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9] 디 임팩트 20권 24화
어둠이 깔린 거리의 좌우를 살핀 짐브리오는 다양한 물건을 파는 잡화 상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쟁반처럼 둥근 얼굴의 상점 주인과 가깝게 붙어 뭔가 속닥거리던 도시 수비대 병사는 손님으로 보이는 짐브리오가 들어서자 벽에 기대 놨던 창을 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다시 들르겠소. 수고하시오.”
“또 보세.”
병사가 나가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짐브리오는 잡화 진열대 옆에 서 있는 상점 주인에게 다가갔다.
“기름을 좀 사고 싶은데.”
“한 통에 은화 세 개입니다.”
상점 주인은 손바닥만 한 작은 기름통을 내밀었다.
“좀 많이 필요한데.”
“기름은 더 있습니다.”
상점 주인은 작은 기름통을 열 개 정도 가지고 왔다.
“부족해.”
“이것도 부족하다고요?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필요하신 만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상점 주인은 점원을 불렀다.
가게 안에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던 덩치가 크고 근육이 옷 밖으로 튀어나온 점원이 걸어왔다. 뒤뚱거리며 다가오는 모습이 팔이 긴 원숭이 같았다.
“당신 점원이 가지고 올 만한 양이 아니오.”
“대체 얼마나 필요하시기에 그러십니까?”
“이 가게를 채울 만큼?”
“예?”
상점 주인이 놀라며 자신의 가게 내부를 둘러봤다. 이 정도 공간을 채울 기름이라면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손님, 무슨 용도로 사용하실지 모르겠지만, 일반 상점엔 그렇게 많은 기름을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가 일반 상점은 아니잖소?”
짐브리오의 말에 상점 주인과 점원의 눈빛이 변했다.
“병사들이 보급품을 이곳에 판다는 소문이 있던데, 무기부터 기름까지.”
“허튼소리하려면 나가시오.”
상점 주인은 가게 문을 활짝 열고 밖을 가리켰다.
“보급품을 빼돌려 다른 지역에서 팔려면 그 운송비며 위험성이며 상당하지 않소?”
“어허, 이자가 정말! 순찰을 도는 도시 수비대를 불러야 제정신을 차리려나!”
“장사하려면 제대로 하시오, 큰손님이 나타났을 때.”
짐브리오는 가죽 주머니 안에서 금화를 쏟아 냈다.
반짝이는 둥그런 금화들이 탁자 위에 수북이 쌓였다.
“팔 거요, 안 팔 거요?”
상점 주인은 탁자 위의 금화와 짐브리오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결국 열어 놨던 상점의 문을 걸어 잠그고 뒤돌아섰다.
“기름은 어디다 쓰려고 그러시오?”
상점 주인이 다가오며 묻자 짐브리오는 진열대 위의 달콤한 사탕을 입안에 넣으며 답했다.
“서로 간에 일은 되도록 모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상점 주인은 짐브리오를 노려보다가 점원에게 금화를 챙기라고 손짓했다.
“따라오시오.”
상점 주인은 가게를 나와 배들이 오가는 수로 방향으로 걸어갔다.
“내게 기름을 산 일은 절대 비밀로 해야 합니다.”
“걱정할 것 없소.”
얼마 후 그들은 수로가 내려다보이는 창고에 도착했다.
상점 주인은 도시 수비대 병사들이 빼돌린 보급품을 수로와 가까운 창고 여러 곳에 분산해서 보관해 뒀다가 한밤중에 배에 실어 도시 밖으로 옮겨 왔다.
그중 기름 창고에 짐브리오를 데리고 온 것이다.
주변을 살핀 상점 주인은 자물쇠를 열고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기름 냄새가 훅 하고 올라왔다.
“조심하시오, 불꽃 하나라도 튀면 다 죽는 거니까.”
“꽤 되는군.”
짐브리오는 창고 안에 쌓인 커다란 기름통들을 둘러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광장에서 일을 벌일 때 적들에게 어느 정도 타격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이것들을 옮겨 갈 겁니까? 필요하다면 내가 사람을 불러 마차에 실어 줄 수도 있는데.”
