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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483화 (483/575)

[483] 디 임팩트 20권 8화

도현은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좋은 결과가 나오면 그때 청하겠습니다.”

“좋은 결과는 무엇인가?”

“전쟁을 되도록 빨리 종식시킬 수 있는 저들의 목숨입니다.”

“안 좋은 결과는?”

“저들의 화만 잔뜩 돋우고 도망쳐 오는 것이겠죠.”

“하하하!”

대공은 웃으며 천천히 뒤돌아섰다. 밤을 지새웠지만 그의 눈빛은 전혀 피곤해 보이지도 않았고, 평소보다 더욱 빛이 났다.

그가 무언가 중대한 결단을 내릴 때의 눈빛이 이랬다.

“본성으로 떠나게. 가서 샤르비티와 열세 명의 반역자들을 죽이게. 필요한 건 숙부와 논의하고.”

대공의 정식 승인이 났다. 남은 건 도현의 실행뿐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잠시 뜸을 들인 대공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성에 내 자식들이 갇혀 있네. 그들을 일부러 구하려 하지 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번 임무니까.”

“알겠습니다, 대공.”

도현은 담담히 지시를 받아들였다.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도현이 집무실을 나가기 직전, 뒤에서 대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만약 임무에 지장이 없을 것 같다면…… 셋 중 한 명쯤은 구해 내도 좋겠지.”

이 말을 하기 위해 대공은 밤새워 고민을 하며 자기 자신과 싸워야만 했다.

한동안 대공과 시선을 주고받은 도현은 정중히 예를 표하고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결국 대공도 아버지의 정을 떼지 못했군.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이겠지.’

자연스러운 것이다.

도현은 이제야 차가운 대공의 공관에서 온기가 조금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한 명이라도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암살 작전과 구출 작전.

어느 것에 비중을 더 줄지는 정해진 거나 다름없다. 어찌 됐든 도현의 주목적은 샤르비티와 그 사촌들이었기 때문이다.

대공의 승인이 떨어진 후 도현은 돈조르니와 만났다.

“샤르비티는 본성 광장에서 기념식을 거행할 가능성이 매우 높네. 그 광장은 역대 대공의 즉위식이 벌어진 장소로, 수십만 명이 모여도 될 만큼 넓은 장소지.”

도현은 본성 내부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진 지도를 내려다보며 광장과 광장으로 이어진 여러 길들을 유심히 살폈다.

죽으러 가는 길이 아닌 이상, 퇴로로 사용될 공간도 파악해야 한다.

“길은 직접 현장에서 익혀야 될 걸세. 거대한 도시인 만큼 길이 복잡하거든. 골목도 많고.”

“그래야겠습니다.”

“본성엔 우리 정보원들이 있네. 그들이 자넬 도울 걸세.”

돈조르니는 본성에 있는 대공의 정보원들 명단과 그들의 모습이 담긴 초상화를 건넸다.

“저것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도현의 손이 벽에 걸린 샤르비티와 열세 명의 사촌들 초상화로 향했다.

그동안 돈조르니의 주먹질을 당해 초상화는 여기저기 구겨져 있었다.

“곤란한데. 하루라도 저 빌어먹을 녀석들 얼굴을 때리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으니까 말이야.”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그림을 거둬 도현에게 건넸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함께 가고 싶지만, 상황이 허락하지 않는군. 미안한 마음도 들고.”

“이곳 일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제거할 대상의 얼굴을 머릿속에 다시 한 번 담아 둔 도현은 초상화를 말아 가방 안에 넣었다.

동료들에게도 보여 줘야 했다.

돈조르니는 도현의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술을 따르며 말했다.

“밀튼 영주에게는 대공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내도록 하지. 칼라치가 그의 밑에서 편하게 나올 수 있도록 말이야.”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는 원할 때 언제든 스스로 나올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가 알아서 할 겁니다.”

칼라치는 지난번 도현을 만났을 때, 자신의 거취는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고 강하게 말했었다. 도현은 그의 자존심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그렇게 하게. 언제 떠날 건가?”

“빠를수록 좋겠지요.”

“칼라치는?”

“가는 도중에 접촉할 생각입니다.”

가방을 챙긴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붉은 성을 떠나야 할 시간이 가까워졌다.

