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2] 디 임팩트 20권 17화
어베인은 집 안에 있는 사람들과 칼라치 일행을 반겨 줬다. 나중에야 어떻든 지금은 함께 손을 잡고 공동의 일을 해야 한다.
“반갑군, 난 짐브리오다.”
“로나예요.”
“허험, 난 영주 딘이라고 하네.”
“일곱 신의 종 리드만 사제입니다.”
“나는 위대한 흑마법사 리타야.”
이디언은 리타의 인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코웃음을 쳤다.
“왜 그래? 내가 웃겨?”
“함부로 덤비지 마라, 어린것아.”
싸늘한 이디언의 말투에 리타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너 죽고 싶어?”
“뭐야?”
이디언의 눈가가 차가워졌다.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일 때 칼라치가 나섰다.
“백도현이 안 보이는데, 그는 어디 갔지?”
“그는 샤르비티의 아들 로니올에게 가 있다.”
짐브리오의 대답에 칼라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샤르비티의 아들에게?”
* * *
세상일은 우연이 너무 겹치기도 한다, 마치 운명처럼.
며칠 전 로니올에게 성공적으로 접근한 도현은 그의 호위 무사가 되어 당당히 로니올의 집에 자리를 차지하고 머물고 있었다.
로니올의 집은 내성이 아닌 외성 도시 안에 있는 제법 커다란 집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 집은 브링틱에서 죽은 케일 경의 집이었다.
얼음탑주의 손에 죽어 가던 케일 경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얄궂군,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집을 방문하다니.’
도현은 자식 없이 홀로 살았던 케일 경의 집 내부를 천천히 돌아다녔다.
작은 정원과 3층 구조로 된 꽤 넓은 집은 로니올과 집에 딸린 일꾼 10여 명 정도가 살고 있었고, 경비를 서는 본성 수비대 소속 병사들은 교대로 지키다 때가 되면 병영으로 돌아갔다.
본래는 수십의 호위 무사들이 집 안에서 기거하며 로니올을 보호했지만, 지난번 별장 사건으로 인해 모두 흩어져 버렸다. 지금은 도현만이 로니올의 유일한 호위 무사였다.
“저녁 식사가 준비됐습니다.”
중년의 시녀는 도현의 눈치를 보며 공손히 말했다.
갑자기 나타난 도현은 집안의 일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웃지 않는 차가운 인상에다가 로니올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말을 잘못 걸면 차고 있는 검으로 단번에 벨 것 같은 분위기를 늘 품고 있어서 일꾼들에게 도현은 접근하기 쉽지 않은 존재였던 것이다.
“이 집에서 오랫동안 일했습니까?”
“예? 예. 그렇습니다.”
며칠간 일꾼들과 말도 섞지 않았던 도현이 말을 걸어오자 중년의 시녀는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는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이 집은 원래 다른 사람의 소유였다고 들었는데, 그럼 그 사람 때부터 이 집에서 일을 했던 겁니까?”
“그렇습니다. 케일 경이신데, 브링틱에서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집주인이 죽었는데, 계속 이곳에서 일을 하는군요.”
“그, 그건 저희도 달리 갈 데가 없었고, 그러다 집주인이 바뀌었습니다.”
바뀐 집주인은 힘으로 집을 차지한 로니올이었다.
“케일 경은 좋은 사람이었습니까?”
“저, 저희들에게는 잘해 주셨습니다.”
“그렇군요. 가 보십시오.”
대답을 해 주면서도 겁에 질려 있는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도현은 더는 붙잡지 못하고 그녀를 보내 주었다.
도망치듯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던 도현은 그의 방으로 가던 중 여자와 웃고 떠드는 로니올의 모습을 발견했다.
로니올은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방 안에서 여러 명의 여자들과 술을 마시며 희희낙락거리고 있었다.
저 모습을 별장에서 돌아오고 3일째 본다.
‘한심한 녀석.’
그의 제자였으면 밤새 두들겨서 제정신을 차리게 했을 것이다.
‘샤르비티는 저자를 포기한 건가?’
로니올 말고도 다른 부인에게 낳은 여러 자식들이 있으니, 신경을 덜 쓰는 것 같았다.
‘설마 기념식장에 로니올을 배제하는 건 아니겠지?’
슬며시 불안해지기 까지 했다.
“어! 로이, 거기서 뭐 하시오? 이리 들어오시오! 함께 즐깁시다, 하하하!”
문밖에 서 있는 도현을 발견한 로니올이 벌거벗은 몸으로 술잔을 흔들었다.
“전 됐습니다.”