“고맙지만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소. 오늘 밤 안에 모두 옮겨 갈 테니 당신은 그만 가 보시오.”
“편할 대로 하시오.”
상점 주인은 창고 열쇠를 짐브리오에게 건네줬다.
그가 창고에서 사라지자 깜깜한 어둠 속에서 영주 딘과 리타, 로나, 에드가 나타났다.
그들은 짐브리오와 상점 주인을 멀리서 미행해 따라온 것이다.
“군기가 이래서야 쓰나. 성벽을 지켜야 할 기름들이 여기로 다 빼돌려지다니.”
영주 딘은 뒷짐을 진 채 창고 안에 쌓인 어린아이 몸통만 한 기름통들을 둘러봤다.
“아, 뭐 하는 거요, 어서 기름을 넣지 않고?”
짐브리오의 재촉에 영주 딘은 헛기침을 하며 품 안에서 마법 주머니를 꺼냈다.
“요긴하게 아주 잘 쓰이는군.”
딘은 창고 안에 쌓인 기름통들을 마법 주머니 안에 쓸어 담고 있는 로나와 리타, 에드, 짐브리오를 잠시 바라보다가 자신의 마법 주머니 안에도 기름통을 담았다.
무겁고 부피가 있는 많은 기름통들이 창고 안에서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헤헤, 다 됐다. 역시 마법 주머니가 최고야. 스승님, 고맙습니다. 스승님이 아니면 이런 귀한 보물을 우리가 어떻게 가질 수 있었겠어요?”
리타는 자수정 속 락제프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보였다.
-너와 곧 이별할 시간이 다가오는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동료들을 따라 창고 밖으로 나오던 리타가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광장에서의 일이 잘 풀리면 전쟁은 대공의 승리로 끝이 날 테고, 그렇다면 난 검은 용에게 자수정 속에 갇힌 내 영혼을 없애 달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
“치이. 검은 용이 스승님 부탁을 들어줄 것 같아요? 안 들어준다니까요.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내가 부탁을 하는 게 아니라 도현이 나선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
“그럼 전 스승님의 영혼을 없애지 말라고 검은 용에게 말하겠어요.”
-리타, 난 이미 죽은 존재다. 그것을 넌 받아들여야 해.
다른 때와 달리 스승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하자 리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스승님…….”
“그만 좀 하시오.”
앞서 걷던 짐브리오가 락제프에게 한 소리 했다.
“아직 일이 성공한 것도 아닌데 자꾸 그런 맥 빠지는 소리를 해서 리타를 괴롭힐 거요? 양심이 있어야지.”
-네놈과는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
“제발 내가 나서지 않게 해 주시오. 그렇게 내게 욕을 먹고도 자기 생각만 하고 리타 생각은 조금도 해 주지도 않고 말이야. 조금 더 리타 곁에 있어 주면 큰일이 나나?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목소리를 높이는 짐브리오의 팔을 리타가 가만히 붙잡았다.
“그만해, 우리 스승님 불쌍하신 분이야.”
리타는 자수정을 주머니에 넣었다.
한동안 말없이 걷던 그녀는 자신 때문에 무거워진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서 새벽에 있었던 알레드로의 이야기를 꺼냈다.
“열세 명 중 한 명이 죽었으니, 이제 열두 명이네?”
“그렇지, 열두 명이지. 샤르비티를 포함하면 열세 명이고.”
짐브리오가 답했다.
“샤르비티도 가차 없네, 부하들을 보내 단번에 자신의 지지자였던 그를 죽여 버리고. 남은 사촌들이 긴장을 하겠는데.”
“샤르비티가 사촌들에게 보내는 경고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이유 때문에 알레드로가 죽은 것일 수도 있겠지.”
영주 딘은 콧수염을 만지며 말을 계속 이었다.
