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4] 디 임팩트 20권 9화
밖으로 나가는 그에게 키스를 끝낸 칼라치가 말했다.
“나는 며칠 후에 출발하겠다. 본성에서 보도록 하지.”
“기다리고 있겠어.”
도현은 이디언에게 눈인사를 보낸 후, 천막을 젖히고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모르는 눈치야. 칼라치가 말을 안 한 게 분명해.’
율리비어스의 말이 진실이라면 시한부 인생처럼 그는 서서히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죽음 이후에는 어떤 괴물로 변화를 일으킬지 모른다.
‘칼라치의 고민이 깊겠군.’
알커서스의 눈 내리는 땅은 지금 보니 이디언의 고향이었다. 그 사실을 볼 때 칼라치는 최대한 이디언을 위해 뭔가를 남겨 두고 싶은 모양이었다.
도현은 고개를 돌려 조금 전 나온 칼라치의 숙소를 응시했다. 왠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다잡고 진영을 빠르게 벗어나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숲으로 향했다.
‘나는 해야만 할 일이 있다. 그리고 해내야만 한다. 칼라치 처럼 내 몸속에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주의 기운이 존재하고 있어.’
바크 드라모스에게 치료를 받기 위해서라도, 같은 처지인 영주 딘을 돕기 위해서라도 그는 본성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어 내야만 한다.
지금은 그 일에 집중해야 한다.
* * *
“저기 도현이 와요!”
숲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사람들은 자리에서 하나둘 일어났다.
위험한 임무였지만 도현의 동료들은 그 누구도 이탈하지 않았다. 도현이 떠밀어도 나가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평상시처럼 낄낄대는 짐브리오와 장난이 심한 리타 때문에 가는 길이 즐겁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도 며칠.
강과 산을 끼고 세워진 거대한 성곽 도시가 눈앞에 펼쳐지자 그들의 얼굴엔 긴장감이 엿보였다.
고개를 꺾어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은 거대한 성벽이 외곽을 두른 거대한 도시는 일찍이 도현이 경험한 그 어떤 성보다 웅장하고 압도적이었다.
베일 가문이 지난 수백 년간 누리고 있던 힘과 풍요로움이 모두 저 거대한 도시에 쏠린 듯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왕국처럼 느껴지는 도시였다.
저곳이 바로 대공의 도시, 베일 가문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본성이다.
도시 옆으로 흐르는 강을 따라 거대한 배들이 오르락내리락했고, 전쟁과는 상관없이 각지의 물품들과 사람들이 도시로 유입되고 있었다.
샤르비티는 혼잡한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
안정되고 질서 있는, 그래서 자신의 힘이 곳곳에 미쳐 도시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일종의 과시였다.
한쪽에선 대공과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그것을 안중에도 두고 있지 않다는 자신감.
이 모습이 상인들과 지역 주민들의 입을 통해서 퍼져 나가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부턴 나눠서 가는 게 좋겠습니다. 자유롭게 다닐 수 있지만, 사이사이에 저들의 감시망이 펼쳐져 있을 테니까요.”
도현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해 지기 전까지 목적지에서 보도록 하세.”
어베인은 짐브리오와 로나를 데리고 먼저 언덕을 내려갔고, 뒤이어 사제복을 입은 리드만 사제와 영주 딘이 상인 행렬 뒤에 붙어 본성으로 향했다.
도현은 한동안 언덕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리타와 에드를 데리고 마지막으로 움직였다.
거대한 성곽 도시는 여러 개의 성문이 존재했고, 샤르비티의 병사들은 짐 수색을 하거나 의심스러운 자들을 골라 그 자리에서 검문을 했다.
“어이, 거기! 너희들!”
눈빛이 날카로운 병사가 도현과 에드, 리타를 불러 세웠다.
“여기 사람 아니지?”
“네.”
“무슨 일로 여긴 온 거야?”
“저희들은 용병입니다. 일거리를 찾아서 왔습니다.”
“그래?”
도현의 대답을 들은 병사는 리타를 유심히 살펴봤다.
“이 계집은 어려 보이는데?”
“어려도 한 사람 몫은 충분히 합니다.”
“웃기는군. 통과.”
병사의 비웃음을 받으며 도현은 태연한 얼굴로 에드와 리타를 데리고 사람들의 물결에 합류해 성곽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사람 많네.”
리타는 사방팔방으로 이어진 길 위에서 멍하니 사람 구경을 하다 도현의 손에 이끌려 걸음을 옮겼다.