자리를 뜬 도현은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넓은 공간에 놓인 탁자에 푸짐한 저녁 음식이 술과 함께 차려져 있었다.
문을 닫고 들어선 그는 의자에 앉아 술을 한 잔 따랐다.
“와서 앉지.”
“저런 놈의 호위 무사로 와 있다니, 웃기는군.”
벽에 기대어 있던 칼라치는 도현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래도 저자는 이번 계획에 있어서 핵심이야. 내가 샤르비티와 열세 명의 반역자들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해 주니까.”
“고생하겠군. 그 전까지 저놈에 비위를 맞춰야 하니까.”
“언제 왔나?”
도현은 칼라치에게 술잔을 건네며 물었다.
“어제. 네 제자가 나를 마중 나와 있더군. 에드라니. 그 녀석이 네 제자가 되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도현은 피식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칼라치는 술을 한 모금하며 도현을 응시했다.
“대충 이곳에서 돌아가는 일을 듣긴 했다. 광장에서 열리는 기념식장에서 놈들을 없애고 배를 이용해 탈출하는 것으로.”
“조사해 보니 광장과 멀지 않은 곳에 작은 배들이 오가는 수로가 있더군. 그곳을 이용하면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도시를 탈출할 수 있어.”
“도시를 오가는 작은 배는 성곽에 설치된 수문을 통과해야 한다. 적들이 신호를 받으면 수문이 닫힐 텐데.”
“부숴야지, 나와 당신이.”
도현의 말에 칼라치는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말이 되는군.”
“일단 성곽의 수문을 통과하면 거대한 강으로 진입할 수 있어. 그땐 놈들의 추격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질 수가 있지.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날이 밝으면,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맞이하게 될 거야.”
“반란을 일으켰던 샤르비티와 사촌들이 죽었다는 현실을 말이지.”
칼라치의 대꾸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의 분위기가 달라질 거야, 우리의 손에 의해서.”
“그건 계획대로 일이 진행됐을 경우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난 한 번도 앞에 닥친 일을 두려워하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너만 각오를 다지면 돼.”
무뚝뚝하게 말을 내뱉은 칼라치는 술잔을 비웠다. 그 모습을 보며 도현도 천천히 술을 들이켰다.
‘몸이 괜찮은 걸까?’
칼라치가 죽어 가고 있다는 율리비어스의 말이 생각나 도현은 마음이 심란했다.
기념일까지는 대략 20일 정도가 남았다. 그 안에 그가 잘못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혹시나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암살 작전을 걱정하는 마음보다는 칼라치에 대한 순수한 관심이었다.
“칼라치.”
“뭐냐?”
뭔가 말을 꺼낼 듯했던 도현이 그대로 입을 닫자 칼라치는 인상을 살짝 쓰며 물었다.
“헬구스도 같이 왔나?”
도현은 하고 싶었던 말을 감추며 다른 얘기를 했다. 민감한 그 일을 물어볼 수가 없었다.
“투덜거리며 따라오더군.”
“옆에 친구가 있다는 것은 든든한 일이지.”
“네 옆엔 그런 친구가 많아 보이던데. 도둑 출신부터 이상한 흑마법사 여자까지.”
“좋은 사람들이야. 그 집에 함께 머물고 있나?”
“이디언이 싫어해서. 근처에 집을 하나 구해 머물고 있다.”
리타와 이디언은 물과 불처럼 보자마자 서로 다퉈서 한집에 살 수가 없었다. 대충 그 속사정을 짐작한 도현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한데, 네 동료들이 이상한 얘기를 하더군. 대공의 자식들을 어떻게 구출해 낼지 말이야. 대공이 그의 자식들도 구하라고 하던가?”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상황이 허락하면 한 명이라도 구했으면 하더군.”
“이제 와서?”
칼리치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어쩔 셈이지?”
“지금은 동료들이 정보를 모으는 수준이야. 캐서린이 보낸 노드빌 경이 어떻게 등장할지도 모르겠고. 좀 더 상황을 지켜봐야겠어.”
대공의 자식들이 분산돼 갇혀 있다고 알려진 곳은 두 곳이었다.
한 곳은 내성 안에 있는 지하 감옥이었고, 다른 한 곳은 본성 밖 8만 명 가까운 샤르비티의 대군이 진을 치고 있는 숙영지 한가운데였다.
둘 다 접근하기 쉽지 않은 곳이고 그곳에서 인질들을 구해 내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을 구해 내는 것은 죽이고 도망치는 것보다 배나 힘든 일이다. 인질을 보호하며 탈출까지 해야 하기 때문이다.