“알레드로가 죽었으니 아마도 도현은 오늘이나 내일쯤 우리를 만나러 오지 않을까 싶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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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서 사용할 기름을 구하고 돌아온 그들은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창문 틈으로 밖을 확인한 에드는 재빨리 달려가 빗장을 풀고 도현을 맞이했다.
“스승님.”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도현은 빙그레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 실금이 간 집은 새로 건축해야 할 정도로 낡았고, 은은한 등불은 낡은 집 안의 분위기와 어울려 아늑함보다는 어딘지 음산함을 더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주방에서 저녁을 먹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음모가 숨어 있는 장면 같았다.
“어서 와, 도현! 저녁 안 먹었으면 같이 먹자!”
리타가 손에 든 빵을 흔들며 말했다.
도현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주방 식탁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영주님의 예언이 맞아떨어졌네요.”
로나는 리타가 만든 야채수프와 빵을 접시에 담아 도현의 앞에 내려놨다. 그녀는 한동안 못 보던 도현의 얼굴을 봐서 그런지 반가운 얼굴이었다.
“무슨 예언을 하셨습니까?”
도현은 무슨 말인지 궁금해 긴 탁자 끝에 앉아 있는 영주 딘을 응시했다.
“뭐, 별거 아니네. 알레드로가 죽었으니 자네가 찾아올 거라고 했지. 예언이라는 거창한 말까지 붙일 정도는 아니지만.”
“그러셨군요.”
도현은 수프에 빵을 적셔 입에 넣었다. 오늘 거의 아무것도 입에 넣지 않아서 시장하던 참이었다.
“리타의 수프 맛이 그리웠어.”
“그래? 많이 먹어, 넉넉하니까.”
도현이 자리에 함께하자 집 안의 분위기는 잔칫집처럼 들썩였다.
사람 한 명이 더 온 것에 불과했지만 도현이 이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그만큼 대단했다.
“모처럼 모두 한자리에 모여서 그런지 몰라도 술맛이 좋군.”
어베인은 술잔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리며 사람들에게 건배를 제안했고,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며 기분 좋게 웃은 뒤, 술을 한 번에 비웠다.
“언제 돌아가야 돼?”
“내일 낮까지는 시간이 있어.”
“잘됐네.”
리타는 연거푸 술을 마셨다. 기름 창고에서 스승에게서 들었던 말이 여전히 그녀의 가슴속에 남아 있었지만, 도현을 보니 조금은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도현은 사람들과 술을 곁들인 저녁 식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암살 작전과 관련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것을 언급하기에는 지금의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영주 딘과 리드만 사제는 짐브리오의 농담에 잇몸이 보이도록 껄껄 웃어 댔고, 리타와 로나는 에드가 거리에서 아름다운 여자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이야기를 꺼내며 그를 놀려 댔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암살 작전을 벌이기 전에 그들이 가장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마지막 식사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밤이 깊어지며 사람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고, 어느 순간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도현에게 시선을 모았다.
“모두들 알레드로가 죽은 건 알고 있을 겁니다.”
“샤르비티의 친위대 짓이라던데.”
“아닙니다. 실제로 알레드로를 죽인 건 휴반트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대답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스승님! 휴반트라구요? 그럼 제가 본 그 사람이…….”
“그래, 넌 잘못 보지 않았어. 그는 철가면 휴반트가 맞다.”
도현은 알레드로의 집에서 휴반트 특유의 검술 흔적을 발견했던 것과 상인 포만드가 가져온 정보를 차례로 풀어서 설명해 줬다.
“그놈이 왜 뜬금없이 여자 가면을 쓰고 그 짓을 벌인 거지?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싶었다면 그런 가면을 쓸 게 아니라 복면을 쓰는 게 차라리 낫잖아. 하여간 이상한 변태 같은 자식이네.”
짐브리오는 미간을 찌푸리며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는 내심 이 도시에 휴반트가 없었으면 했다. 에드가 차라리 잘못 봤기를 바랐다.
그런데 흘러가는 모양새가 우려하던 상황으로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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