돌이켜보면 붉은 성은 그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다. 그의 최종 목적지는 샤르비티가 있는 베일 본성이었다.

전쟁을 발화시킨 샤르비티와 그 사촌들.

그들의 운명에 따라 전쟁의 향배는 크게 요동칠 것이다.

“자네와 함께한 시간은 정말 짧았어. 하지만 마치 오래 사귄 친구처럼 마음이 가는군.”

돈조르니는 술잔을 들었고, 도현은 미소를 지으며 그 술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린 또 만나게 될 거야. 그렇지?”

“그렇습니다.”

“좋은 결과를 기다리겠네. 조심하게.”

단숨에 술을 비운 도현은 술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뒤돌아 방을 나섰다.

복도를 걷는 도현의 눈빛은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샤르비티, 조만간 당신을 보게 되겠군.’

* * *

천여 명 가까운 패잔병들이 밀튼 영주의 진영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은 알리언의 언덕을 지키던 자들로, 그곳은 얼마 전 칼라치가 밀림의 전사들을 몰아내고 되찾았던 요지였다.

“힘들여 찾아 주면 뭐하나, 며칠을 못 버티는데.”

길게 꼬리를 물고 진영으로 복귀하는 패잔병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헬구스는 혀를 찼다.

“또 칼라치를 부르겠군. 알리언의 언덕을 공격하라고 말이야. 대우도 안 해 주면서. 젠장, 차라리 도현의 말대로 본성으로 가서 샤르비티와 화끈하게 한판 싸우는 게 낫지. 대공의 인정도 받을 테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곁에 있던 이디언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물었다.

불평을 토하던 헬구스는 움찔하며 그제야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느껴졌는지 모른 척했다.

“뭘?”

“조금 전에 한 말요. 백도현 얘기를 했잖아요.”

“내가 그런 말을 했나? 잘못 들었겠지.”

헬구스는 자리를 벗어나려다가 이디언의 지팡이에 뒷머리를 맞고서 휘청거렸다.

“뭐 하는 짓이야!”

눈물을 찔끔 흘린 헬구스는 뒤통수를 감싸며 이디언을 쳐다봤다.

“장난해요, 지금! 똑바로 말해요. 백도현이 언제 찾아왔어요?”

“…….”

“당신도 그렇고 그 사람도 그렇고 요즘 이상해. 내가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

칼라치와 살을 맞대고 잠을 자는 그녀는 칼라치의 눈빛만 봐도 그의 감정 상태를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뭔가를 감추고 있었다. 말 못할 비밀이 칼라치에게 생긴 게 분명했다.

헬구스에게 바짝 다가선 그녀는 고개를 내밀어 한 자 한 자 끊어 말했다.

“날 속였다가 나중에 밝혀지면 그땐 정말 가만두지 않겠어요.”

무르익은 요염한 분위기를 풍기는 중년의 여마법사 이디언은 마음이 차가운 여자였다. 단지, 칼라치에게만 부드러울 뿐.

예외적으로 친구로 지내는 헬구스에게도 마음을 어느 정도 열어 잘 대해 줬다. 그러나 언제든 돌아설 수 있는 여자다.

헬구스는 서슬 퍼런 눈빛으로 노려보는 그녀에게 거짓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게 말이야.”

작은 목소리로 뜸을 들이던 그는 주변을 지나는 병사들을 의식해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이건 윌벤슨이나 비버 그 녀석에게도 말해선 안 되는 아주 비밀스러운 작전인데……. 실은 도현이 본성으로 들어가 샤르비티와 사촌들을 죽이려는 계획을 짜고 있어.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그 일을 칼라치와 함께하자고 제안을 하러 왔더군.”

“웃기는 자야, 왜 그 사람을 끌어들이는 거지?”

이디언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왜긴, 강하니까. 도현은 칼라치를 인정한 거라고.”

“쓸데없는 말 하지 말아요. 그의 인정 따윈 필요 없으니까.”

“도현을 마음속으로 미워하는 건 알겠지만 마음을 좀 넓게 써. 그는 당신을 구해 주기까지 했잖아.”

“흥!”

냉소를 흘린 그녀는 들것에 실린 부상병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문을 다시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대공이 한 가지 조건을 들어주면 돕겠다고 했지.”

