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 디 임팩트 20권 25화
“그럼 도시에 퍼진 소문은 샤르비티 쪽에서 휴반트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흘린 것이잖아요.”
로나의 말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아요. 어쩌면 그는 샤르비티의 사람이 된 것일 수도 있어요.”
집 안의 분위기가 약간 가라앉았다.
영주 딘이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럼 그자가 우리 일을 방해할 수도 있겠군.”
“가능성을 열어 둬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그자가 당일 샤르비티를 근접 거리에서 호위를 선다면 어찌 되는가?”
도현은 일순 대답을 못 하고 식탁 위에 펼쳐진 광장의 그림을 응시했다.
머릿속으로 깊이 생각을 한 그는 질문을 한 영주 딘과 주변의 동료들을 돌아보며 천천히 답했다.
“전 샤르비티를 죽일 수 없습니다. 휴반트는 절 자유롭게 놔두지 않을 테니까요. 그를 죽여야지만이 제게 기회가 올 겁니다.”
“음…….”
“결국 그렇게 되면 제가 휴반트를 상대하는 동안 다른 누군가가 샤르비티와 그 사촌들을 없애 줘야 합니다. 그 일을 칼라치가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도현은 만일을 대비해 두 개의 비수를 준비했다.
하나는 본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칼라치다.
‘내가 막히면, 그가 그들을 죽인다. 바뀌는 건 없어.’
그날 결과에 따라 모두의 운명이 달라진다. 도현의 강한 의지에 전염된 사람들은 눈빛이 제각각 빛났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쿵쿵쿵.
“헬구스가 왔나?”
가끔 늦은 시간에 찾아와 저녁 남은 게 없냐고 기웃거리던 그였다. 그도 리타의 음식 솜씨에 감동을 받은 사람 중 하나다.
에드는 벌떡 일어나 창문 밖을 살폈다. 짐브리오 말처럼 헬구스일 거라고 생각하며 밖을 살피던 그의 얼굴에 놀람이 가득했다.
그는 빗장이 걸린 현관문을 열지 않고 주방으로 먼저 달려왔다.
“그가 왔습니다.”
“그가 누군데? 헬구스 아니었냐?”
“율리비어스요, 그가 왔다구요.”
“뭐? 그 인간이?”
쿵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가 더욱 격렬해졌다. 짜증이 섞인 소리였다.
“에드, 가서 문 열어 줘.”
“예, 스승님.”
에드가 문을 열어 줄 동안 사람들은 의자에서 일어나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
“안에 있으면서 왜 문을 이리 늦게 열어 주는 것이냐.”
애먼 에드에게 짜증을 푼 율리비어스는 얼굴을 가린 후드를 뒤로 넘기며 거실에 서 있는 사람들을 길게 둘러봤다.
“두더지 굴에 두더지들처럼 찾기 어려운 집을 구해 잘도 숨어 있구나.”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오신 겁니까?”
도현이 나서서 물었다. 이들 중 율리비어스와 편하게 말을 섞을 수 있는 존재는 그밖에 없었다.
“돈조르니에게 들었다. 너희들이 샤르비티와 사촌들을 죽이려 한다고 말이야. 그런 큰일을 벌이면서 내게 말도 안 하고 사라지다니, 넌 보기보다 음흉한 녀석이구나.”
“각자 부여된 임무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당신은 붉은 성에서 임무를 맡고 있었고 말입니다.”
“날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지 않았다면 제 검이 벌써 움직였겠지요.”
도현을 잠시 노려보던 율리비어스는 피곤한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물 한 잔 줬으면 좋겠군.”
에드가 눈치를 보다 주방으로 움직였다.
“붉은 성은 어쩌고 여기로 온 겁니까?”
“내가 할 일은 다 하고 왔다. 나머지는 붉은 성의 그 형편없는 마법사 놈들의 몫이고.”
“대공이 허락했습니까?”
“내가 가고자 하는데 그가 무슨 힘으로 날 막겠느냐?”
율리비어스는 에드가 내미는 물 잔을 받아 목을 축였다.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했더니 전신에 통증이 왔다.
“전쟁을 빨리 끝내고 난 테르논의 석판만 얻으면 된다. 그것 때문에 널 돕기 위해 온 것이다. 자, 말해 보아라, 이곳은 어떤 상황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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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치의 거처는 도현 일행이 머무는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어딜 가는 거예요?”
이디언이 침대에서 몸을 반쯤 세우며 물었다.
“알레드로가 죽었소. 도현을 만나 자세히 알아봐야겠소.”
“샤르비티의 친위대 짓이라고 하잖아요.”
“곧 기념일이오. 성에서 벌어진 작은 일에도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아니오?”
잠시 말이 없던 이디언은 침대에서 내려와 뒤에서 칼라치를 껴안았다.
“로니올의 집에 가는 건가요?”
“혹시 모르니 에드가 있는 곳에 먼저 가 보고, 오지 않았다면 그곳으로 가야겠지.”
“당신 몸이 요즘 차가워졌어요. 어디 아픈 건 아니에요?”
그녀의 손길이 옷 사이로 파고들려 하자 칼라치는 급히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별일 아니니 걱정 말고 먼저 자시오.”
집을 나온 그는 어둡고 좁은 골목길에 이르러 가슴을 부여잡고 벽에 등을 기댔다.
“크으으으으.”
악다문 이 사이로 옅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심장을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고통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갑작스레 찾아온 고통은 불규칙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다행히 아직 이디언이나 헬구스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들 앞에서 그 고통을 감추는 게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조금 전에도 그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르며 방 안에서 뒹굴 뻔했다.
“빌어먹을!”
통제되지 않는 심장의 고통에 그는 낮게 흐느끼며 골목의 벽을 팔꿈치로 쳤다.
