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6] 디 임팩트 20권 11화
“구걸은 남자가 할 짓이 아니다.”
중년인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소년의 몸을 탁자에 고정시킨 단단한 가죽끈이 좌우로 움찔움찔하더니 곧 ‘찍’ 소리를 내며 갈기갈기 찢어졌다.
몸이 자유로워진 소년은 황급히 바닥으로 내려와 엎드려 절을 했다.
“사,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법사 님.”
“마법사?”
중년인이 말없이 쳐다보자 거지 소년은 뒤늦게 중년인의 등 뒤에 삐죽 솟아 있는 검 손잡이를 알아봤다.
‘검사인가? 마법사도 아닌데 어떻게 손도 안 대고 가죽끈을 끊어 낸 거지?’
신기한 마음에 멍하니 중년인을 쳐다보던 소년의 시선이 천장으로 향했다. 그를 납치해 죽이려던 자들이 기괴한 모습으로 사지가 꺾여 괴로워하고 있었다.
“가지 않으면 너도 죽을 것이다.”
중년인의 경고에 깜짝 놀란 소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뛰쳐나갔다.
“어떻게 죽고 싶은가?”
중년인의 물음에 허공에서 괴로워하던 자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우릴 죽이면 파괴신이 널 영원히 괴롭힐 것이다!”
“죽음은 새로운 창조가 아닌가?”
“우, 우린 그 대상이 아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야지.”
콰앙!
천장을 뚫고 지붕 위로 날아간 10여 명의 광신도들이 무서운 속도로 추락을 했다.
“안 돼!”
철퍼덕.
땅에 추락한 그들의 몸에서 생명의 기운이 급속도로 빠져나갔다.
“시체를 정리해라.”
“예!”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린 중년인은 샤르비티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내성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들을 끝으로 푸베지토의 추종자들은 더 이상 이 도시에서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다.
“유베린.”
골목에서 들리는 낯익은 목소리에 중년인은 걸음을 멈추고 옆을 응시했다.
달빛이 미치지 못하는 좁은 골목길에서 노인 한 명이 걸어 나왔다.
눈에 익숙한 걸음걸이와 얼굴을 가로지는 검상. 허리에 달랑거리는 검 한 자루.
백 년이 지나도 저 모습은 여전히 기억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한때 같이 생활한 침묵의 기사단 출신이기 때문이다.
“유베린, 정말 자네였군.”
“오랜만입니다, 폴허먼.”
유베린은 손으로 십자가를 그어 인사를 했다. 십자가를 긋는 인사법은 침묵의 기사단원끼리만 나누는 전통의 인사법이었다.
“과분한 인사군. 난 자네도 알다시피 기사단장에 의해 추방된 신세 아닌가?”
씁쓸한 미소를 지은 폴허먼은 유베린의 부하들이 시체를 마차에 실어 담는 모습을 흘낏 쳐다보았다.
“저들은 왜 죽였나?”
우연히 유베린을 목격하고 따라온 폴허먼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샤르비티 경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샤르비티라고? 자넨 그를 섬기고 있나?”
“네. 기사단도 해체되고, 전 저의 길을 가기로 했으니까요.”
“음.”
폴허먼은 절로 탄식을 했다.
수백 년간 이어 오던 침묵의 기사단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단장에 의해 추방된 뒤 꼭 10년이 되던 해, 기사단은 깃발을 내렸다.
기사단장은 초대 기사단장의 유지에 따라 기사단이 생긴 지 380년이 되는 해에 침묵의 기사단을 역사 속으로 떠나보낸 것이다.
폴허먼보다 나이가 어린 유베린은 기사단장이 선택해 수련시킨 마지막 기사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이 눈에 선한 폴허먼은 감회가 남달랐다.
‘그러고 보니 그에겐 특이한 능력이 존재했지, 정신력으로 사물을 움직이는.’
그것은 마나의 힘도 아니고 검의 경지와도 무관했다. 순수한 인간의 내면에 잠재한 무한한 능력이었다.
“지금도 손 안 대고 사물을 이리저리 움직일 수 있는가?”
“죽기 전까지 사라지지 않을 능력이니까요.”
유베린은 특유의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재미없는 건 여전하군. 말에 생명력이 없어.”
“그렇습니까?”
