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6] 디 임팩트 20권 21화
대공을 배신하고 샤르비티와 손을 잡은 알레드로는 도현이 노리는 열세 명의 반역자 중 한 명이다.
그는 금광이 집중된 헤브론 산맥의 책임자로 그곳에 세워진 성의 성주다.
헤브론 산맥의 금광은 베일 가문의 부를 유지하는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헤브론성의 성주는 대대로 대공에게 충성하는 인물이 임명되었는데, 알레드로는 보기 좋게 대공을 배신했다.
대공 몰래 금광의 금을 빼돌린 사실이 드러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샤르비티와 손을 잡을 이유가 충분했던 것이다.
곧 있을 기념일에 참석하기 위해 헤브론성을 떠나 수백의 병사들과 함께 베일성에 도착한 알레드로는 밤늦은 시각 샤르비티와 독대를 하고 있었다.
“사자 동맹군에 지불할 참전 보상금은 헤브론의 금만으로는 감당하기 벅찰 것 같습니다.”
“당장 지불할 것도 아니고 몇 년의 시간이 있지 않나?”
“최근에 다섯 곳의 금광 중 두 곳이 공교롭게도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난감하군. 헤브론의 금광을 믿고 저들이 날 도운 측면도 있는데.”
샤르비티는 새로 만든 대공의 의자에 앉은 채 보고를 하는 알레드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높은 곳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샤르비티의 시선이 부담됐는지 알레드로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입을 굳게 다물고만 있었다.
두 달 전만 하더라도 알레드로는 베일성에 머물며 샤르비티의 왼팔이 되어 도시의 여러 일을 관장해 왔다.
원형경기장에서 수백의 하급 관리들을 학살한 것도 샤르비티의 왼팔로서 벌인 일이다.
그로 인해 샤르비티 대신 그가 사람들의 지탄을 받게 됐지만 알레드로는 견뎌 냈다. 앞으로 더 큰 권력을 갖기 위해.
하지만 그는 샤르비티 휘하 무장들에 의해 본성에서 밀려나 다시 원래 있던 헤브론성으로 가게 됐다.
분한 마음이 있었지만 그래도 기념일엔 참석하지 않을 수 없어 열세 명의 사촌들 중 제일 먼저 베일성에 도착한 것이다.
“갑자기 잘 나오던 금이 왜 바닥을 드러냈을까? 그것도 한꺼번에 말이야.”
“믿기 힘드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사람을 파견해 확인해 보십시오.”
샤르비티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저었다.
“되었네. 자넨 나와 함께 거사를 도모한 사이인데, 내가 어찌 자넬 믿지 못하겠는가? 그나저나 이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곤란해지겠어. 특히 사자 동맹군들의 귀에 말이야.”
“바닥이 드러난 금광에서 일하던 인부들은 모두 제거했습니다.”
“자네의 결단력이 난 마음에 들어, 알레드로.”
단상의 의자에서 일어선 샤르비티는 계단을 하나씩 걸어 내려왔다.
“이리 와 보게.”
그는 집무실 한쪽에 모형으로 만들어진 광장으로 알레드로를 데리고 갔다.
실제 광장을 축소해 놓은 듯한 광장엔 얼마 전 완성된 제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여기 보이는 의자를 세어 보게. 몇 갠가?”
샤르비티는 제단의 맨 위층을 가리켰다.
“열다섯 개입니다.”
허리를 굽혀 손톱만 한 의자의 개수를 센 알레드로가 대답했다.
“그렇지, 열다섯 개네. 그 숫자가 의미하는 걸 아는가?”
“글쎄요.”
“나와 큰아들 로니올 그리고 자네를 포함한 열세 명의 사촌들이 앉을 자리네.”
“그렇군요.”
“하지만 의자가 너무 많은 것 같아.”
샤르비티는 손바닥으로 모형 의자들을 슥 밀어 버렸다. 그의 행동에 알레드로의 표정이 굳어졌다.
“세 개면 족해. 나와 큰아들 그리고 자네 알레드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한동안 광장 바닥으로 떨어진 손톱만 한 의자들을 내려다보던 알레드로는 귓가에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그것도 나쁘지 않군요.”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면 사자 동맹군에 지불할 참전 보상금은 부족하지 않겠지. 상인들에게 구매한 전쟁 물자 대금도 제때에 낼 수 있겠고.”
“그렇습니다.”
사촌들의 재산은 그만큼 막대했다.
“푸하하하!”
긴장한 알레드로의 등을 두드리며 샤르비티는 크게 웃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농담을 좀 한 거야. 뭘 그렇게 정색을 하고 받아들이나. 아무렴 내가 진심으로 말했겠나?”
