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 디 임팩트 20권 20화
기념일 시작을 며칠 앞둔 어두운 밤, 작은 배의 노를 저으며 짐브리오와 에드는 도시를 감싼 성곽의 수문을 통과했다.
수문을 관리하는 도시 수비대 병사들의 날카로운 검문을 금화 세 개로 적당히 넘긴 그들은 잔잔히 흐르는 강물 위에서 노를 저으며 쭉쭉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이 가는 방향엔 도시로 들어올 수 없는 거대한 규모의 많은 배들이 떠 있었다.
“봤지? 세상일은 돈이 반이다. 병사들은 원래 싸울 땐 충성심이 발휘되지만, 평상시엔 유혹에 잘 넘어오지. 그렇다고 눈치 없이 행동하면 곤란하고. 이 정도는 뭐 괜찮겠지 하는 병사들의 약점을 파고들란 말이야.”
달빛 아래서 노를 저으며 짐브리오는 험한 세상살이를 에드에게 전수해 주고 있었다.
“네…….”
어딘지 힘없는 에드의 대답에 짐브리오는 노를 젓는 속도를 줄였다.
“너, 무슨 일 있었냐? 왜 그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어?”
“아니에요, 아무것도.”
“말 안 하면 강에 던져 버린다. 빨리 말해, 무슨 일이야?”
눈을 부릅뜨고 짐브리오가 노려보자 에드는 노를 저으며 마지못해 답했다.
“그날 저는 배를 지켜야 하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다들 광장에서 스승님을 도와 싸우는데.”
“뭐야, 겨우 그거 때문이야?”
“저는 심각해요, 아저씨. 저도 스승님을 도와 싸우고 싶습니다.”
“에라이!”
짐브리오는 강물을 에드에게 뿌렸다.
“이 녀석아, 넌 그날 광장에서 싸우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맡은 거야. 제때에 우리가 탈 배를 준비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저도 알고는 있는데요, 스승님 옆에서 싸우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질 않습니다. 언제 또 스승님 옆에서 이런 큰 전투를 경험해 보겠습니까?”
에드는 스승인 도현이 실제로 검을 사용하고 적들을 물리치는 장면을 되도록 많이 보고 싶었다.
그것은 그에게 많은 공부가 되고 자극이 되는 일이었다.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한다.”
“영주님이 저 대신 해 줄 수도 있다고 하시던데요.”
에드는 짐브리오의 눈치를 보며 작게 대꾸했다.
짐브리오의 굵은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영주 딘이 그런 말을 했다고?”
“제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시고…….”
“하여간 이 못되 처먹은 인간. 싸울 생각은 안 하고 순!”
짐브리오는 노를 놓고 배 안에 던져 놓은 술병의 마개를 열었다.
“다른 생각 말고 네 역할에 충실해.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선 각자 자기가 맡은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야 해. 절대 긴장 풀지 말고. 알겠냐?”
따끔한 짐브리오의 말에 에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저씨.”
“마셔라. 넌 술을 좀 배워야겠어. 네 스승은 술을 물 마시듯 해도 눈꺼풀 하나 내려오지 않는데, 넌 너무 약해.”
에드는 짐브리오가 준 술병을 받아 한 번에 반이나 마셔 버렸다. 그의 얼굴이 불그스레해졌다.
“기분 좋은데요.”
“머릿속이 복잡할 땐 술이 최고라니까.”
짐브리오는 껄껄대며 남은 술을 비우고는 빈 병을 강에 던졌다.
그들은 얼마 후 강 위에 닻을 내리고 떠 있는 상선에 도착했다.
작은 배가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게 뱃머리의 고정된 고리에 상선에서 내려온 줄을 묶은 짐브리오와 에드는 험악한 인상의 선원들이 지키고 있는 갑판 위로 올라갔다.
이 상선은 해적들이 약탈한 물품을 대륙 곳곳에 돌아다니며 파는 배로, 갑판 위의 선원들도 일반 선원들이 아닌 해적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이 파는 물품은 다양했다. 귀족들의 장식품부터, 아이들의 장난감까지.
“뭘 사려고 왔소?”
거친 말투의 선장이 물었다.
“지금 뭘 사려는 건 아니고, 당신 배와 선원들을 빌리고 싶어서 왔소.”
“우린 용병이 아니오. 돌아가시오.”
짐브리오의 말을 길게 듣지도 않고 늙은 백발의 선장은 뒤돌아섰다.
“여기 실린 물건은 얼마나 되오? 금화 2천 개면 모두 살 수 있으려나?”
선장실로 향하던 선장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이 배의 물건을 모두 내가 사겠소, 그것도 비싼 가격으로. 대신 선장이 날 도와주시오.”
“평생 바다에서 살아왔다. 성난 폭풍이 언제 바다에 휘몰아치는지 나는 알고 있지.”
늙은 선장은 절뚝이며 짐브리오와 에드의 앞으로 걸어왔다. 주름진 눈가에는 잔인함이 묻어 나왔다.
“폭풍 속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가려 하지 마.”
“여긴 강이오, 바다가 아니라. 당신이 말한 바다는 저 멀리 한참이나 배를 타고 가야 나오지. 그러니 폭풍 걱정은 말고 내 제안을 받아들일 건지만 대답하시오.”
“건방진 놈.”
에드는 도끼와 갈고리를 들고 다가오는 갑판 위의 선원들을 보며 슬며시 검 자루에 손을 얹었다.
짐브리오를 한동안 노려보던 선장은 뒤로 물러났다.
“건방지긴 하지만 네 말이 맞다. 여긴 강이다. 안으로 들어와, 너의 말을 들어 보도록 하지.”