둘은 어두운 거리를 걸으며 24년 만에 만난 서로의 이야기를 조금씩 나눴다.
“솔직히 의외네, 샤르비티를 섬기고 있다니.”
“권력을 가진 자들은 똑같습니다. 그들 중 누굴 선택하든 다를 게 없겠죠.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 주고 저는 그 대가만 받으면 됩니다.”
“자네도 속물이 다 됐군.”
“침묵의 기사단이 사라진 마당이니 저를 구속할 게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폴허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기억하는 유베린은 말수가 적고 검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몸에선 검의 냄새보다 세상 냄새가 깊게 배어 있다.
기사단장이 기사단을 10년 뒤 해체할 거라는 선언을 했을 때, 폴허먼은 그것에 반발해 감히 기사단장을 상대로 결투를 신청했다.
그 대가로 얼굴에 검상을 입었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기사단장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침묵의 기사단은 그렇게 사라질 운명이었으니까.
“대상인 압할라의 집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습니다.”
“그랬나? 그럼 이번에 그가 죽은 일도 알고 있겠군.”
폴허먼은 약간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붉은 성에서 보낸 궁수 에이저와 젊은 검객의 짓이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압할라의 아들 알믄은 아비의 시신을 놓고 온 일이 걸려서인지 뭔가 숨기고 있는 눈치던데.”
“그 일과 관련해선 내가 별달리 해 줄 말이 없네.”
“싸워서 패했습니까?”
잠시 말이 없던 폴허먼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더군, 그 젊은 검객은.”
“그렇군요.”
유베린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자가 대공의 편에 있다면 결국 저와도 언젠가 마주치겠군요.”
“그의 검술 실력은 기사단장만큼이나 뛰어났네.”
“기대해 보겠습니다.”
유베린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한데 압할라가 죽었는데 왜 이 성에 계속 머물고 있는 겁니까?”
“떠나야겠지, 장례식도 끝났으니까.”
“마땅히 가실 곳이 없다면 저와 함께 샤르비티를 돕는 게 어떠십니까?”
“고맙지만 사양하겠네. 오늘 자넬 만나서 반가웠네.”
빙그레 미소를 지은 폴허먼은 헤어지기 전 작별 인사를 침묵의 기사단 방식으로 했다.
“형제여, 건강하게.”
크게 십자가를 긋는 그의 인사에 유베린은 담담한 얼굴로 마주 십자가를 그었다.
“형제여, 잘 가시오.”
* * *
황금빛 갈기를 소유한 사자 두 마리가 샤르비티의 집무실 안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덩치는 보통의 사자 두 배 정도 됐고, 포효할 때마다 드러나는 거대한 이빨과 힘 있는 발톱은 싸울 의지를 상실케 할 만큼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웬만한 몬스터는 순식간에 찢어발기는 압도적인 힘을 지닌 거대한 사자들은 샤르비티가 기르는 애완동물이었다.
“이리 오너라.”
샤르비티의 말을 들은 사자들은 단숨에 달려와 그의 손에 머리를 맡겼다.
사자들의 갈기를 쓰다듬어 주던 그는 고개를 돌려 신하들을 둘러봤다.
반란을 일으키기 전 그의 영지에서부터 그를 충심으로 따르던 영지의 무장들이었다.
본성 밖에 숙영지를 편성해 대기 중인 10만 정병의 지휘관들은 물론, 도시 수비대장과 정보를 관장하는 부대장도 있었다.
“왜들 아침부터 찾아와 이렇게 시위를 하는 것이오?”
“영주님, 붉은 성으로 진군하기 전, 후방을 튼튼히 해야 합니다. 한데 어찌하여 본성을 열세 명의 사촌들에게 맡긴다 하십니까? 감히 말씀드리건대, 붉은 성에 있는 사자를 잡으러 가다가 뒤에 남은 열세 마리의 늑대들에게 당하실 수도 있습니다!”
나이 지긋한 노인이 목청을 높여 주장했다. 노인은 샤르비티의 부친을 모시던 장수로, 지금은 10만 정병의 주요 지휘관 중 한 명이다.
“그들은 나와 한배를 탄 사이. 훗날이면 모를까, 지금은 아니다.”