“로이!”
밖에서 로니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칼라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 보겠다.”
그가 사라진 후, 로니올이 문을 거칠게 열며 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가 날 찾는다는군. 그런데 큰일이야, 내가 이렇게 술에 취해서 어쩌지?”
낮부터 술을 마신 그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 비틀거리며 다가온 그는 도현이 저녁을 먹던 탁자에 몸을 기댔다.
“내 얘기 듣고 있는 건가?”
“듣고 있습니다.”
“악마를 쫓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다른 능력도 좀 있을 게 아닌가? 제발 술 좀 깨게 도와주시오. 이번에도 제때에 아버지 부름에 맞춰 가지 않는다면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아.”
말을 할 때마다 로니올의 입에선 술 냄새가 진동했다. 도현은 물로 입을 헹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아프실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오, 방법이 있긴 있나 보군. 물론이오. 아픔이야 잠깐 참으면 되는 거니까. 어서 도와주시오.”
“정 원하신다면 어쩔 수 없군요.”
도현은 로니올의 복부를 올려 쳤다. 피할 사이도 없이 제대로 맞은 로니올은 배가 통째로 뜯겨 나가는 고통에 입을 쩍 벌리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벌어진 입에서는 조금 전 먹고 마신 술과 음식 찌꺼기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몸속에 들어간 술기운을 털어 내겠습니다.”
로니올은 그만하라고 제지하고 싶었지만 도현의 손동작은 너무도 빨라 그가 말을 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퍼억!
옆구리를 맞은 그는 바닥에 쓰러지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몸속에 흡수된 술의 기운은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지만, 몸이 자극을 받으면 정신이 예리해져 평소와 같은 모습을 어느 정도는 회복하실 수 있습니다.”
얼굴을 제외한 전신을 도현의 주먹이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그 아픔이 실로 대단해서 로니올은 억억거리며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만 할 뿐 비명조차도 내지르지 못했다.
결국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맞아서 기절한 그를 도현은 연못에 던져 버렸다.
“허억!”
물속에서 허우적대며 정신을 차린 로니올은 연못 밖으로 기어 나와 삼킨 연못의 물을 토해 냈다.
“가서 수건과 로니올 님의 옷을 가져오너라!”
도현의 지시에 근처에 있던 시녀들이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그녀들은 자신들을 못살게 굴던 로니올이 연못에 빠지는 모습이 내심 통쾌했다.
“괜찮으십니까?”
한쪽 무릎을 꿇은 도현은 엎드려 있던 로니올의 등을 두드렸다.
“이 자식! 감히 날 때려!”
로니올은 도현을 노려봤다.
“술이 다 깨셨군요.”
“그렇게 맞았는데 내가 술을 안 깰 수가 있나!”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원하던 것을 얻지 않으셨습니까?”
도현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화를 내던 로니올의 기세가 점차 수그러들었다.
더 화를 냈다간 도현이 그냥 가 버린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을 지켜 줄 악마 사냥꾼 로이가 필요했다.
“그래도 날 때리는 건 너무한 행동이지 않나? 다른 사람이었다면 죽음이 내려졌을 거야.”
“제 행동이 무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이 방법밖엔 없었습니다.”
“다시는 내 몸에 손을 대지 마시오. 아시겠소?”
술이 깬 로니올은 시녀들이 내민 수건으로 얼굴을 대충 닦아 낸 뒤 방으로 향했다.
잠시 후 말끔해진 모습으로 나타난 그는 도현에게 말했다.
“같이 내성에 들어갑시다.”
“제가 그곳에 가도 되겠습니까?”
“당신은 내 호위 무사가 아닌가? 어디라도 나와 함께 움직여야지.”
그들은 말을 타고 집을 나서 내성으로 향했다.
“초라하기 그지없군. 뒤에 수십 명은 데리고 다녀야 하는데.”
도현과 단둘이서 도시의 밤거리를 지나던 로니올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무척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장차 베일 가문의 대공이 되실 분의 큰아들인데, 부끄럽군. 빌어먹을.”
“오히려 이목을 끌지도 않고 좋지 않습니까?”
도현은 마차와 사람들로 붐비는 화려한 밤거리를 구경하며 조용히 말했다.
“천만에.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믿기 마련이야. 내가 힘없어 보이면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믿기 시작한다고. 아무튼 말을 빨리 몰고 싶어도 당신에게 맞은 몸이 너무 아파서 빨리 못 가겠어.”
천천히 말을 몰던 로니올은 도현을 원망하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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