“리타, 여기선 말썽 부리면 안 돼. 알지?”
“내가 바본가? 아야! 이봐, 왜 어깨를 치고 가는 거야!”
행인에게 버럭 소리를 치던 리타는 도현과 에드의 시선에 슬며시 목소리를 줄이며 미소를 보였다.
“대공의 정보원이 운영하는 여관이 어디라고 했지? 어서 가자.”
* * *
검은 피부의 상인 포만드는 마차에서 내려 몇 대에 걸쳐 큰 부를 이룩한 대상인의 집을 응시했다.
도시 고관들의 집도 이 대상인의 집에 비교하면 초라해 보일 지경이다.
“얼마나 큰 신뢰를 줬으면 베일 가문의 대공들은 대대로 이들 상인에게 이런 큰 영광을 허락했을고.”
노예의 신분을 극복하고 나름 부를 쟁취한 노예 출신 상인 포만드는 흰 이를 드러내며 상인의 집을 감상했다.
“압할라가 죽었으니 이제 이 집안도 기울 날이 머지않았군.”
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상인의 집으로 들어갔다.
“포만드가 인사를 드리오.”
정중히 인사를 하는 그를 알믄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찮은 자와는 상종도 하지 않는 게 그의 습성이었다.
“무슨 일인가?”
“대상인 압할라 님의 장례를 치렀다고 들었습니다. 마땅히 장례 기간에 조문을 와야 했으나, 참석 통보가 오지 않아 부득불 먼발치에서 기다리다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비록 장례식은 끝났지만 뒤늦게라도 위로를 드리고 싶군요.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포만드는 슬픔이 깃든 표정으로 상단주의 자리에 앉아 있는 압할라의 아들 알믄에게 길게 인사를 올렸다.
“되었으니 그만 돌아가게. 자넨 상인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장례 통보가 가지 않은 게지.”
찬바람이 묻어나는 알믄의 말에 포만드의 눈꼬리가 살짝 움직였다.
“저도 상인입니다. 작지만 상단을 운영해 다른 지역과 거래도 하고 있고, 배도 몇 척 있습니다. 몇 년 전엔 남부 대륙으로 직접 가서 큰 수익을 올리기도 했지요.”
“아, 그런가? 내가 몰라봤군. 참으로 대단해.”
차를 마시며 과장된 손짓을 한 알믄은 낮게 비웃음을 흘렸다.
대상단을 운영하는 그의 집안은 대륙 전체에 걸쳐 큰 인맥을 다져 왔고, 또 다른 대상인들과 경쟁을 하거나 손을 잡고 부를 창출해 왔다.
비천한 노예 출신의 포만드가 찾아와 상인이랍시고 같이 어울리려 하는 건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당신은 상인보다는 뒷골목에서 힘자랑을 하며 술집과 도박장을 운영하는 게 어울려.”
“술집과 도박장도 엄연히 상인의 영역입니다. 천대할 게 아니지요.”
“그렇다면 내가 그쪽에 돈을 굴려 개입을 해 볼까?”
알믄은 자리에서 일어나 포만드에게 걸어갔다.
자결한 부친의 시신을 버려두고 홀로 도망쳐 온 게 양심을 건드리고 괴롭혀 장례식도 겨우 마쳤다.
한데, 눈에 차지도 않는 작은 상단의 상인이 찾아와 헛소리를 늘어놓으니 화가 났다.
“먹고살 만큼 됐으면 조용히 처박혀 있어. 대상인의 호칭은 괜히 붙는 게 아니니까.”
알믄이 손짓을 하자 접견실에 배치된 상단 소속의 무사들이 포만드에게 다가왔다.
“대상인이신 압할라 님의 명성을 흠모해 찾아왔는데, 절 반기지 않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제 언행이 불쾌하셨다면 용서하십시오. 그만 가 보겠습니다.”
거의 반강제로 끌려 나가다시피 한 그는 마차에 올라탄 후 느긋한 얼굴로 마부에게 명했다.
“그분이 도착할 시간이 되었겠다. 어서 집으로 가자.”
그가 집에 도착할 시간에 맞춰 샤르비티의 아들 로니올이 수십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갑주와 검을 찬 로니올은 말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좋은 소식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로니올 님.”
포만드는 미소를 지으며 정중히 답했다.
“말해 봐. 뭔데?”