“안심하실 일이 아니옵니다. 붉은 성에서의 전투가 길어지고 대공의 기세가 살아난다면, 그들은 언제든 배를 갈아탈 자들입니다. 그들을 믿어선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영주님. 훗날을 생각해서라도 본성을 결코 그들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하면 어쩌자는 말인가?”
샤르비티는 사슴 고기를 사자의 입안에 넣어 주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무장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시선을 주고받았다.
“본성은 믿을 만한 자에게 맡기시고, 그들은 이쯤에서 죽여야 합니다.”
“죽이라?”
샤르비티는 손에 묻은 사슴 고기의 피를 천에 천천히 닦으며 신하들을 응시했다.
“알조베티와 싸우기도 전에 우리끼리 피를 보자는 말인가?”
“최근에 그들의 은밀한 회합이 빈번해지고 있습니다. 불안한 요소는 붉은 성으로 출정하시기 전, 미리 제거하는 게 현명하신 선택이십니다.”
신하들은 강하게 주장했다.
“흠.”
미간을 찌푸린 샤르비티는 계단 중간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는 신하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대들은 나와 긴 시간을 함께하며 이번 일을 준비했다. 그 인내심과 노력, 충성심은 나를 감동케 하지.”
“영주님!”
백발의 장수부터 중년에 이르는 장수까지 일제히 부복을 하며 머리를 숙였다.
“사촌들을 견제하는 그대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난 대공을 배신한 자로 세상 사람들에게 낙인이 찍힌 몸이야. 한데, 사촌들까지 이유 없이 죽이면 나의 명예는 어찌 되겠나?”
“전쟁이 끝나고 정식으로 대공의 자리에 즉위하시면 그런 헛소리들은 모두 수그러들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전쟁에서 반드시 이기기 위한 행동입니다. 내부의 불안 요소인 열세 명의 사촌들의 목숨! 거두어 주십시오!”
“거두어 주십시오!”
신하들의 목소리가 집무실을 가득 메웠다.
“골치 아픈 사람들이로군.”
샤르비티는 계단으로 내려온 사자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긴 침묵을 지켰고, 신하들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내가 믿는 건 오직 그대들뿐이다. 사촌들 따위가 아니지. 이번 기념일에 그들이 모이면 목숨을 취하시오.”
마침내 샤르비티가 허락하자 신하들은 기쁜 얼굴로 외쳤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열세 명의 사촌들과 은근히 권력 경쟁을 벌이던 신하들이 물러가자 샤르비티는 차갑게 웃으며 계단에서 일어났다.
열세 명의 사촌들이 딴마음을 품고 있다는 신하들의 주장은 과장된 것이다.
알면서도 그는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전쟁은 사촌들이 아닌 저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신하들이 물러간 자리를 로니올이 차지했다.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널 찾은 건 어제다.”
싸늘한 아버지의 눈빛에 로니올은 몸을 움츠렸다. 아버지가 보낸 사람이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땐, 그는 술에 취해 여자의 품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쓸모없는 녀석.”
못마땅한 얼굴로 그는 아들에게 걸어갔다.
“도시에서 또 소란을 피웠다지?”
“아닙니다, 아버지. 소란이 아니라 알조베티의 첩자들을 잡았습니다. 보고를 받지 않으셨습니까?”
로니올은 억울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칭찬을 받을까 싶어서 술이 깨자마자 달려온 건데, 도리어 역정을 내시네?’
그러나 그의 의문점은 곧 풀렸다.
“멍청한 녀석, 내가 그 여관 주인이 첩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예? 알고 계셨습니까? 그런데 왜 잡지 않으신 겁니까?”
깜짝 놀란 로니올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를 잡으면 또 다른 자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그래서 적절히 지켜보며 대응을 했던 것이야. 한데, 네 녀석이 일을 만드는구나.”
“그게 아니라 전…….”
“나가 봐.”
로니올은 아버지의 사자가 입을 벌리며 하품하는 모습을 잠시 노려보다가 뒤돌아섰다.
‘젠장, 뭘 해도 욕만 먹는군. 나보고 어쩌란 거야.’
화가 솟구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성을 빠져나와 들판을 한동안 달렸다. 저 멀리 대공의 전용 사냥터인 울창한 숲과 산이 보였다.
“며칠 저곳에서 사냥하다 돌아간다!”
그는 부하들에게 외친 후 말을 더욱 빠르게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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