“벨라를 잡고 붉은 성을 구한 게 당신이라고 들었어요. 고마워요, 큰일을 해 주었어요.”
“별말씀을.”
“전쟁이 대공의 승리로 끝나면 당신의 이름은 이번 전쟁을 기록하게 될 가문의 역사서 제일 첫 장에 등장하게 될 거예요.”
도현에 대한 큰 칭찬이었다.
“대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 한둘이겠습니까. 저는 제가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정말 뛰어난 사람은 아무리 스스로를 가려도 빛이 나기 마련이죠. 당신은 자신을 감출 필요 없어요.”
도현은 캐서린이 웃는 모습을 처음 봤다. 비록 찰나간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웃고 있었다.
“당신이 잡아 온 벨라를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그녀는 날 저주하고, 나는 그녀의 몸에 그만큼의 상처를 남기고 왔죠.”
“옷에 묻은 피는 그녀의 것이었군요.”
“질긴 목숨이에요, 그렇게 고문을 받아도 죽지 않다니. 내 자식들도 그녀처럼 잘 버텨 줘야 하는데…….”
벨라의 피를 뒤집어쓴 캐서린의 모습 속에선 섬뜩함이 묻어났다.
“다음에 또 보죠.”
하늘을 멍하니 응시하던 캐서린은 도현을 지나쳐 대공 공관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서던 그녀는 창가에 등을 보이고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백도현과 무슨 얘기를 나눴소?”
대공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그는 창가에서 도현과 아내인 캐서린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지켜본 것 같았다.
“며칠 전 일을 칭찬했어요. 그는 붉은 성을 구했으니까요.”
“그것뿐이요?”
“다른 게 있겠어요?”
어딘지 가시 돋친 그녀의 대답에 대공은 팔짱을 풀고 서서히 돌아섰다.
그의 눈은 사자의 눈처럼 차갑고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모두 물러가라.”
방 안의 시녀와 친위대를 내보낸 대공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침실로 향한 아내의 뒤를 따라갔다.
“당신, 큰 실수를 했어.”
“내가요?”
피로 물든 원피스를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던 그녀는 대공을 살짝 쏘아봤다.
“벨라, 그 악랄한 것을 고문하고 온 게 그렇게 큰 실수인가요? 당신은 며칠간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나요?”
“난 벨라를 두고 말하는 게 아니오.”
“흥! 다행이군요.”
“노드빌은 왜 보냈소?”
캐서린의 표정이 굳어졌다.
“알고 있었나요?”
“내가 경고하지 않았소? 부탁도 했고. 아이들을 걱정하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냉정해야 한다고.”
캐서린은 별말 없이 새 옷으로 갈아입고 뒤돌아섰다. 그녀는 당당하게 말했다.
“당신은 겁쟁이에요. 아이들을 희생시켜 전쟁에서 승리하려는 겁쟁이 아버지라구요!”
“난 아버지이기 이전에 가문을 유지시킬 책임이 있는 사람이요.”
“샤르비티가 대공이 되면 베일 가문이 사라지기라도 한단 말인가요?”
“캐서린!”
대공의 반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당신이 가문을 사랑한 만큼 난 우리 아이들을 사랑해요. 당신은 아이들을 포기해서는 안 됐어요. 남들이 뭐라 하든 당신은 아버지의 도리를 다하는 게 당신다운 모습이었다고요!”
“나와 당신, 그리고 아이들이 존재하기 전부터 우리 가문은 존재해 왔소.”
“참으로 자랑스러운 가문이군요. 아이들이 다 죽고, 당신이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쳐요. 다음 대 대공은 누가 돼야 하나요? 혹시 다른 자식이라도 숨겨 뒀나요?”
“감히!”
대공은 근처의 탁자를 박살 내며 캐서린을 노려봤다.
“말을 가려서 하시오, 나의 인내심도 한계가 있으니.”
“나야말로 인내심이 여기 이 천장까지 당도했어요. 모르겠어요? 내가 왜 이렇게까지 변했는지? 바로 당신 때문이라고요!”
감정이 북받친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노드빌이 당신보다 나아요. 그는 내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어요!”
“그는 죽을 거요, 샤르비티에 의해.”
대공의 차가운 목소리에 캐서린의 흥분된 감정이 급속도로 식어 갔다.
“거짓말 말아요. 그는 우리 가문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에요. 위험하면 몸을 피할 수 있어요.”
“두고 보면 알겠지.”
대공은 몸을 돌렸다.
“기다려요!”
캐서린은 대공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떻게 할 거죠?”
“내가 어떻게 할 것 같소?”
“도울 생각이 없는 거예요? 그는 당신 자식들을 구하러 갔는데?”
“샤르비티가 그를 죽이지 않으면 돌아온 그를 내가 벌할 거요. 그는 내 권위에 도전했으니까.”
싸늘한 눈빛으로 캐서린을 응시하던 대공은 앞을 가로막은 그녀를 옆으로 밀치며 밖으로 나갔다.
* * *
마법 망토를 제작하는 기술은 고대에 끊긴 사라진 기술이다. 그런 만큼 마법 망토의 가치는 대단했다.
리타는 도현에 의해 갈기갈기 찢긴 벨라의 마법 망토를 방 안에서 한 조각 한 조각씩 껴 맞춰 본래의 망토 모습을 복원하는 중이다.
한쪽에선 로나가 한 조각씩 맞춰진 부위를 정밀한 손동작으로 바느질해 이어 붙였다.
점차 손상되기 전의 망토 모습이 드러났다.
“와아, 도현의 검은 정말 무섭네. 망토를 어떻게 이렇게 복잡하게 망가트려 놓았지?”