“제 부하들이 대공의 첩자들이 있는 곳을 파악했습니다.”
“그곳이 어디지?”
“승리의 탑 왼쪽 구역에 있는 한 여관입니다. 그곳 주인이 중심인물이더군요. 그자를 잡으면 성안에 퍼진 첩자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을 겁니다.”
“잔챙이가 아니군.”
“그렇습니다.”
로니올은 즉시 말 위에 올라탔다.
말고삐를 움켜쥔 그는 상체를 숙이며 말 옆에 서 있는 포만드에게 물었다.
“정보, 확실하지? 지난번에 허탕 치고 아버지에게 혼이 났다고. 당신도 알잖아.”
“확실하지 않으면 감히 말씀드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가서 놈들을 잡으십시오.”
포만드가 자신 있게 말하자 로니올은 기분 좋게 웃었다.
“좋아, 잘됐군. 가서 싹 쓸어버려야지. 가자!”
수십 기의 말들이 먼지를 만들며 달려갔다.
“우리도 가 볼까.”
포만드가 마차에 오르자 음침한 인상의 마부가 말의 엉덩이에 채찍질을 가했다.
“흐랴!”
* * *
샤르비티의 병사 수백 명이 한꺼번에 여관 일대를 포위하자 붐비던 주변 거리는 금세 정적에 빠졌다.
인근 상점 건물 위에도 궁수들을 배치한 장수는 로니올 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여관 주위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완전히 봉쇄했습니다.”
“수고했다.”
“송구하오나, 왜 이 여관을 포위해야 하는지 아직 저에게 설명을 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도시 내에서 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수 중 한 명인 그는 갑자기 관청에 들이닥쳐 다짜고짜 낡은 여관을 포위하라는 로니올의 지시를 받고 움직였다가 속으로 아차 하고 있었다.
‘또 무슨 엉뚱한 짓을 하려고?’
감히 대놓고 거역할 수 없어 급히 병력을 움직이긴 했지만, 뒷일이 걱정돼 찜찜했다.
이유를 묻는 장수의 얼굴을 말 위에 있던 로니올이 발로 밀어 버렸다.
“말이 많다!”
얼굴에 신발 자국이 남은 장수의 얼굴이 수치심에 붉게 달아올랐다.
‘개 같은 놈이 사람들 앞에서 개망신을 주는구나.’
샤르비티의 아들만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베고 싶었지만 그는 꾹 참았다.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시면 지금이라도 병사들을 물리겠습니다.”
“뭐라?”
“아직 로니올 님에겐 병사들의 지휘권이 없으십니다.”
배포 있게 말하고 뒤돌아선 그는 부관에게 병사들을 철수시키라고 명령을 내리려 했다.
그때 로니올이 말했다.
“저 여관의 주인은 알조베티 베일의 첩자다. 단순한 첩자가 아닌, 핵심 인물이지. 그놈을 잡으면 성안에 침투해 있는 놈들의 잔당을 뿌리 뽑을 수 있다.”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으셨습니까?”
장수의 의심에 로니올은 말 위에서 고개를 삐딱하게 만들었다.
“계속 그렇게 주제넘게 까불 거야?”
“로니올 님을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지난번에도 상점 하나를 불사르고 수십 명을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그 일로 성안의 민심이 좋지 않았습니다.”
“거참 말이 많네.”
로니올은 뒤에 늘어선 직속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로니올 처럼 은색 갑옷을 입은 그들은 여관을 향해 걸어갔다.
“지휘관은 도망치는 녀석들이나 신경 쓰라고. 놓치면 책임을 물을 테니까.”
말에서 내린 로니올은 말안장에 걸어 놨던 은색 투구를 머리에 착용하고 검을 뽑았다.
멀찍이서 구경하는 도시 주민들의 시선이 등 뒤로 느껴졌다.
‘이참에 뭔가를 보여 주겠어.’
그는 직접 여관 안으로 들어가기로 작정했다.
“모두 옆으로 비켜라!”
여관 앞에 늘어선 부하들이 양옆으로 갈라졌고, 그 사이를 위풍당당하게 통과한 그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여관을 나오는 자들에게 걸어갔다.
“저, 저희들은 단순한 투숙객입니다.”
“닥쳐.”
은색 빛이 번뜩인 순간, 용기 내어 말을 한 사내의 목이 길게 갈라지며 피가 솟구쳤다.
“아버지!”
청년은 검을 뽑아 로니올에게 달려들었다.
채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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