“그러셨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알조베티를 죽이고, 영지가 완전히 안정되면 저들에게 지불해야 할 돈이야 어렵지 않게 모일 걸세. 자넨 자네가 맡은 헤브론의 금광을 잘 관리하게.”
단상의 의자로 돌아온 샤르비티는 알레드로에게 미소를 보였다.
“그만 가서 쉬게. 헤브론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할 텐데.”
@
밤늦게 샤르비티를 만난 알레드로는 찜찜한 표정으로 외성 도시에 있는 그의 거처로 향했다.
‘정말 농담을 한 것일까?’
샤르비티가 부하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여전히 미심쩍었다.
‘설마 실제로 그런 짓을……. 아니야, 폭군이 아닌 정식 대공으로 즉위하려면 우리의 지지가 필요해.’
애써 불안한 마음을 잠재운 그는 말에서 내려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의 거처는 헤브론성에서 데리고 온 병사 수백 명이 지키고 있었지만, 그가 믿고 의지하는 자들은 수만 많은 병사들이 아니라 몰락한 가문들에서 떨어져 나온 뛰어난 마법사와 검사 들이었다.
10여 명의 마법사와 서른 명이 넘는 검사들을 고용하기 위해 일일이 사람을 보내 접촉한 그는 그들을 모으기까지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
금광에서 빼돌린 금의 상당 부분은 막강한 호위대를 꾸리는 데 지출됐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마법사들과 검사들이 지키는 정원을 지나쳐 돌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저택 안으로 들어간 알레드로는 그를 기다리고 있던 모비롱과 마주쳤다.
“어떻게 됐나? 내 얘기를 했나?”
모비롱의 물음에 알레드로는 미안한 표정으로 답했다.
“자네 얘기를 꺼낼 상황이 아니었네.”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샤르비티가 이상한 얘기를 꺼내서 말일세. 아무튼 아직 시간이 많으니 기회를 봐서 자네 얘기를 하겠네.”
모비롱은 알레드로와 샤르비티의 도움을 얻어 철가면 휴반트를 죽이고 영주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 그자가 그렇게 강한가? 수천 명의 병사들을 죽일 만큼?”
술잔에 술을 따르며 알레드로가 물었다.
“무서운 놈이야, 악마가 있다면 그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자가 갑자기 미쳐서 날뛰는데, 영주님은 물론 조카인 에린 까지 무자비하게 죽이더군. 그것을 막기 위해 내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그놈과 싸웠지만 결과는 처참했네.”
“위험한 놈이군.”
“그자가 날 쫓아올지 몰라.”
“걱정 말게, 감히 이 성까지 겁 없이 놈이 들어올까? 설령 들어와도 내 호위대라면 그놈을 죽일 수 있을 것이네. 두려워 할 것 없어.”
젊은 시절부터 친구가 된 그들은 우정이 두터웠다.
모비롱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자네뿐이군.”
* * *
‘저들이 널 지켜 줄 것이라고 믿는 것인가, 모비롱.’
병사들로 둘러싸인 알레드로의 저택을 어둠 속에서 응시하던 휴반트는 천천히 철가면을 벗었다.
그는 품속에서 꺼낸 에린의 가면을 철가면 대신 착용했다.
어둠 속에서 에린의 얼굴이 아름답게 빛났다.
‘에린.’
새벽달을 잠시 올려다본 그는 알레드로의 저택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누구냐!”
“알레드로에게 전해라. 모비롱을 넘기지 않으면 다 죽을 것이라고 말이야.”
“미친 자식!”
여자 가면을 쓰고 나타난 휴반트를 향해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차아아악!
휴반트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핏줄기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목이 달아난 10여 명의 병사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허수아비처럼 일제히 쓰러졌다.
철컥.
검을 다시 검집에 넣은 휴반트는 우울한 목소리로 조금 전과 같은 말을 내뱉었다.
병사들은 다시 달려들었고 그때마다 휴반트는 냉정하게 검을 휘둘렀다.
“지겹군.”
꽈앙!
저택 정문 앞에서 백여 명 가까운 병사들을 죽인 그는 문을 부수고 집 안으로 진입했다.
넓은 정원엔 알레드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호위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악귀 같은 놈이 요상한 가면을 쓰고 난동을 부리는구나.”
나이 지긋한 마법사들이 근엄한 얼굴로 휴반트를 꾸짖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비켜라, 늙은이.”
“우리가 누군지 아느냐?”
“관심 없다.”