선장은 선장실로 짐브리오를 데리고 들어갔고, 얼마 후 그들은 친한 친구처럼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나왔다.
서로의 손에는 술병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그럼 가 보겠소, 선장.”
“하하하! 잘 가게. 만약 약속한 돈을 주지 않으면 배에서 던져 버릴 거야.”
“걱정 마시오.”
웃는 낯으로 헤어진 짐브리오는 에드를 데리고 상선을 내려와 작은 배로 옮겨 탔다.
에드는 노를 저으며 물었다.
“선장과 무슨 말씀을 나눴기에 저렇게 태도가 변한 겁니까?”
“별거 없다. 나도 한때 해적이 되고 싶었다고 했지. 당신이 존경스럽다고 말이야. 빈말이지만 그는 자신을 칭찬하는 얘기를 평생 처음 들어 봤다며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더구나.”
“생각보다 선장은 단순했군요.”
짐브리오는 피식 웃으며 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니, 그는 단순하지 않다. 제일 중요한 게 그의 마음을 웃게 한 거야.”
“어떤 게 말입니까?”
“돈밖에 더 있겠냐? 그는 내가 처음에 말한 것보다 훨씬 큰돈을 요구했다. 나는 그것에 응했고, 그는 나를 그때서야 제대로 받아들인 거야.”
“그렇군요.”
작은 배는 그들이 나왔던 수문 방향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평상시 수문은 열려 있지만 비상시에는 굵은 쇠창살이 아치형의 성곽에서 내려와 배들이 오가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아치형의 수문을 통과한 그들은 위에서 내려오는 배를 피해 옆으로 노를 저어 갔다.
밤이 깊었지만 수로 양옆에 늘어선 술집과 상점 들은 이제 시작인 듯 밝은 등불을 켜 놓고 사람들을 유혹했다.
‘이렇게 큰 도시를 보면 토밀은 너무 놀라 말이 나오지 않겠지?’
천천히 노를 저으며 다리 아래를 통과하던 에드는 고향에 두고 온 어린 동생을 떠올렸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기로는 그보다 동생이 더했다.
동생 생각을 하며 흐뭇하게 웃던 에드의 시선이 막 통과한 다리 위로 향했다.
망토에 달린 모자로 얼굴을 반쯤 가린 사람이 다리 위에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 사람과 시선이 교차했다.
“어!”
에드는 노를 젓다 말고 크게 놀란 목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작은 배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깜짝 놀란 짐브리오가 서둘러 배의 중심을 잡았다.
“에드, 뭐 하는 거야?”
“그 사람과 비슷한 사람을 본 거 같아서요.”
“누구?”
“철가면요. 그때 보급품 부대를 공격했던 철가면 말입니다.”
“뭐라고?”
짐브리오는 고개를 돌려 에드가 바라보는 곳을 쳐다봤다. 하지만 다리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대로 본 거야?”
“그게…….”
에드는 자신 없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워낙 순간적으로 본 일이라 장담할 수가 없었다.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이 그때 그 사람과 왠지 닮아 보이긴 했거든요.”
“흠.”
짐브리오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 다시 노를 저었다.
“그 자식은 도현이 가장 경계해야 할 녀석이야. 만약 그자가 맞는다면 도현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 줘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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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반트는 다리 옆 나무에 기대 점점 멀어지는 작은 배를 응시했다.
배에서 노를 젓는 청년이 그를 알아본 것 같았다.
그가 기억하기론 저 청년과 배 안의 또 다른 사내는 백도현과 함께 다니던 자다.
‘백도현도 온 걸까?’
잠시 호기심이 일어났지만 그는 곧 관심을 끊고 뒤돌아섰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죽어 가던 에린의 비참한 모습만 가득했다.
그는 청동과 철을 두드려 장식품을 만드는 공방을 찾아갔다.
“이 여자와 똑같이 생긴 가면을 만들어 주시오.”
그는 에린의 생전 모습이 그려진 그림을 내밀었다. 공방의 장인은 망토를 뒤집어쓴 휴반트를 쳐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연극할 때 사용하는 가면을 여러 번 제작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가면을 쓰고 다니는 사람은 못 본 것 같았다.
한데, 작품을 의뢰한 사람은 답답하고 무거워 보이는 가면을 착용하고 있다.
“어느 정도의 작품을 원하십니까?”
“내 말 못 들었소, 똑같이 만들어 달라는.”
“그러려면 꽤 큰돈이 드는데 말입니다.”
휴반트는 말없이 작은 보석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고, 보석의 가치를 알아본 공방 장인은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십시오. 저희 공방 솜씨는 도시 내에서도 알아주니까요. 아주 훌륭하게 만들어 보겠습니다. 언제까지 필요하십니까?”
“지금 당장 만들어 주시오.”
“예? 지금요?”
공방 장인이 난색을 표하자 휴반트는 작은 보석을 하나 더 꺼냈다.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바로 제작해 드리죠.”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한 공방 주인은 형태가 완성된 가면 위에 화장을 하듯 색을 입혔다.
점차 생전의 에린 모습이 가면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의자에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휴반트의 철가면 아래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후우, 다 됐습니다. 급하게 만드느라 조금 미흡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 정도면 그림과 똑같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공방 장인은 휴반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완성된 에린의 가면을 내밀었다.
한동안 가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휴반트는 공방 장인에게 손을 뻗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손길에 놀란 공방 장인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피하고 싶었지만 어느새 휴반트의 손은 그의 어깨에 올라와 있었다.
“잘 만들었군. 수고했소.”
“마,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공방 장인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나가는 휴반트의 등을 멍하니 응시하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왠지 죽다 살아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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