“그게 뭐죠?”

헬구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을 했다.

“알커서스의 눈 내리는 땅. 그 땅을 준다고 약속하면 칼라치는 그 일을 돕기로 했어. 지금은 대공의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고.”

이디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곳은…….”

“그래, 당신 고향이라면서? 칼라치 그 사람, 역시 순정파야. 나 같으면 그런 쓸모없는 땅은……. 어? 이봐, 이디언! 어디 가는 거야?”

헬구스는 싸늘한 얼굴로 걸어가는 이디언을 급히 따라잡았다.

그녀가 걸어가는 방향은 칼라치와 그녀가 머물고 있는 천막 숙소였다. 아무래도 칼라치에게 가는 것 같았다.

‘이거 야단났군. 단단히 화가 난 얼굴인데.’

냉기를 풀풀 풍기는 그녀에게 뭐라고 말을 걸지도 못하고 그는 전전긍긍하며 그 뒤를 따라가기만 했다.

얼마 후, 이디언은 숙소에 도착해 칼라치를 쳐다보며 크게 소리쳤다.

“어떻게 그런 중요한 일을 내게 말도 안 하고 결정할 수 있어요!”

“이디언.”

칼라치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디언을 진정시키려 했다.

“샤르비티와 사촌들을 죽이는 일이 쉬웠다면 전쟁은 벌써 끝났을 거예요. 당신은 백도현에게 이용당하는 걸 수도 있다고요!”

“이용하는 게 아닙니다. 그가 필요해서 왔던 거지.”

칼라치를 보며 목소리를 높이던 그녀는 숙소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는 사내를 뒤늦게 발견하고 헛바람을 들이켰다. 놀랍게도 도현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너, 넌!”

당황한 그녀는 지팡이로 도현을 공격할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도현은 푹신한 털가죽이 깔린 바닥에 그대로 앉아서 묵묵히 마시던 술을 비웠다.

그녀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그의 모습에 이디언은 어딘지 힘이 빠져 들고 있던 지팡이를 힘없이 아래로 내렸다.

“이미 거래를 했군요.”

“이디언.”

“왜 그랬어요? 여기서도 싸움은 충분히 즐길 수 있잖아요? 밀튼이 불만이면 윌벤슨에게 말하고 그냥 떠나 버려도 되고. 한데, 왜 당신의 눈을 앗아 간 저자와 손을 잡아요? 난 고향 땅 같은 건 필요 없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당신은 피와 뼈가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내가 떠나지 못할 운명이라고 했지만 그렇지 않소. 생각해 보니 당신과 함께라면 그것도 가능할 것 같았소. 난 당신이 가끔 얘기해 주던 그 고향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오. 나는 고향이 없거든.”

칼라치는 이디언에게 미소를 보였다.

옆에서 도현이 보기에 검은 안대를 한 그의 미소는 그의 머리색만큼 아주 강렬했다.

“백도현과 내가 손을 잡으면 누군들 못 죽이겠소? 어떤 위험인들 돌파하지 못하겠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이번 일을 받아들여 주시오. 미리 말하지 않은 건 내가 사과하리다.”

이디언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힘껏 포옹을 했다.

“걱정하지 않아요. 누가 당신을 이기겠어요?”

두 사람은 도현과 헬구스가 지켜보고 있음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깊은 포옹을 하며 열정적인 입맞춤을 이어 갔다. 남의 시선 따윈 의식하지 않는 행동이다.

“창피함을 모른다니까.”

헬구스는 헛기침을 하며 도현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때맞춰 잘 왔네. 자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아주 곤란한 일을 당할 뻔했어.”

“그렇습니까?”

도현은 담담히 답하며 두 사람을 봤다. 그들은 세상에 종말이 올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처럼 계속 키스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가 봤자 별 도움이 안 되겠지?”

“칼라치의 친구가 아닙니까? 그래서 함께 다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뭐, 누구는 땅을 주고 그러는데, 난 뭐 받을 것도 없을 것 같고, 허험.”

도현은 낮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은 이렇게 해도 그는 칼라치와 함께 본성에 나타날 것이다.

“어디 가나?”

헬구스가 따라 일어났다.

“근처에 일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본성으로 가는 건가?”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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