휴반트는 검을 뽑아 느리게 옆으로 그었다. 검이 울었다.
캬아아아아!
칠흑처럼 어두운 고대의 검은 어둠보다 더 지독히 어두운 검기를 만들며 전방의 모든 것을 덮쳤다.
산처럼 밀려오는 그의 검 앞에 대적할 것은 그 무엇도 없어 보였다.
정원의 땅은 지진이라도 난 듯 갈라졌고 마법사들이 만든 불과 얼음, 마법 방패 따위의 온갖 마법들은 거품처럼 소멸됐다.
눈이 급속도 커진 마법사들의 몸을 암흑 검기가 번개처럼 삼켜 버렸다.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알레드로가 거금을 들여 고용한 마법사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물흐물 녹아 걸쭉한 핏물로 변해 버렸다.
“모비롱, 어디 있나!”
콰앙!
용감하게 막아선 뛰어난 검사들을 단번에 두 조각을 낸 그는 허공으로 떠올라 검을 내리쳤다.
수십 가닥의 암흑 검기가 3층 구조의 집을 벌집처럼 만들며 파고들었다.
콰콰콰쾅!
거대한 집이 연쇄적으로 폭발하며 화염이 솟구쳤다.
집 안에 숨어 있던 모비롱과 알레드로는 갑옷으로 화염을 막아 내며 재빨리 정원 한편에 착지했다.
투구와 갑옷, 검까지 든 그들은 다가오는 휴반트를 맞이해 싸울 태세를 갖췄다.
“고맙네, 끝까지 도와줘서.”
모비롱의 말에 알레드로는 검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조금만 버티면 도시 수비대가 몰려올 거네. 내성에서도 샤르비티의 사람들이 올 것이고.”
“그럼 부탁하네.”
“뭐?”
친구의 이상한 말에 알레드로는 뒤를 돌아봤다.
모비롱이 휴반트가 달려오는 반대편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를 방패막이로 남겨 둔 것이다.
“저런!”
배신감에 치를 떨던 그의 앞에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을 한 휴반트가 불쑥 나타났다.
번쩍.
한 줄기 빛이 알레드르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투구와 갑옷이 반듯하게 갈라진 알레드로는 속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비명 소리를 토해 내며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징벌의 시간이 왔다, 모비롱.’
휴반트와 모비롱의 거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새벽 거리를 달려 도망치던 모비롱은 투구와 갑옷을 내던지며 조금이라도 몸무게를 가볍게 했다.
‘어디로 도망가야 하지?’
달리면서 고민을 하던 그의 몸이 돌연 허공으로 떠올랐다.
‘허억!’
깜짝 놀란 그는 마나의 힘을 이용해 허공에서 내려오려 했지만 거미줄처럼 그의 몸을 휘감은 어떤 보이지 않는 힘 때문에 공중에서 내려올 수가 없었다.
휴반트는 공중에 떠 있는 모비롱을 잠시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근처 지붕 위로 시선을 옮겼다.
쌍검을 등에 찬 중년인이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방해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 충분히 그대가 잡을 수 있었던 사냥감인데.”
지붕 위에서 말을 하던 유베린은 허공에 둥둥 떠서 다가왔다.
“넌 누구냐?”
“샤르비티 님을 섬기는 유베린이라 하오. 만나서 반갑소, 휴반트.”
땅에 착지한 그는 뒤로 손짓을 했다. 검은 복장을 한 수백 명의 사내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샤르비티의 친위대 중 일부였다.
“알레드로의 집으로 가서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 살아 있는 그의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 죽여라. 한 놈도 남김없이.”
“예!”
날카로운 눈빛의 사내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휴반트의 눈앞에서 사라져 갔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알레드로를 죽인 게 당신이라는 게 밝혀지면 곤란할 것 같아서 말이오.”
“그게 너희들과 무슨 상관이냐?”
휴반트는 말을 하며 검으로 허공을 베었다. 유베린의 힘에 의해 강제로 허공에 묶여 있던 모비롱이 쿵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몸이 자유로워진 그는 벌떡 일어나 가까이 다가온 휴반트에게 숨겨 둔 비수를 벼락처럼 날리며 재차 도망을 치려 했다.
그에겐 명예나 체면 따윈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너 같은 놈에게 에린이 죽다니!”
비수를 슬쩍 피한 휴반트는 모비롱을 붙잡아 손가락으로 그의 발목 근육과 인대를 한꺼번에 찢어 버렸다.
우두두둑.
생살이 찢어지는 엄청난 고통에 모비롱은 야수 같은 괴성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아직 한쪽이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