눈을 크게 뜨고 이리저리 망토 조각을 맞춰 보던 리타는 뒤로 누우며 지친 기색을 보였다.
눈이 뻑뻑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로나, 넌 눈 안 아파? 쉬엄쉬엄해.”
오랫동안 꼼짝 않고 바느질을 하던 로나는 리타의 말에 빙그레 웃었다.
“씨드 나무로 만든 약을 먹은 뒤로 웬만해선 안 피곤해.”
“그래도 무리할 필욘 없지. 좀 쉬어.”
“이것만 마무리하고.”
잠시 후, 로나도 리타 옆에 나란히 누웠다.
집 안은 조용했다. 율리비어스는 도현이 칼라치를 만나러 간 사이 집을 옮겼고, 어베인과 짐브리오, 에드는 혹여나 빠트렸을지 모르는 마법 망토 조각을 확인하기 위해 도현이 벨라를 혼내 줬던 고대 유적터 지하를 조사하고 있다.
리드만 사제는 임시로 만들어진 일곱 신의 신전에서 열심히 설교를 하는 중이고, 영주 딘은 리드만 곁에서 근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조용하네.”
“응.”
짤막하게 대화를 나눈 그녀들은 눈을 멀뚱멀뚱 뜬 채 방 천장을 올려다봤다.
“로나, 도현을 좋아하면 적극적으로 구애를 해, 바보같이 맴돌지만 말고.”
“다크캐슬에서 말해 봤어. 그의 사랑은 확고한 것 같아.”
“너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어디 있다고. 뭐, 나도 좀 예쁘긴 하지만.”
“에드 말로는 지구의 그 사람도 별처럼 아름답다던데.”
“도현은 바보야. 나 같으면 너도 사랑하고 지구에 있다는 그녀도 사랑할 텐데.”
그녀들의 대화는 다시 끊겼다.
열린 창문으로 찬 바람이 들어와 도현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품고 있는 로나의 머리를 식혔다.
“도현은 날 구했어. 이런 일로 그를 괴롭히고 싶진 않아. 그저 이렇게 그가 이곳에 머물 동안 지켜보는 걸로 만족할 거야.”
“하긴, 로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도현에게 받은 게 많지…….”
리타는 누운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 탁자 위에 놓인 자수정을 응시했다.
“스승님, 벨라의 망토를 바느질해서 예전 모습으로 만들면 마법 망토 기능을 다시 되살릴 수 있다고 하셨죠?”
-반반이다.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고.
“어? 말씀이 다르잖아요. 된다면서요?”
-네가 잘못 들었겠지. 난 분명히 가능성은 반반이라고 했다.
“아, 눈 아파 죽겠는데, 꼭 돼야 하는데.”
벨라의 망토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본 그녀는 스승의 도움을 받아 그것이 마법 망토라는 것을 밝혀냈고, 사람을 은신시켜 주는 기능이 숨겨져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비록 마법 망토의 기능을 사용하게 되면 마나 소모가 크고 시력과 청각에도 제한이 생기며 움직이면 바로 은신 기능이 풀린다는 아쉬운 점은 있지만, 그 모든 아쉬움을 뛰어넘을 만큼 순간적인 위기를 넘길 수 있는 보호막 역할을 해 준다.
‘이걸 완벽히 복원하면 나중에 샤르비티를 상대할 때 도움이 될 거야.’
이런 마음으로 리타는 마법 망토 복원에 힘쓰고 있었다.
“스승님을 믿을게요.”
-망토나 얼른 완성해.
“네.”
리타와 로나는 하던 일을 계속했고, 고대 유적터에 갔던 동료들이 돌아왔다.
“샅샅이 찾아봤는데, 망토 조각은 그곳에 더 이상 없었어. 아마 방 안에 있는 게 전부일 거야. 알아서 잘 맞춰 봐.”
무너진 지하에서 돌을 치우며 지하 공간을 살핀 짐브리오가 머리에 묻은 먼지를 털며 말했다.
“수고했어.”
“도현은 아직 안 왔나?”
어베인의 물음에 바느질을 하던 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면서도 그녀의 바늘은 멈추지 않고 꾸준히 움직이고 있었다.
“곧 오겠죠.”
“대장, 칼라치가 도현과 손을 잡을지 모르겠소.”
짐브리오는 그들이 집을 비운 사이 어느 정도 모습이 복원된 망토를 살펴보며 말했다.
“칼라치의 적대감이 많이 사라진 것 같으니, 기대를 한번 해 봐도 좋겠지.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조건부 승낙을 했습니다.”
뒤에서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고, 사람들의 시선은 방문 앞으로 쏠렸다.
“다녀오셨습니까, 스승님.”
소리 없이 나타난 도현은 에드의 인사를 받으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조건부 승낙이면 뭔가 요구 사항이 있었다는 거군.”
“대공 부인 가문이 소유한 영지의 땅 일부를 요구했습니다. 알커서스 지역이라는데, 이유는 말해 주지 않더군요.”
도현은 칼라치를 만나고 온 내용을 동료들에게 설명해 줬다.
“대공은 만나 봤나?”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일단 돈조르니 경에게 보고했는데, 그는 전쟁에 승리만 하면 칼라치의 요구는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을 것처럼 말했습니다.”
“뭐, 그럼 된 거 아닌가?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대공의 대답도 거의 같을 것 같은데.”
짐브리오는 긍정적으로 말했고, 도현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마 내일 중으로 대공에게 연락이 올 것 같습니다. 그때 가면 확답을 들을 수 있겠죠.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무슨 일요?”
바느질하며 도현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로나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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