그때마다 돌가루가 튀며 벽에 금이 갔다.
벽을 반쯤 부순 그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벽에서 떨어졌다.
심장의 극통이 사라졌다.
“싸울 수 있겠나?”
도현이 어두운 골목 한쪽에서 걸어 나오며 물었다. 칼라치의 집을 가는 도중에 조금 전 상황을 목격한 것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많이 아파 보이던데.”
“신경 쓰지 마, 아무것도 아니니까.”
차갑게 말을 내뱉은 칼라치는 흐트러진 옷을 바로 하며 당당한 걸음걸이로 도현에게 다가갔다.
“율리비어스에게 들었어, 당신이 처한 상황.”
도현은 더 이상 모르는 척하며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의 몸 상태는 모두에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 늙은이가 감히 내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녔나?”
칼라치의 눈가에 살기가 감돌았다.
“아는 건 나뿐이야. 그도 입이 가벼운 사람은 아니고.”
“여기에 오기 전 그 늙은이의 허리를 꺾어 버리고 왔어야 했는데.”
“원한다면 그럴 수도 있어, 그는 지금 여기에 와 있으니까. 하지만 명심해 둬. 당신이 아플수록, 그가 더욱 필요하단 사실을.”
두 사람은 어두운 골목길에 대치하듯 서서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침묵을 먼저 깬 건 칼라치였다.
“걱정할 필요 없다. 며칠 전부터 심장이 조금 아플 뿐이니까.”
“냉정히 당신 자신을 살펴야 돼. 그날 싸울 수 있겠어?”
“아프다고 내가 못 싸울 인간으로 보이나?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싸워 주지. 나에게도 이 싸움은 중요해.”
“철가면 휴반트가 나타났어.”
칼라치의 표정이 굳어졌다.
“내 집으로 가지.”
도현은 골목길에 사람이 들어서자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율리비어스.”
거실에서 광장이 그려진 그림을 살피며 뭔가를 생각하던 율리비어스는 칼라치가 자신을 지그시 노려보자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얼굴이 불편해 보이는군.”
그의 의미심장한 말에 칼라치는 굳은 얼굴로 도현의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율리비어스의 얼굴을 주먹으로 한 대 갈겨 주고 싶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는 잘못이 없다.
오히려 고대 병사의 힘을 얻음으로써 벌어질 어두운 미래를 경고해 준 게 다름 아닌 율리비어스 그였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빌어먹을 자식.’
칼라치는 무거운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문을 닫고 돌아선 도현은 칼라치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손에는 아래층에서 가지고 올라온 술 한 병과 잔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마실 텐가?”
도현은 잔에 술을 따라 칼라치에게 내밀었다. 천천히 술잔을 받아 든 칼라치는 도현을 보며 물었다.
“휴반트라니, 무슨 말이냐?”
“그가 이곳에 있다. 알레드로를 죽인 것도 그고.”
도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낮에 알레드르의 사건과 관련된 휴반트 이야기를 설명했다.
“그놈이 샤르비티의 지시를 받고 알레드로를 죽인 건가?”
“글쎄, 내 느낌으론 아니야. 지시를 받았다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분노를 그곳에 분출해 놨다고나 할까. 뭐, 그런 느낌이었어.”
“그럼 왜 그런 소문이 난 거지?”
“모르겠어.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자리에 휴반트가 있었고, 그는 얼마 전까지 사자 동맹군의 일원이었다는 거지. 상대하기 쉽지 않은…….”
도현은 눈을 빛내며 술잔을 내려놨다.
“만약 그가 샤르비티의 사람이라면 광장 기념식장에서 우릴 막으려 할 거야. 그의 검을 막을 사람은 이 집에서 나와 당신뿐이고.”
“내가 그놈을 상대하지, 그렇지 않아도 그놈 면상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말이야.”
칼라치는 그의 아버지인 스므차를 죽인 게 휴반트라고 거의 심증을 굳힌 상태였다.
“아니, 미안한 말이지만 당신의 지금 몸 상태로는 그를 상대하기 벅찰 거야. 휴반트는 내가 맡는다.”
“뭐!”
칼라치는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술잔이 흔들리며 안에 담긴 술이 넘쳐흘렀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난 전체를 봐야 돼. 당신이 왜 휴반트에게 집착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임무를 띠고 왔다. 난 그 임무에 가장 적합한 행동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 그날, 지금보다 몸 상태가 좋아진다고 자신할 수 있나?”
칼라치의 얼굴에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날 휴반트가 있다면 그는 내가 상대한다. 그리고 당신은 나대신 샤르비티와 사촌들을 맡아 줘. 샤르비티의 친위대장인 유베린도 범상치 않은 자라서 상대하기 쉽지 않을 수도 있어.”
실질적으로 칼라치가 제일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 셈이다.
“율리비어스나 내 동료들이 힘을 합하겠지만, 수많은 병사들과 친위대를 상대하기 벅찰 거야. 따라서 당신은 정말 아파선 안 돼.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때까지 버텨야 돼.”
“냉정하군. 그 뒤에는 내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건가?”
“그렇게 들렸어도 할 수 없어. 당신이 못 버티면 모두가 무너지니까.”
도현은 술잔을 눈높이로 올리며 칼라치를 응시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하지. 당신에게 닥친 일, 안타깝게 생각해.”
“동정은 필요 없다.”
술잔을 비운 칼라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가다 우뚝 멈춰 섰다.
“그날 내가 만약 잘못된다면, 이디언을 부탁한다.”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남은 술을 비우고 일어선 도현은 창밖을 내다봤다.
거리를 걷는 칼라치의 뒷모습에서 쓸쓸함이 묻어났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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